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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창 May 09. 2023

늑대가 된 양

단편소설

<늑대가  



1. 숫자를 세는 양


 우리는 지난여름까지 백 하고도 열네 마리였다.

그리고 가을이 되었을 때, 우리는 백 하고도 세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늑대들의 발정기가 끝났는지 녀석들은 이틀이 멀다 하고 우리 주변까지 내려왔다. 밤은 어슬렁거리는 늑대의 달그림자처럼 날마다 초원에 들어붙어 느리게 지나갔다. 늑대가 우는 밤에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밤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의 주인은 우리 주변에서 보초를 서며 우리를 지켰다. 그러나 털과 무리가 적은 인간에게 초원의 밤은 춥고 외로웠다. 우리의 주인은 차갑게 식은 몸과 마음을 덥히려고 홀짝대며 술을 들이켜다가 아침을 못 보고 잠들었다. 늑대들은 그 틈에 우리의 약한 틈을 뚫고 우리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 중 하나의 목을 물고 늘어졌다. 그리고 숨통이 끊어진 우리 중 하나를 끌고 초원의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갔다.

 우리는 그 몸서리치는 밤들을 내장에 새겼다. 우리 중 누군가가 늑대에게 물려   죽은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엄연한 사실이었지만, 언제 몇 마리가 죽임을 당했고, 몇 마리가 남았는지 알고 있는 양은 오직 나 혼자였다.

언제부터 숫자를 셀 수 있게 됐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우리에 박힌 말뚝의 개수와 물 양동이의 개수, 어미 양들의 젖꼭지 개수, 그 젖꼭지처럼 초원에 솟아있는 언덕의 개수를 헤아릴 수 있게 됐다. 늙은 양들은 그런 나를 보고 ‘불길할 만큼 총명한 양’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이백 하고도 칠십칠일 전, 내 어머니는 주인의 칼에 죽었다.

그날 두 마리의 늙은 양이 더 죽었는데, 우리의 주인은 잔뜩 술에 취해서 세 통의 빵조각을 우리에 던져 넣었다. 우리는 그날 셋이나 죽임을 당했고, 우리의 주인은 그날 제 족속 한 마리를 새로 들였다.


 숫자를 센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짓이었다.

내일이면 어머니가 죽임을 당한 지 이백 하고도 칠십팔일이 된다는 것, 우리의 수가 백 하고도 세 마리나 두 마리밖에 남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 숫자를 우리  안에서는 나밖에 모른다는 것.

나는 홀로 숫자를 헤아리며 고통에 신음했다.


 오늘은 올해 다섯 번째로 태어난 백 하고도 사십삼일 된 양이 늑대에게 물려갔다. 우리의 주인이 또 술에 취해 잠이든 틈에 해가 뜨는 언덕너머에 사는 늑대무리가 우리를 습격했던 것이다. 겨우 백 하고도 사십삼일 살았던 그 어린양의 부모는 늑대가 다가오자 내장을 벌벌 떨면서도 새끼를 지키고자 단단한 머리통을 들이대가며 저항했지만, 다른 양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제 살과 가죽을 지키고자 멀찌감치 떨어져서 몸을 사리고 있었다. 백 하고도 사실삼일, 겨우 두 계절을 살았던 어린양은 물어뜯긴 목덜미 속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숨통에 가득 차서 죽었다. 늑대들은 입에서 입으로 번갈아가며 죽은 양을 물어 날라 언덕을 넘어갔다. 언덕 너머에서 백 하고도 사십삼일 동안 자라난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까드득 까드득’ 밤 새 들려왔다. 우리의 주인은 아침이 돼서도 그 백 하고도 사십삼일 살았던 양의 죽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리 안에 우리는 이제 백 하고도 세 마리였고, 그 사실과 숫자를 알고 있는 것은 나뿐이었다.


 양들이 죽어간다. 숫자가 줄어든다. 한 달 새 열한 마리의 양이 죽었다.

다른 양들은 그 숫자를 모른다. 다만 희생된 양의 어미와 아내, 새끼들만이 개별의 슬픔과 상실감 속에서 풀을 뜯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아무리 “한 달 동안 열한 마리의 양이 죽었다!”라고 외쳐봐야, 우리 안에   양들은 “그래서? 항상 있어왔던 일이잖아.”하는 심드렁하고 무기력한 반응뿐이었다. “함께 우리를 지켜요! 힘을 키우고 늑대에게 맞섭시다!” 초원에서 풀을 뜯어먹던  정오에 내가 소리를 높여 말했을 때도 “필요 없는 짓이야.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  있고, 뜯어야 할 풀이 있어. 늑대들에게는 늑대들의 일이 있을 뿐이야.”라는     늙은 양의 양다운 말이 돌아올 뿐이었다. 나는 며칠 동안 실망감에 사로잡힌 채 망연자실해서 풀과 열매만을 뜯어먹었다.


