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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절의 나

by ACCIGRAPHY

어떤 시절의 나는 남으로 느껴질 만큼 신선하다


글로 남겨두지 않았더라면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모든 시절의 내가 지닌 고유성


올해는 대략 14개 정도의 시절이 지나갔다. 연말까지 몇 개의 시절이 더 오고 갈지 모르겠지만 일단 기대된다


헤이조(hey joe, 1966)를 부르던 지미 핸드릭스가 퍼플헤이즈(purple haze, 1967)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팬들은 야유했다


그들은 지미가 어떤 시절에 있는지 알지 못했고 지미는 그저 자신의 시절을 살 뿐이었다


어제 문득 작년 겨울을 살던 내가 쓴 글을 보았다 사뭇 진지한 초등학생이 쓴 일기 같아서 밑에 갖다 붙여 본다


(요즘 난 작두 탄 통역사의 시절을 살고 있다. 으른의 삶이다. 내 입으로 작두 탔다고 하기 뭣하지만 어쩔 수 없다. 마이크 쥐면 신명이 난다. 그래도 몸은 힘들다. 다래끼도 왕대빵만한 거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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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차곡차곡 (2024년 12월)


오늘은 잠과 깸 사이를 책장 넘기듯 일어났다. 꿈도 적당히 재밌게 꿨는데 헤로도토스가 자기는 우크라이나 사람이 아니라며 억울한 표정으로 조목조목 반박했다. 관련 내용을 보다 잠든 탓이다. 이런 꿈들은 깸과 동시에 스르륵 몸에서 빠져나간다. 특히 하이라이트인 조목조목의 부분들부터 유실되므로 원통함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 본 결과 깨자마자 큰 동작을 하지 않으면 어느 정도 남는다는 걸 깨닫고는 안방에서 거실 책상까지 도둑발을 하고 살모시 걸어가 꿈을 건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만의 리추얼로 간주했던 이 행위에 어느 정도 과학적 근거가 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꿈도 화학작용이라 흔들면 흐트러진다 정도의 논지였다. 이 논문을 접한 후 나의 도둑 걸음은 고양이 걸음으로 진화했고 기록의 세밀도도 증가했는데 심심할 때 읽어보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


물론 나한테만 재밌지. 이를테면 이런 거야: 금귤나무가 원래 그렇게 크진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꿈에 굉장히 큰 금귤나무가 등장해. 평소에 금귤 관심도 없는데 왜 나오는지 모르겠어. 더 웃긴 게 열매들이 나 따가기 좋으라고 그물망으로 묶음 포장이 되어 있는 거야. 그것들을 한 손에 하나씩 들고 신나게 걸어가다 하나를 까 봤어. 근데 안에 금귤 속살이 아니라 반짝반짝 금귤맛 사탕이 들어있는 거야. 먹어보니 맛은 있는데 내심 이상한 거지. 어? 과일 안에 왜 사탕이 들었어? 뭐 이런 식으로 흘러 가. 쓸데없이 그래픽이 너무 고퀄이라 이것도 너무 웃겨.


그러다 결국 이 꿈의 주인공이 '차곡차곡'임을 깨달았어. 부사가 주인공인 꿈도 있거든. 금귤나무로 시작해 세상 모든 차곡차곡의 문명별 변주가 눈앞에 귀 속에 피부에 냄새로 맛으로 구현되었어. 그러면서 내가 요즘 달리는 방식에 대한 - 약 30분에 동안 걷기에서 조깅, 러닝을 거쳐 스프린팅으로 마무리되는 달리기 - 피드백을 받았는데, 금귤나무가 나보고 아주 잘하고 있다는 거야. 차곡차곡 아주 잘하는 짓 이래. 다른 사람 몸에는 몰라도 내 몸에는 그게 차곡차곡 이래.


여기까지 왔을 때 1차로 깼는데 아침 6시.

음... 이게 차곡차곡이구나. 그러면서 물어보는 거지. 지금 눈 뜬 김에 일어날 거냐, 아니면 더 누워있을 거냐. 우와 근데 일단 선택권이 있다는 게 마음에 드네. 감사하네. 선택권 없는 날들도 많았는데 그렇다면 이 좋은 기분을 누워서 좀 더 누려보자. 일어나면 흩어질 것 같으니.


금귤 사탕 속에 레이어링이 있었는데, 잘츠부르크에 파는 모차르트 초콜릿처럼 뭔가 다양한 갈래의 금귤맛이 들어가 있었어. 가장 중심부에는 금귤 마말레이드 같은 게 있었는데 황홀하더라. 그리하여 오늘부로 나는 꿈에서 세상에 둘도 없는 금귤 사탕을 먹어본 사람이 되었다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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