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좀 써볼까?"는 저에게 "뭐로 쓸까?"의 동의어와 같습니다. 최근 본업이 바빠져서(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네요.) 아차차차 차 이야기 연재도 멈추고 구상 중이던 소설도 잠시 멈춰 섰지만, 영 쓰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쓰기에 적합한 도구를 찾는 일도 멈추지는 않았죠. 뭐 본업이 바빠 현찰이 들어오니 그쪽은 오히려 활성화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만년필을 계속 사용하다가 보니 뭔가 단점 아닌 단점이 발견되어 다시 연필로 되돌아가고 있는 과정에 있습니다. 일단 쓰기를 멈추면 만년필은 홀로 집에 있는 미니푸들처럼 애처롭게 울어댑니다. "나 좀 끄적여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흘에 한 번 꼴로 만년필 뚜껑을 열어서 몇 자 끄적이며 만년필을 달래고 뭉친 어혈을 풀듯이 잉크를 빼줍니다. 그럴 때면 조금 귀찮은 기분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른스럽지 못해."
언제 깎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서슬 퍼런 흑연을 뽐내는 연필이 담담하고 뾰족하게 말합니다.
불현듯 연필이 어른스럽다. 뭐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시베리아 숲 속 오두막에서 홀로 지내는 고독하고 굳센 '어른 자연인'의 이미지랄까요? 끝없이 곤두박질치는 기온 속에서도 연필이라면 슥슥 잘 나오겠지요. 만년필은 품을 떠나는 순간 얼어붙겠지만요.
필통을(거대한) 보니 그 간 모은 연필들이 꽤 되는데 딱 손에 맞는 연필을 찾는 게 어려워서, 어른스러운 기분으로 인터넷 쇼핑을 하다 보니 역시나 어른스럽게 연필이 가득 차 버렸습니다. 요즘 HB는 국민학교라는 기관이 있던 시대에 쓰던 HB 보다는 진하고 부드럽더군요. 그래도 스스슥 글을 써 내려가고 만년필 정도로 매끄럽고 맵시 있는 획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조금 더 부드럽고 진한 연필이 좋겠더군요. B에서 2B 3B까지 가보니 필기가 편해집니다. 연필경도는 제조사마다 차이가 있어서 완벽한 연필을 찾아내기 위해서 조금 더 혹독하게 연구합니다. 국산과 외산, 현행과 빈티지 모델의 필감을 오감으로 느끼고 데이터를 기록하다가 그만 현타가 왔습니다.
"이거 언제 다 쓰고 죽지?"
파버카스텔 9000 HB 연필 한 자루로 56km의 선을 그을 수 있다고 합니다. 40000 단어 이상, 중편소설 한 권을 쓸 수 있습니다. 어떤 과학자는 아주 가늘고 옅게 쓴다면 태양계 끝까지 연필 한 자루로 선을 그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과학적 우주적 계산은 차치하고 단순한 계산으로만 봐도 지금 갖고 있는 연필을 다 쓰려면 장편소설 서른 권 정도를 써야 합니다. 아가사크리스티나 김용 정도가 아니라면 이번 생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또 연필을 주문해 버렸네요. 이번에는 팥죽색 HB 두 타스와 황금 잠자리 3B 두 타스입니다.
역시 변명이지만 HB를 쓴다는 것은 저에게는 지난 세기와의 화해와도 같습니다. 책받침이 없이는 종이를 찢기 일쑤고 손이 곱을 정도로 꾹꾹 눌러써야 그나마 봐줄 만했던 그 시절 HB에게 품었던 증오를 질 좋은 HB를 씀으로써 중화시키는 것 이랍니다. 말이 안 되는데 제 기분은 완전히 그렇습니다. 사람이 다시 착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황금 잠자리가 그려진 3B는 아마도 저를 다시 어딘가로 옮겨줄 황금날개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4B 황금잠자리가 고향을 떠날 수 있게 해 줬다면, 3B 황금 잠자리는 제 사유의 지평을 넓혀줄 거라고 기대합니다. 이미 효험이 있다는 것이 밝혀진 만큼 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요즘에는 나오지 않는 맹렬하게 돌진하는 아래를 보는 잠자리가 그려진 연필이라서요.
그러면서 이 글은 스마트폰으로 쓰고 있네요...
바빠서 돈 많이 벌고, 연필을 다 쓸 때까지 살아있으면 좋겠습니다. 황금 잠자리를 타고 작은 산 큰 산을 넘어 세 개의 별이 빛나는 그곳으로 가는 꿈을 꿉니다. 뭐 꿈이니까요. 적어도 연필을 쓰는 동안은 뭐라도 꿈을 꿉니다. 그리고 쓰기 전의 나와 쓴 후의 나는 다른 위치에 서있게 됩니다. 적어도 연필에 새겨진 잠자리날개 정도는 달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