 우리의 주인이 우리 안에 던져준 소금을 먹고 있던 날, 늘 상 그랬지만 이번에는 소금보다 모래가 더 많았다. 내 두툼한 털가죽 안에 있는 염통과 단단한 대가리 안에서 불현듯 화가 치밀어 올랐다. 뜨거운 혓바닥과 소금을 삼키던 목덜미로부터 분노와 힘이 일순간에 뿜어져 나와, 나는 네 발로 덩실덩실 뛰기 시작했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가 약한 양이라는 사실이 진저리 났다. 나는 주위에 어슬렁거리며 풀을 뜯고 있던 양들을 닥치는 대로 들이받았다. 나보다 두 배나 큰 수놈들이 내 받치기에 나가떨어졌다. 별안간 벌어진 내 박치기공격에 우리 안에 모든 양들이 놀라 도망치고 흩어졌다. 나는 내친김에 초원의 풀을 분쇄시키던 내 이빨로   양들을 물어댔다. 마치 늑대라도 된 듯이. 이빨에 발과 귀를 물린 양들은 양답게 ‘메에’ 하고 울며 오줌을 지리고 눈을 질끈 감을 뿐, 저항하지 못했다. 나는 거의  반나절 동안 닥치는 대로 들이받고 미친 듯이 물어댔다. 늙은 양들은 덩치가 큰  수컷들 뒤에 숨어서 내가 숫자를 너무 많이 세는 바람에 미쳐버린 거라며 혀끝을 찼다.  이제 양들은 내 숨소리만 들어도 호들갑을 떨며 우리 한편에 둥글게 무리 지어 뭉쳤다. 마치 늑대를 상대하듯.


 단순히 모든 게 부조리하고 억울했기에 했던 악에 받친 몸부림이었다.

그런데, 내 행동은 뜻 밖에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이제 양들은 나를 무서워했기에, 나는 양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나는 이제 양들을 늑대로부터 지킬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다.




2. 자경단


 어머니가 죽임을 당한 지 이백 하고도 구십사일이 되던 날. 동이 트기까지 천오백 발자국을 걸을 만큼의 시간이 남은 늦은 새벽, 멀리 해가  지는 언덕에서 어둠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늑대였다. 해가 뜨는 언덕을 넘어 내려오던 덩치가 큰 다 자란 늑대들보다 작은, 아직 어린 늑대 네 마리였다.

어둠 속에서 그 어린 늑대 네 마리는 푸르게 솟아났다. 늑대의 움직임을 알아챈    우리 안에 양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성을 잃고 놀라 날뛰기 시작했다.    우리의 주인은 오늘따라 웬일로 일찍 깨어나서 제 새끼들을 데리고 함께 연기가 나오는 탈것을 몰고 물을 길러 나갔던 터라, 우리 안에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우리밖에 그 무엇은 없었다.


 늙은 양들이 유독 난리였다. 그 늙은 양들은 나이만큼의 겁을 집어먹었는지 어린것들보다 더 호들갑을 떨었다. 늙은 양들은 늑대에게 물려 죽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우리의 중앙으로 파고들었다. 그 바람에 어린양들이 두 발굽에 마구 짓밟혔다.

늙은 양들이 늑대에게 잡혀갔던 역사는 내가 태어난 이후로는 없었다. 늑대들은 이제 막 살이 붙기 시작한 어린양을 좋아했다. 살은 부드럽고 뼈는 연해서 물어뜯기 수월하고 피 냄새마저도 신선한 어린것들을. 늙은 양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언제 목에 칼을 들이대고 가죽을 몽땅 벗겨낼지 모를 우리의 주인이었지만, 늙은 양들은 그저 구분 없이 겁을 냈다. 태어난 지 이백일도 안 된 어린양들이 늙은 양들에게 떠밀리고 밟혔다. 늑대는 아직 저만치 산딸기가 맺혀있던 돌밭에서 희미하게 보였으나, 우리 안은 고통스러운 ‘메에’ 소리와 흙먼지가 가득했다.

이대로라면 늑대에게 물려 죽기 전에 늙은 양들에게 어린양들이 밟혀 죽을 것 만 같았다. 나는 ‘메에에 에’하고 소리를 내지를 시간도 아깝게 여겨, 곧바로 뒤로 여섯 발자국을 물러섰다가 무리 안으로 고개 숙여 돌진했다. 젊은 양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 앞발을 올린 채 대열을 흐트러트리던 늙은 양 한 마리가 내 머리에 옆구리를 들이 받혀 고꾸라졌다. 나는 곧바로 머리를 들어 무리에서 이성을 잃고 위협적인 행동을 하는 덩치 큰 수컷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보다도 훨씬 덩치 큰 수컷들이 내가 들이받으러 달려오는 줄도 모르고 흥분해서 날뛰다가 내 박치기 한 방에 바닥을 나뒹굴었다. 내가 네 마리의 수컷들을 들이받으니, 그제야 겨우 양들이 한 곳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백 하고도 한 마리의 양이 둥글고 단단하게 뭉쳐졌다. 나는 그 백 하고도 한 마리의 양들을 바라보면서 이빨을 부딪쳐 ‘딱 딱’하는 소리를 내며 깨무는 시늉을 했다. 내 이빨소리에 놀란 양들이 마침내 늑대보다 가까운   위협을 알아차렸다. 나는 우리를 우리의 가장 단단하고 촘촘한 곳으로 몰아붙였다. 그러는 동안 늙고 겁만은 그 비겁한 양들 때문에 어린양 몇 마리가 우리의 가장자리로 밀려 나와 있었지만, 단단한 체구의 수컷들이 어깨와 어깨 사이에 어린양들을 넣어 보호하며 대열의 벽을 견고하게 단속했다.


