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비시연필은 1887년 마사키연필제작소라는 이름으로 도쿄에서 시작했다. 제로센과 자동차를 만드는 기업과는 관계가 없다. 미쓰비시중공업에서 같은 상호와 로고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같은 로고와 회사명을 쓰는 것이 양측 모두에게 간섭과 손해가 없기 때문에 따로 바꾸지 않고 지금까지 왔다고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독일산 파버카스텔 9000 연필은 최초의 육각연필이자 최고의 연필이다. 이 제품은 1905년에출시됐다. 스테들러사의 마스 루모그래프 연필도 가끔 사용한다. 일산 연필은 나무와 칠이 좋고 심이 진하다. 독일산은 일산에 비해 연한 편이지만 흑연의 품질이 좋고 오래 사용해도 잘 닳지 않는다. 내 주력 연필은 파버카스텔 9000이었으나 최근에는 일산 연필을 더 자주 사용하고 있다. 부드러운데 진해서 적은 힘으로 써도 부드럽게 잘 써지기 때문에 피로도가 적다. 수험용 볼펜을 쓰는 것 보다도 부드럽다. 게다가 파버카스텔 9000보다 저렴하다. 국산연필을 애용하자는 해묵은 애국심 같은 것이 내게도 조금은 남아있는데, 국산이라고 해봐야 이제 동아연필 밖에 남지 않았다. 문화연필이나 모닝글로리는 중국 등에서 oem으로 제작하고 있다. 동아연필은 대한민국 최초의 필기구 제조회사로 내 고향 향토기업이다. 대전은 일제강점기 교통의 요지로 식민지물류의 중심이었다. 동아연필은 적산기업 미쓰비시연필 대전공장을 불하받아 시작했다. 하지만 장비와 인력만 있지 기술은 없었기 때문에 미쓰비시와 기술제휴를 맺었다. 이혼은 해도 재혼은 못하는 것이 응원하는 야구팀이라고 어디서 들었는데, 고향을 등지고 사는 지금도 이글스를 응원하고 가끔 동아연필을 사용한다. 큰 틀은 미쓰비시 연필과 비슷하다. 제법 쓸만한데 저렴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고급연필이 없다. 질 좋은 흑연광산이 있는 영국과 탄탄한 내수시장과 목재가 있는 미국, 고품질 연필을 제작하는 스위스 등 여타 국가에서도 연필을 생산하지만, 현재 연필을 가장 많이 생산하고 그 품질을 유지하는 곳은 독일과 일본이다. (볼펜과 만년필도) 미대 따위를 가는 바람에 일찍이 일제 톰보 연필을 족히 수십 타스 갈아먹었다. 더존이니 신한화구니 하는 것들이 있었지만 톰보 모노 라인의 가장 저가인 모노 J의 발 뒤꿈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품질이었고, 일제가 싫으면 스테들러나 파버카스텔 같은 독일산 연필뿐이었다.
독일과 일본, 일찍이 19세기부터 질 좋은 필기구를 만들던 두 나라는 모두 인근국가를 초토화시키고 나아가 세계를 전쟁의 수렁 속에 빠뜨리는 짓을 저질렀다. 기술의 방향이 대략 그랬다. 노예를 더 많이 잡아오려고 배가 빨라지고 커졌으며, 더 많은 약탈을 위해 식민지국가에 철로를 깔았다. 물론 저 연필로 헤르만헤세와 괴테가 글을 써 내려가고, 요시노 겐자부로와 미야자와 겐지가 종이를 채웠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필은 수탈한 곡물을 장부에 적고, 식민사관을 가르치고, 나라를 잃은 아이들에게 히라가나를 적게 하고, 침략과 살육을 계획하고 기록하는 일에 쓰였을 터.
"왜 일산 연필을 쌓아두고 쓰냐 이 토착왜구야!" 라고 나를 비난한다면 두 가지 대답을 내놓을 수 있겠다.
첫째 21세기에도 쓸만한 연필이 없는 나라에서 뭘 쓰라는 말이냐.
둘째 미쓰비시연필에 각인된 1887년, 톰보연필에 각인된 1913년, 100년도 더 전에 시작되어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쌓인 기술과 그와는 반대로 깎여나간 인문주의에 대해 생각하면 글감이 솟아난다고나 할까.
동아연필이 유니연필 정도로만 만든다면 일산이나 독일산 연필을 쓸 이유가 없다. 그런데 다들 연필로 글은 쓰고 있는가? 아니, 손으로 글을 쓰기는 하는가? 아이들을 보면서 느낀다. 동네 문방구 필기구 매대를 보며 느낀다. 연필소비량과 자국산 연필의 질이야 말로 그 나라의 기초과학, 기초학문의 척도라고. 너무 잘 만들게 되면 전쟁을 벌일지도 모르겠지만. (미국과 러시아도 연필을 많이 만든다. 품질은 그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