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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희 Jun 05. 2024

Ⅱ부-1. 수능 직전 고3 아이들과 시작하다 2)

2) 2009년, 두려움의 길

수능을 한 달 정도 앞둔 고3 아이들과 저널 쓰기를 한다고 할 때, 그 누구에게도 지지를 받지 못했다. 아이들을 내버려 두라고 했다. 성장통처럼 겪어내야 하는 거라고, 다 그렇게 지나가는 거라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다. 그런데 오래 전 받았던 메일 속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도와 달라고!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 왠지 패배의 불길한 예감이 저를 엄습해 온달까요. 승리보다는 패배에 익숙해져버린 탓인지,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왠지 수능에서는 쓰러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제게 실망하셔도, 바보 같다고 욕하셔도 좋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저조차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횡설수설......  왠지 불안합니다. 실패한 이후가 더욱 두렵습니다. 저 스스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남들에게 여전히 무시당할 그 이후를 생각하면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무섭습니다.(2003. 09. 30. 00:16)     


위 글은 2003년 수능을 한 달 반 남짓 앞둔 9월 30일, 재수 중이던 제자에게 받은 긴 메일 중 일부이다. 이 하소연을 통해 수능을 앞둔 수험생들이 얼마나 정서적으로 힘든지를 새삼 깨달았지만 오랫동안 나는 모른 척했다.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지 모르겠고, 잘 도와줄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앞 장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저널테라피를 만났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하고 싶었지만 무서웠다. 훗날 읽은 존 니프시의 글에서처럼 용기가 필요했다.       


우리가 해야 한다고 진정으로 느끼는

일을 하게 되면

미쳤거나 어리석다고 여겨질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

모든 사람이 하고 있는 것이나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 존 니프시, 신성한 목소리가 부른다   

  

수능을 앞둔 고3 아이들과 함께하는 저널테라피가 괜한 짓, 쓸데없는 짓, 무모한 짓이 되지 않게 하려고 궁리에 궁리를 더하며 2009년에 첫걸음을 내딛었다.       


10분짜리 8회기 저널 프로그램을 개발했지만 두려웠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 주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는 속담처럼 괜한 원망을 들을까봐 두려웠다. 아이들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거나 아이들의 힘든 마음을 오히려 휘저어 놓을까봐 더 두려웠다. 이 두려움의 길에 14명 아이들이 동행했다. 간이정신진단검사(SCL-90-R)로 정신건강 위험 수준이 높은 상위 32명을 대상으로 프로그램 희망 신청을 받았다. 14명이 저널테라피를 함께하겠다고 신청했다. 검사에서 이 아이들 대부분이 자살 충동을 느낀다고 답변하였다. 19세 청춘에 우울하고 불안하고 죽고 싶다는 아이들과 저널테라피를 시작하였다. 이 길의 발걸음은 떨리고 무거웠다. 


2009년 10월 12일부터 4주 동안 1주일에 2회씩(월요일, 금요일) 점심시간 중 20분 동안이었다. 1~2분 정도 호흡으로 마음을 정돈하게 하고 3~5분 정도에 저널 기법과 회기별 내용에 대해 짧게 설명하였다. 아이들은 나머지 10분 동안 저널을 쓰고 마무리한 뒤 5교시 수업을 위해 달려갔다. 나는 매회기 아이들의 저널에 상담 피드백을 손글씨로 써서 다음 회기에 돌려 주었다. 2009년 11월 6일까지 총 8회기를 마쳤다. 2~3분만에 쓴 짧은 소감문 안에서 아이들의 저널테라피 경험을 만날 수 있었다.        

 

겨우 10분 저널 쓰기를 8번 했을 뿐인데 아이들이 살아났다. 아이들은 안정감, 행복감, 어려움 극복, 긴장감 해소, 스트레스 감소, 마음이 시원함, 신체화증상 감소 등을 경험했다.  

    

◦아직도 수능에 대해 걱정은 되지만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 정도의 불안은 이겨낼 수 있다는 느낌이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냥 뭔가 좋아졌다. 

◦내게 웃음을 찾아준 정말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수능을 앞두고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내 인생에 행복한 경험으로 남게 될 이 저널 여행에 초대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하다.

◦수능을 앞두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데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수능으로 인해 몸이 피곤하고 머리도 많이 아픈데 저널을 쓰면서 많이 나아졌다.

◦저널 쓰기에 참여할 수 있어서 저는 참 운이 좋았습니다. 저널 덕분에 더 성숙해졌습니다. 저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아이들은 저널을 쓰면서 소중한 걸 깨달았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 자신의 자랑스러운 모습, 자신이 바라는 것과 바라지 않는 것, 스스로 속이고 있었던 것, 억지로 누르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저널을 쓰는 순간만큼은 긍정적인 생각들을 했다. 나도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누구인지 찾을 수 있었다.

◦저널을 쓰면서 ‘나’에 대해 깊고 많이 생각했다. 내가 바라는 것,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스스로 속이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억지로 누르고 있었던 것은 무엇인지를 비로소 알았다.    

  

아이들은 없었던 꿈이 생기고, 자신의 꿈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고,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를 갖게 되며,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을 연결해서 전망하게 되었다.      


◦그동안 꿈을 가지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꿈을 가지라는 것인지 듣기 싫은 잔소리 같았다. 저널을 통해 드디어 내 꿈이 조금씩 구체화되는 것 같다. 

◦앞으로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도 깨달았습니다. 좀 더 일찍 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자랑스러웠던 일들을 잊고 살아왔다. 그런데 저널을 통해 그때의 나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금의 나도 미래의 나도 과거의 그 자랑스러움 위에서 존재한다.     


아이들에게 학습 효과도 가져 왔다. 한 아이는 자신의 저널을 ‘몽상에서 깨어나 꿈으로 가는 사다리’라고 비유하였다. 그동안 꿈만 키웠는데 학습의 과정이 없을 때 그 꿈은 몽상이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이제는 몽상이 아니라 진정한 꿈을 위해 공부하겠다고 다짐할 수 있었다면서 고마워 했다. 수능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켜 주었고 공부의 목적이 무엇인지 인식하게 하였다.      


◦수능 직전에 정말 필요한 프로그램이었다. 수능에 목숨 거는 고3에게 수능 말고 다른 길들도 미래에 펼쳐져 있음을 보게 했다. 자신감을 갖게 해주었다. 

◦수능이 내 삶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능이 두려웠다. 그런데 이 저널 쓰기를 통해 자신감과 여유가 생겼다. 특히 수능과의 대화가 좋았다.

◦이 프로그램 덕분에 잘 버텨 왔다. 혼란스러웠던 감정들을 추스르며 왜 공부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내가 당시에 읽고 또 읽었던 소감문을 끝으로 이 글을 마친다.     


우선 감사를 먼저 드립니다. 이걸 시작하기 전에는 솔직히 말해서 자살 시도를 몇 번이나 하고자 했습니다. 성적 고민에, 집안 사정에 날로 스트레스가 쌓이고 앞으로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이 저널여행을 신청하면서 나에게 뭔가 변화가 없다면 정말로 끝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저널 여행 후에 무언가 한 가닥 빛이 비치는 듯합니다. 앞으로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도 깨달았습니다. 만일 이 경험이 없었더라면 제가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이런 소중한 체험을 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09년 저널 여행에 함께하자고 달려온 14명 아이들이 없었다면 나는 이런 길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이 아이들에게 깊은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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