 돌밭을 지난 늑대들이 이제는 빵조각만 한 크기로 보였다. 어린 늑대들은 춤을 추듯 덩실대며 네발로 내려왔다. 늙은 늑대들처럼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아닌, 위아래로 통통 튀는 걸음이었다. 어린 늑대들은 내려오다가 말고 온갖 것들의 냄새를 맡으려고 바닥에 코를 박고 주춤거리다가 갑자기 움직이기를 반복했다. 덕분에 우리 안은 단단한 대열을 갖출 수 있었다.      

우리밖에 다다른 어린 늑대들이 좌우로 빙빙 돌며 우리를 넘어 우리 안으로 들어 올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나는 홀로 무리의 맨 앞에서 늑대들을 마주 보고 서있었다. 푸르고 차갑게 밝아오는 초원의 새벽하늘 아래서 잿빛 털의 늑대들은 아직 어둡고 희미하게 보였는데, 대가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안광이 마치 폭풍우에 날리는 빗줄기처럼 가로로 길게 흘렀다. 금방 해가 뜨려는 것인지 푸른색으로 밝아오던 초원의 하늘이 갑자기 더 어둡고 차가워졌다. 그 순간 눈앞에 늑대들이 포개졌다가 흩어졌는데, 붉은 눈알 여섯 개 만이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라진 붉은 눈알 두 개, 그 한 마리의 늑대가 내 왼쪽 뒷다리 사각지대에서 우리를 훌쩍 뛰어넘어 우리 안으로 들어왔다. 백 하고도 한 마리의 양들은 그 모습에 눈알이 빠질 듯 기겁해서는 날뛰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이빨을 ‘딱 딱’ 거렸다. 그 소리에 양 떼는 일렁이다가 조금 주춤거렸다. 동시에 우리를 넘어온 어린 늑대 놈이 나를 쏘아봤다. 어린 늑대는 다 자란 늑대보다 대가리 하나가 모자란 크기였는데, 작다고 늑대가 아닌 것은 아니었다. 그놈의 코와 턱 사이에는 허연 가시 같은 이빨이 죽은 나뭇가지처럼 하늘을 향해 세워져 있었고, 피와 살을 갉아먹었을 그 입 속에서는 늑대의 내장이 고동치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래도 역시 다 자란 늑대보다 초라하리만큼 작았다. 기껏해야 털을 모두 밀어버린 늙은 양 만했기에, 나는 싸워볼 만하다는 무모한 생각을 했다. 백 하고도 한 마리의 양을 벌벌 떨게 하는 것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결전을 준비했다. 내가 등 뒤에 뭉쳐서 떨고 있는 무리를 향해 다섯 발자국 정도 뒷걸음쳤더니, 어린 늑대는 내가 겁을 먹었다고 생각했는지 의기양양한 발걸음으로 제 무리에게 다가갔다가 다시 내 편으로 다가와서 몸을 낮추고 이빨을 내보였다. 더럽고 흉측한 이빨을 내보이는 늑대가 조금 전 보다 가까워졌기에 나는 충분한 도움닫기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다시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때 우리 안에 어린 늑대가 나머지 여섯 개의 붉은 눈알들을 우리 안으로 불러들이려는 듯 내게서 시선을 뗐다. 어린 늑대와 나와의 거리는 여덟 발자국 정도, 그 정도면 충분했다. 나는 고개를 돌린 어린 늑대의 옆구리를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옆구리 위에 뚫려 있는 아가리, 그 안에 있는 가시 같은 이빨에 대해서는 잊는 편이 좋았으므로,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내 앞발굽이 아홉 번째로 땅과 맞닿았을 때, 내 단단한 머리통이 어린 늑대의 옆구리에 도달해서 놈의 내장을 진동시켰다. 늙은 양들을 들이받았을 때 보다 가벼운 충격이 내 머리와 목에 전달됐다. 어린 늑대는 내장이 욱신거렸는지 몇 발자국 뒤로 밀려나가 양들의 똥과 오줌 위를 나뒹굴었다. 어린 늑대는 양 따위의 공격에 당황했는지 한동안 바닥에 납작 엎드려있었다. 나는 곧바로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내가 다시 다섯 발자국 정도 빠르게 뒷걸음을 치자, 어린 늑대는 내 멀어지는 뒷모습에 놀란 듯 몸을 번쩍 일으켰다. 그러고는 두 번째 기습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가늘고 높은 소리로 목청을 긁으며 이빨을 내보였다.


 두 번째 공격은 없었다. 나 역시 그저 한 마리 양일 뿐이었다.

