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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파도 Oct 11. 2022

흔들리며 살아남을 용기 ⑤

친애하는 내 감정의 파도에게|Ep.10

기다림의 시간


오전의 마지막 진료를 끝내신 선생님은 직접 밖으로 나오셔서 나와 아빠를 맞이해주셨다. 선생님은 전날 메일에 적어주셨던 것처럼 나와는 간단하게 인사를 한 뒤, 바로 아빠와 함께 진료실로 들어가셨다. 선생님께서 직접 점심시간을 내어주시면서 상담을 해주시는 터라, 간호사 선생님들은 모두 나가고 로비에는 나 홀로 남게 되었다. 시계도 하나 없는 병원 로비에서 나는 30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아무도 없는 병원 로비에서 30분을 기다리는 일은 나에게 꽤나 힘든 일이었다. 어제의 메일을 받은 뒤로 나는 선생님을 믿기로 마음먹었지만, 아빠가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온 뒤에 태도가 어떻게 변할지는 내가 예상할 수 없는 영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기다리는 것은 26년이라는 시간 동안 충분히 해왔으니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말을 예측할 수 없는 상담을 기다리는 것은 나에게 정말 힘든 시간이었다.


나는 로비에 있는 잡지들을 하나씩 읽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잡지를 몇 권이나 읽었는데도 상담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선생님과 아빠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가 궁금했다. 상담실 가까이 가서 엿들어볼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곧 선생님이 어제 내게 보여주셨던 진심이 기억났다. 선생님이라면, 적어도 그분이라면, 아빠와의 면담을 잘 마쳐주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끝내 30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진료실의 문이 열렸다.


"파도 씨, 잠깐 볼까요?"


내가 가장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화해의 시작


아빠는 진료실을 나오고, 나는 아빠가 나온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마주치는 찰나의 순간에 나는 아빠의 표정을 모두 읽었다. 약간 붉어진 눈시울, 풀어진 표정, 그리고 애써 짓는 미소와 그 끝의 떨림까지. 그 찰나의 인식만으로는 이야기가 잘 이루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을 가다듬으려 노력하면서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다시 선생님과 나는 마주 보게 되었다. 선생님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나는 조금 많이 놀랐다. 마주한 선생님의 눈시울도 붉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스크 속에 가려져 있었지만, 선생님은 똑같이 웃고 계셨다. 그리고 천천히 운을 떼셨다.


"저는 오늘 파도 씨의 아버님을 뵙고 선택을 하려고 했습니다. 첫 번째는 파도 씨를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는 것. 두 번째는 파도 씨와 부모의 화해를 돕는 것."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선생님의 답을 기다렸다.


"상담을 하는 내내 아버님이 가장 많이 하신 행동은 '반성'이었습니다. 아버님 본인이 잘못해서 파도 씨의 상태가 이렇게 된 것인지에 대해 많이 물어보셨어요. 제가 마주한 파도 씨의 아버님은 좋은 분이세요."


내가 원하던 대답이었다. 숨이 트였다.


아빠를 병원에 데려가면서 가장 두려웠던 것은 '의사 선생님이 자랑스러운 나의 아빠를 인정하지 않는다면?'이었다. 나는 아빠를 미워하지만, 동시에 아빠를 가장 사랑한다. 나는 이미 나의 이런 이중적인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된 건 모두 아빠의 탓이라고 말하면서도, 내가 이렇게 된 건 아빠의 탓이 아닌 내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어 했다. 당신은 충분히 잘해주었다고, 내가 이렇게 아픈 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선생님이 그걸 꼭 알아주셨으면 했다.


"파도 씨, 저는 앞으로 '화해'를 도와드릴 겁니다. 화해는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아요. 지금까지 내가 받아왔던 것들을 단번에 인정해 달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쉽지 않은 과정이겠지만 노력해봅시다.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선생님의 답을 들은 나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눈물을 간신히 참으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부모를 미워했지만, 그 미움에는 너무나도 큰 사랑이라는 바탕이 깔려있었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할 수도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니 내가 원하는 것은 단절이 아닌 이해이고, 화해다.


선생님은 웃으면서 나를 배웅하셨다. 다음에는 웃는 얼굴로 볼 수 있기를 바라며, 이 떨림의 순간을 잊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아빠와 함께 웃으며 병원을 나섰다.


나는 흔들리더라도 살아남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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