그 어린 늑대가 컹컹하고 짖어대기 시작하자 내 안에 투쟁심은 건기에 말라붙은 호수처럼 모두 증발해 버렸다. 발굽에서 나무뿌리라도 돋아난 듯 내 발은 초원에 단단히 박혔고 털 속에 살과 내장이 떨려왔다. 나는 늑대와 겨우 여덟 발자국 거리에서 사지가 마비된 듯 얼어버렸다. 밤이 되기 전까지 씹어 넘기던 초원의 어린싹들을 되새기며 어떻게든 힘을 내보려고 안간힘을 써봤지만, 한 번 굳은 다리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저 어린 늑대는 내 목을 물어뜯어 붉고 뜨거운 내 피를 초원에 뿌리게 될 것이다. 그건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옆구리를 들이 받혀 구부정하게 서있던 어린 늑대의 눈에서 다시  안광이 붉고 가늘게 흘렀고, 가시 돋친 아가리가 여명 속에서 더 푸르게 드러났다. 나는 그저 네 발을 땅에 박고 서있을 뿐이었다. 어린 늑대는 금방이라도 내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처럼 발을 찼다. 우리 밖에 서 있던 나머지 세 마리의 늑대들은 우리 안에서의 싸움에 개입하지 않고 담담히 나와 그 어린 늑대의 결투를 구경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두 번 다시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없다는 절망이 나를 덮쳤다. 나는 서서 목덜미로 그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저 한 마리 양에 불과했다.  내가 죽고 나면 백 하고도 한 마리밖에 남지 않을 양들도 그저 ‘메에’하는 옅은   탄식만을 내뱉을 뿐, 백 하고도 한 마리 모두 미동도 없이 한겨울 눈뭉치처럼 뭉쳐있었다. 나는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그보다 더 천천히 내쉬었다.


 마침내 어린 늑대가 앙상한 네발을 굴러 초원을 박차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강자에게 굴복하는 것은 어쩌면 부끄러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약한 것이 강한 것에게 먹히는 것은 초원의 유일한 법이었다. 나는 그저 고통의 시간이 짧기만을 바라며 눈을 감고 고개를 떨궜다. 찰나의  순간이 마치 내가 지나온 모든 순간을 합친 듯 길게 느껴졌다. 털과 가죽 안에서 염통이 날뛰기 시작했고, 목덜미에서 피가 솟구치는 소리가 들렸다. 벌레가 기어가는 듯 목덜미 가죽이 들썩거렸다. 죽음의 벌레. 그 죽음의 벌레는 목에서 머리를  향해 계속해서 기어올랐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스무 마리 죽음의 벌레. 스무 마리 죽음의 벌레가 목덜미를 기어간 후 날뛰던 염통이 잠잠해졌다. 염통이 날뛰는 소리 때문에 귀가 울려서 듣지 못했던 초원의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늑대의 발소리는 내 세발자국 앞에서 멈춰있었다. 놈은 내가 머리를 떨구자 다시 박치기를 하는 줄로만 알았는지, 겁을 집어먹고 갑자기 덮치기를 멈춘 모양이다.  어린 늑대의 꼬리가 다리 사이로 말려들었다. 내가 고개를 들어 그 어린 늑대를 보다가 다시 머리를 숙이니, 녀석은 주춤거리며 뒷걸음을 쳤다.       


 이것은 엄연한 승리였다. 승리라는 말을 떠올리자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앞발의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대지에 박혀있던 발굽이 다시 들썩거렸다.  나는 몇 발자국 앞으로 내달리다가 머리를 숙여서 다시 들이받는 시늉을 했다. 역시나 어린 늑대는 겁을 먹었는지 다시 뒷걸음을 쳤다. 내친김에 나는 이빨을 부딪쳐서 ‘딱 딱’하는 소리도 냈다. 그랬더니 어린 늑대의 뱃속에서 죽음이 울리는 것처럼 우르르하고 먼 천둥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나는 이빨을 부딪치는 것이 오히려 좋지 않음을 알고 턱을 닫았다. 대신 몇 발자국 다시 뒷걸음을 쳐서 효과적인 위협을 가했다. 앞발을 굴러 땅에 발굽을 내리꽂아 소리를 내고 먼지를 일으켰다.     콧김을 씩씩대자 눈앞이 일렁였다. 콧김은 낮게 깔려 녀석에게 까지 흘렀다. 내 콧김과 어린 늑대 녀석의 콧김이 섞여 마치 안개가 낀 듯이 전장이 흐려졌다.


 콧김이 초원의 공기 속으로 사라졌을 때, 더 이상 우리 안에 공포의 그림자는  없었다. 녀석은 우리를 넘어 제 무리 틈에 껴서 절룩거리며 멀어졌다.

멀리서 우리의 주인이 연기 나는 탈것을 몰고 돌아오고 있었다.


 해가지는 언덕 너머에 사는 늑대들은 그 후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우리는 한동안 백 하고도 두 마리였다.





3. 초원


 멀리 언덕과 평원 사이에서 거대한 뿔이 달려있는 염소 떼가, 해가 뜨는 곳과   해가 지는 곳 사이에서 아래를 향해 이동했다. 우리 무리의 세배쯤 되는 엄청난  규모의 야생염소 무리였다. 그들은 막 풀들이 돋아나던 봄에 해가 뜨는 곳과 해가 지는 곳 사이에서 위를 향해 이동했었는데, 계절이 두 번 바뀌자 이번에는 아래를 향해   여행하고 있었다. 나는 멀리서 평원을 누비는 그 무리를 바라보며 속절없는 부러움을 느꼈다. 금 새 그 무리들은 우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그들이 멈추고  달리고 풀을 뜯으며 멀어져 가는 것을, 나는 땅의 진동으로 한 참 동안 더 느낄 수 있었다. 같은 두 발굽의 진동이었다.

 내가 그들의 자유에 관해 생각하는 동안, 눈치 없는 암컷 몇 마리가 내 옆에서   얼쩡거렸다. 짝짓기를 할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가볍게 머리를 박아 암컷들을 쫓아냈다. 우리의 주인은 우리 무리의 우두머리가 바뀐 것을 어떻게 눈치챘는지, 우리 밖에서 풀을 뜯을 때면 내 앞발과 뒷발에 줄은 연결해서 멀리 갈 수 없게 만들었다. 낮 동안 우리에서 풀려나 초원의 풀을 뜯는 동안 나는 꽁꽁 묶인 내 발과    뿔 달린 염소들의 자유로운 발 사이에서 신음했다.


 해가 먼 언덕 사이로 사라지면 내 두꺼운 털가죽 사이로 어둠이 깊게 스며들었다.  그 해가지는 언덕에서 내려왔던 어리숙한 늑대들은 어디로 갔을까? 내 박치기 한방에 나가떨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해가 뜨는 언덕 너머의 덩치 큰  늑대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고 멀리 떠났을 것이다. 그 흉측한 늑대들은 같은 족속들이라 할지라도 가족이 아닌 한 자비 없이 서로를 물고 죽이고 죽임을 당했 으므로. 그러나 나이 든 양이 고기와 가죽 때문에 도축장에 끌려가듯, 언젠가 해가 뜨는 언덕 너머의 늑대들도 쇠약해지면, 그만들만큼 덩치가 커진, 그래서 더 배가 고프고 난폭한 해가 지는 언덕 너머의 늑대들과 맞붙게 될 것이다. 그것들 사이에 자리한 우리는 어느 쪽이 강한지에 상관없이, 어느 쪽에서건 죽임을 당할 뿐이다.

밤은 근심은 계속해서 불려 갔다. 양이라는 생명은 낮에는  신선한 풀을 먹고, 야식으로는 걱정을 먹어야만 하는 듯하다. 나는 늙은 양 세 마리를 불러 우리 주변에서 밤 동안 보초를 서게 했다. 내가 전투를 치르던 그 밤, 비겁하게 어린양들을 짓밟고 비열하게 목숨을 부지하려 했던 그 늙은 양들에게 나는 책임을 부여했던 것이다.  늙은 양들은 눈과 귀는 어두웠지만, 가장 먼저 두려움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밤잠도 적었기에 보초에 적합했다. 나보다 백일도 먼저 태어난 덩치 큰 수컷들은 그날 밤 이후로 내게 대적하지 못하고 암컷까지 내줬다. 이제는 자신들이 내 아비라도 된 양 밤낮으로 내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어린양들 사이에서는 나를 따라 하는 놀이가 인지, 아직 두 달도 안 된 새끼들 까지 박치기 연습을 하느라 야단이었다. 큰 뿔이 달린 염소 떼가 이동을 했으니 해가 뜨는 언덕 너머 큰 늑대들은 염소 맛을 보려고 염소 떼를 따라나섰으니, 당분간 우리를 찾는지 않을 것이다.


 엿새가 넘도록 평화는 이어졌다.

그동안 우리는 해가 뜨는 언덕 가까운 곳까지 이동해서 비탈진 풀밭에 새 우리로 옮겨졌다. 비탈 주변에는 초원에서는 보기 힘든 나무 몇 그루가 있었는데, 잎은 다 떨어졌지만 작은 열매들이 남아있었다. 나는 우두머리가 되지 못했다면 죽을 때까지 맛보지 못했을 그 달콤한 열매를 씹으며 꼬리를 부르르 떨었다.

우리의 주인은 언덕 주변에 덫을 쳐놨다. 늑대의 발을 절단할 만큼 커다란 쇳조각이 몇 개나 우리 주변에 아가리를 벌린 채 숨겨져 있었다. 푸른 잎들은 사라지고 마른 잎들만 남아 되새김질을 오랫동안 해야 했기에 먹는 일은 고됐지만, 염소를 따라갔을 늑대들과 사방에 놓여있는 덫 덕분에 마음은 편안했다.


 우리의 숫자는 아직 백 하고도 둘이다. 나는 늘 그래왔듯이 초원에서 우리로 돌아오자마자 꺾여가는 태양빛 속에서 우리의 숫자를 헤아렸다.

초원에 낙오된 양이 있어서는 안 된다.

수를 헤아리는 노고를 아는지 모르는지 암컷들이 나와 밤을 보내기 위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몰려들어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미간에서 윤기가 돌고 발굽이 가지런한 암컷 한 마리와 우리 중앙에서 배를 깔고 휴식을 취했다. 초원의 밤은 이제 겨울에 더 가까워졌으나, 주위의 암컷들 덕분에 나는 추운 줄 모르고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날이 추워지자 우리의 주인은 제 우리에서 잘 나오지 않았다. 우리의 똥이 없었다면 알아 죽었을 저 무력한 생명은 불 앞에 앉아서 연기가 나는 물을 마시거나 술을 마실 뿐, 제 몸을 아끼려 등판을 바닥에 대고 누워있는 것이 하는 일의 전부였다.

그 무력한 생명이 오늘도 우리에게 다가와서 소금덩어리를 던지고 똥 덩어리 몇 개를 주워가서는, 해가 다 지도록 제 우리 안에서 연기만 피워대고 있다. 연기는 피어올라 초원의 밤하늘에 뚫려있는 무수히도 많은 구멍들 사이로 발려든다. 맑은 날에는 양의 모양이 되기도, 늑대의 모양이 되기도 했지만, 그건 그저 양의 똥이 타면서 생긴 것이다. 그 정도는 나 같은 양들도 알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저 똥이 타는 연기가 먼 곳의 늑대들을 불러들일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건 너무 양 다운 걱정이랄까? 나는 걱정을 잠시 내려놓으려고 곁에 누운 암컷 품속을 파고들었다. 암컷의 품은 온기가 가득했다. 그 온기에 걱정은 멀어지고 잠이 눈처럼 쏟아졌다.         



 내가 어린 암컷의 품에서 막 잠에 빠지려던 순간, 우리의 주인이 누워있는 그 끔찍한 양가죽 우리 안에서 소름 끼치는 소음이 흘러나와 내 귀를 후벼 팠다.

내 어머니의 염통을 찌르고 가죽을 벗겨내고 살과 뼈를 분리했던 작은 날붙이가 돌에 갈리는 그 소리. 늑대가 우는 소리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선명한 죽음의 소리, 그 소리였다. 철 모르는 어린양들은 그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잠에 빠져 있었지만, 보초를 서던 늙은 양은 그 소리에 놀라 다리를 벌벌 떨면서 오줌을 지리고 있었다. 내가 지금의 절반도 안 되는 아주 어린양이었을 때, 지금보다 조금은 눈이 맑았던 저 오줌을 지리는 늙은 양은, 그것이 우리와 우리의 주인 사이에 거래라고 말했다. 우리를 지키고 먹이가 있는 곳으로 여행을 하는 조건으로 우리 중 누군가는 털과 살과 가죽을 내놔야 하는 거래라고. 늙은 양들은 보통 그 거래에서 가장 먼저 칼을 맞았다. 그다음은 적당히 살이 오른 암컷, 혹은 이제 막 젖을 뗀 어린양.

날이 밝아오면 분명 우리 중 누군가가 어린양의 귀보다도 작은 저 칼에 도륙당할 터였다. 나는 그 소리와 겁먹은 늙은 양이 싸지른 오줌에서 피어난 죽음의 냄새 때문에 잠들지 못했다.  


 밤을 물고 늘어져 더디게 아침을 맞이할 수만 있다면 눈알 한 개 쯤은, 이빨 몇 개쯤은 기꺼이 바칠 수 있을 텐데, 그런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서 우리 안에 양을 헤아렸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양 백 하고도 두 마리, 내일이면 몇이 될는지 나는 다가올 그 숫자가 너무도 고통스러워 ‘메에’하고 울었다. 우리의 주인은 곧 그 끔찍한 소리를 내는 짓을 멈추고 잠이 들었지만, 나는 잠들 수 없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밤은 길었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빠르게 흘러갔다.


 하늘의 구멍이 조금씩 푸르게 채워졌다. 그렇게 간절하게 바람 했지만 밤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곧 벌어질 칼부림에 누구의 가죽이 벗겨지고 내장이 쏟아질지 모를 일이었다. 나이 든 양? 내 옆에 누워있는 암컷? 아직 젖내가 가시지 않은 어린것들? 어쩌면 나일지도 모른다. 그래...... 어쩌면 내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천천히 우리 안에 양들을 눈에 새기고 초원의 새벽풍경을 눈 안에 깊이 새겨 넣었다. 내 모든 것이었던 저 초원에 풀들, 그리고 자유로운 큰 뿔 염소들이 뻗어나갔을 저 초원 너머 어딘가...... 마음이 것 잡을 수 없이 무거워졌다.


 나는 늑대를 물리쳤던 그 들판을 내려다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은 그 누구도 우리 주인의 칼에 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우리의 주인이 우리 곁에 다가올 때, 내 단단한 머리통을 그 무력한 생명에게 꽂아 넣을 계획을 세웠다. 설령 그 대가로 내가 칼을 받게 될지라도 말이다. 기운을 북돋으려고 나는 서리 내린 땅바닥에 여태껏 살아있는 푸른 잎 조금을 씹어 먹었다. 풀냄새와 차가운   혓바닥의 감각에 정신이 맑아졌다. 나는 이빨을 ‘딱 딱’ 거려서 덩치 큰 수컷 몇을 깨워 내 계획을 알렸다, 혈기 왕성한 두 마리 수컷이 나를 도와 우리의 주인을 들이받겠다고 나섰다. 나는 그 마음만으로도 기운이 났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 수컷들도 그저 평범한 양일 뿐이라는 것을. 아마도 우리의 주인이 칼을 번뜩이며 걸어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면, 그 수컷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그저 양의 본성대로 도망치기에 바쁠 것이다. 그래도 나를 돕겠다는 그 말뿐인 맹세가 지금의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었다. 나는 양동이에든 물을 조금 마시고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풀을 찾아 먹으며 기운을 북돋았다.


 우리 경계에 돋아나 있는 풀을 찾아먹고 있을 때, 해가 뜨는 언덕을 지키던 늙은 양 한 마리가 갑자기 오줌을 지리더니 털썩 쓰러졌다. 나는 급히 시선을 돌려 해가 뜨는 언덕을 응시했다. 옅은 여명이 차오르는 하늘과 검은 언덕 외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

 “왜 그러는 거요?”

나는 자기가 싼 오줌 위에 주저앉은 늙은 양에게 물었다.

늙은 양은 내 질문에도 한참을 그 허연 눈알만을 굴려댈 뿐 말이 없었다.

나는 답답해서 가볍게 그 늙은 몸뚱이를 들이받았다.

 “늑대가 온다......”

그제야 늙은 양이 대가리를 벌벌 떨면서 꿈을 꾸는 듯 말했다.


 큰 뿔이 달린 염소를 따라나섰던 늑대 무리가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멀리서 염소로 배를 불렸을 그 흉악한 무리가 되돌아오는 길에 다시 홀쭉해진 뱃가죽을 채우려고 우리에게 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를 ‘딱 딱’ 대고 ‘메에’ 울며 우리 안에 양들을 모두 깨우고 방어대형을 갖출 것을 지시했다.


 그렇게도 빠르게 흐르던 밤이 다시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빠르게 지난다면 우리 주인의 칼이 번뜩일 것이고, 느리게 간다면 늑대들의 식사시간이 늘어날 것이다. 나는 암담한 셈을 마치고 그저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만을 고대하며, 방어대형 앞에서 해가 뜨는 언덕을 바라봤다.





4. 늑대가 된 양


 새벽이 오는 줄 알았는데 언덕 위 하늘이 다시 어두워졌다. 마지막 어둠의 발악인 듯하다. 그 어둠과 어둠의 경계에서 꿈틀거리는 어깨들이 보였다. 먼 거리였지만 놈들의 살기는 바로 코앞에 있는 듯 강렬하게 초원을 건너왔다. 늑대들은 그동안 염소를 몇 마리 못 잡아먹었는지 위로만 껑충했다. 사냥 경험이 많은 다 자란 늑대들은 지난번 어린 늑대들과는 달리 기웃거리며 해찰하지 않고 곧장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발소리조차 숨기지 않았다. 놈들은 우리가 도망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먼 초원에서 천둥이 우는 듯이 놈들은 낮게 으르렁댔다. 백 발자국 밖에서 들려온 그 소리에 어린양들이 내장을 떨다가 털썩 주저앉아 똥오줌을 지렸다. 팔십 발자국, 오십 발자국...... 우리의 주인이 쳐둔 덫 따위는 가볍게 피해 가며 성큼성큼 늑대가 다가왔다. 우리와 가까워진 해가 뜨는 언덕 너머에서 온 늑대들은 말랐지만 높고 단단한 모습에 더해 고약한 살기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 흉측한 모습이 두 배는 더 크게 보였다. 나는 다리가 굳는 것을 막으려고 가볍게 움직이며 되새김질을 했다.


 열 발자국. 우리에 당도한 놈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놈들은 약한 곳을 찾으려는 듯 우리의 곳곳을 물어뜯고 맛보더니, 대문 옆 말뚝에 모여서 앞발을 들었다. 다 자란 늑대 두 마리가 말뚝을 흔들어대니 말뚝이 힘없이 우리 방향으로 기울어서, 두 마리의 늑대가 힘들이지 않고 우리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 밖에는 네 마리의 늑대가 버티고 있었다. 이제 우리 중 누군가가 죽어야 할 곳은 우리 안 이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태어나서 먹고 싸고 잠을 자던 우리 안에서 죽을 운명인 것이다. 나는 그 운명에 박치기를 하고 싶었다. 양으로 태어난 내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 끝이 늑대의 아가리 속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기억을 더듬어 내 첫 승리의 과정을 되새겼다. 놈들의 급소는 앞다리와 뒷다리 사이, 염통과 내장이 들어있는 가죽과 뼈가 얇은 그곳이다. 나는 비겁함과 나약함을 콧김에 실어 날려 보내고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단 한 번의 공격에 온 힘을 모아야 했다.

그다음을 나는 알 수 없다.


 덩치 큰 수컷 양 한 마리가 내 뒤에 서서 ‘메에’하고 울다가 별안간 앞으로 튀어나왔다. 나를, 우리를 도우려는 것이었다. 동료가 생겼다는 사실에 나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저 함께 싸워줄 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은 멀어지고 승리는 가까워지는 듯했다. 나는 놈들을 향해 내달렸다. 내가 달려 나가자 나를 따라 나왔던 수컷양도 머리를 내리고 함께 늑대의 품으로 달려갔다. 내가 해가 뜨는 쪽, 다른 양이 해가 지는 쪽에 서있는 늑대의 옆구리를 향해 달렸다. 나는 절반쯤 달려 나가다가 해가 지는 방향으로 머리를 틀었다. 하나 보다는 둘이 낫다. 내 계산은 그랬다.

그 계산은 적중했다. 해가 지는 방향에 서있던 늑대는 먼저 달려온 수컷을 피해서 몸을 돌리다가 내 머리에 허벅다리가 들이 받혔다. 놈은 내 일격에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해가 뜨는 방향에 서있던 늑대가 그 모습을 멍 하게 지켜보더니 총총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옆과 뒤를 내주지 않으려고 곧바로 몸을 돌려 늑대를 마주 봤다. 내 등 뒤에는 우리의 말뚝이, 그 늑대의 뒤에는 우리 무리가 있었다. 함께 돌진했던 수컷양이 내 곁으로 돌아와 다음 공격을 준비하려는 순간, 수비대형으로 단단히 뭉쳐있던 백 마리 양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와 덩치 큰 수컷 한 마리가 우리 안에 늑대 두 마리와 사투를 벌이는 틈에, 우리 밖을 지키던 늑대 네 마리가 우리 안으로 들이닥쳤던 것이다.


 어린양들이 다 자란 양의 발굽에 짓밟혀 바닥을 나뒹굴고, 늑대에게 물어뜯긴 양의 살점이 땅바닥과 공중에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나는 눈앞에 늑대와 등 뒤에서 나뒹구는 늑대 때문에 죽어가는 양들의 곁으로 다가갈 수 없었다. 나는 분노와 억울함에 ‘메에’ 울다가 이빨을 ‘딱 딱’ 거리고 콧김을 쉬익 내뱉었다. 그 순간 신나게 양들을 도륙하던 네 마리 늑대와 내 앞과 뒤의 두 마리 늑대가 모두 으르렁 거리더니, 피가 고인 잇몸을 드러냈다. 이빨에 이빨로 대응하는 것이 늑대들의 본성인 것인지, 여섯 마리의 다 자란 늑대들이 피 묻은 주둥이를 이죽거리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내 타고난 본성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늑대들이 들어왔던 곳으로 내달렸다. 내가 우리를 넘어 초원을 향해 달려 나가자, 여섯 마리 늑대 중 절반은 나를 추격하기 시작했고, 나머지 절반은 몇 발자국 따라붙다가 다시 우리 안에 양들을 물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해가지는 방향으로 달려가다가 우리의 주인이 쌓아둔 잡동사니를 들이받았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양들을 잃을 수 없었다. 내가 들이받은 잡동사니에 섞여있던 어미양의 젖을 담던 통이 나뒹굴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놀란 우리의 주인이 마침내 작은 태양이 달린 몽둥이와 쇠막대기를 들고 제 우리 밖으로 나왔다. 나는 내 꽁무니를 쫓는 늑대 세 마리를 털어내야 했기에 초원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적어도 우리 안에 양들은 이제 안전하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나는 그 생각에 기뻐하고 안도했다. 도망치느라 볼 수 없었지만, 우리 안에 늑대 세 마리는 컹 컹 거리다가 앓는 소리를 내며 해가 뜨는 언덕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내 뒤를 쫓던 늑대들은 그 소리를 듣고 주춤거리다가 나를 추격하는 짓을 포기하고, 제 무리에 섞여 들려고 방향을 틀어 해가 뜨는 언덕을 향해 줄지어 걸어갔다.


 나는 늑대들이 돌아간 후에도 백 발자국이나 더 도망치다가 숨을 헐떡이며 멀어지는 놈들의 꽁무니를 바라봤다. 언덕 위에 늑대들 아가리에는 새끼 양 한 마리가 물려 있었다. 그 어린것이 불쌍했지만 내 염통 속에는 연민보다 기쁨이 더 컸다. 내가 살아남았다는 기쁨, 많은 양들을 지켰다는 긍지가 염통 가득히 차올랐다.

 언덕 위에 늑대 세 마리는 어린양을 입에 물고 언덕을 넘어 사라졌다.

 나를 추격하던 늑대 세 마리도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천천히 우리로 돌아갔다. 늑대들은 물러갔지만 날이 밝으면 우리의 주인이 우리에게 칼을 들이댈 것이므로, 다시 들이받고 싸워야만 했다.

새벽하늘이 푸르게 움트고 서리는 안개로 바뀌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하늘에 뚫려있던 무수한 구멍들이 모두 사라졌다. 이제 태양이 떠오를 차례였다. 

 날은 맑았는데 난데없는 천둥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천둥소리 몇 번에 언덕을 오르던 늑대 세 마리가 모두 쓰러졌다.


“아! 이게 천벌인 것이다! 내 족속들을 도륙하던 저 짐승만도 못한 것들에게 하늘이 내리는 심판!”

나는 ‘메에’하고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그 소리에 우리의 주인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천둥소리가 울렸다.




 내가 천둥에 쓰러져 숨을 헐떡이자 초원 위에 쏟아진 내 피가 꽃처럼 번져갔다.


 어머니는 꽃을 좋아했었다. 꽃이 지면 반드시 달콤한 열매가 맺힌다고 말했었다.


 태양은 초원에 뿌려진 내 피 위로 덩그러니 떠올랐다.


 오늘은 어머니가 죽임을 당한 지 삼백 하고도 열 번째 날이다.




2022

장 창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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