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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희 Jun 12. 2024

Ⅱ부-1. 수능 직전 고3 아이들과 시작하다 3)

3) 2010년, 모두와 함께 간 길

2010년 전근한 여학교에서 또 고3을 맡았다. 6개 학급 243명을 수업 중에 만났다. 243명 모두에게 저널테라피를 하고 싶었다. 무슨 수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2009년처럼 점심시간에 나 혼자서 실시할 수도 없고, 함께할 수 있는 교사도 없었다. 수업 시간 중 학급에서 실시할 수밖에 없다. 수능 전 한 달은 EBS 파이널 문제집을 풀어야할 금쪽 같은 시간이다. 무슨 프로그램을 하자고 하면 아이들은 기가 막힐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이들과 저널테라피를 하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243명 모두와 저널테라피를 함께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고민했다. 첫째가 시간의 문제였다. 2009년처럼 20분을 할애할 수는 없다. 수업시간 50분 중 20분은 긴 시간이다. 10분 정도로 시간을 줄여야 한다. 마음 가다듬기와 기법 설명에 2분, 저널 쓰기에 7분, 마무리에 1분 총 10분에 끝낼 수 있어야 하는데... 가능할까? 고민을 거듭하다가 답을 찾았다. ‘시(詩)’를 저널테라피에 활용하기로 했다. 짧고 쉬운 시로 저널 주제에 빨리 집중하게 하여 시간을 단축해 보기로 했다. 둘째는 피드백의 문제였다. 2009년 14명 저널에 손글씨로 한 회기 피드백를 쓰는 데 걸린 시간은 60~90분 정도였다. 243명을 일주일에 2번씩 피드백을 해줄 수는 없다. 불가능이다. 처음에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난감했다. 문득 생각나는 말이 있었다.      


2009년 저널테라피를 마치고, 주변 교사들과 교사 특강에서 만난 이들에게 저널테라피에 대해 알리기 시작했다. 겨우 10분씩 8번 저널을 썼을 뿐인데 아이들의 반응이 얼마나 놀라운지 떠벌였다.   

“아이들과 이런 저널 쓰기를 해보세요. 그 효과가 드라마틱하고 다양해서 한 마디로 설명할 수가 없답니다.” 

그런데 교사들의 반응이 회의적이었다. 

“우리는 못 해요. 선생님은 국어 교사이고 상담을 전공했으니까 가능하지요. 우리는 선생님처럼 아이들 글에 피드백을 써주기 어려워요.”     


피드백 쓰기 어렵다는 이 말이 생각나면서 243명에게 저널테라피를 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다. 원래 저널테라피는 스스로 저널을 씀으로써 유익함을 경험하는 방법인데 나는 아이들 저널에 피드백을 써주었다. 2009년 14명 아이들이 경험한 효과가 스스로 저널을 써서인지, 피드백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둘 다의 상호작용 덕분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저널 쓰기만으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교사나 상담자는 피드백에 대한 부담을 갖지 않고 저널테라피를 활용할 수 있다. 그래서 243명 아이들에게 공개와 비공개 희망을 받았다. 저널을 공개하여 피드백 받기를 희망하는 아이들 49명과 공개하지 않고 피드백 없이 저널 쓰기만을 희망하는 아이들 194명으로 나누어졌다. 49명의 저널에 일주일에 두 번씩 피드백을 하는 과정이 쉽지 않지만, 243명 모두와 두 번째 저널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고3 수업에서 수능을 한 달 앞두고는 인기 강사처럼 쪽집게 문제로 총정리를 해줘야 한다. 출제 확률이 높다는 과장된 자신감으로 아이들에게 학습의욕을 끌어올려야 한다. 유능한 교사라면 이래야 한다. 그런데 고3 수업 중에 듣도보도 못한 저널테라피를 하자고 하니 아이들의 반응이 싸늘했다. 어이없다는 듯이 아예 듣지 않는 아이들도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초조하여 수능 공부가 아닌 다른 것에 시간을 내어놓기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런 마음을 알기에 나는 아이들 눈치를 보느라 머뭇거렸다.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거듭 고민했지만 발걸음을 내딛었다.      


저널테라피가 진행되면서 아이들 태도는 시작할 때와 달리 긍정적으로 변화되었다. 저널쓰기를 재미있어 하고 즐거워 했다. 피드백을 받는 아이들은 자신의 저널에 쓰인 피드백을 기다렸다.    

  

◦선생님 글이 너무 기대됐고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마치 초등학교 때 일기를 쓰는 느낌이었다. 

◦선생님 피드백 보고 자신감도 되찾고 ‘나는 정말 할 수 있구나’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자신에게 너무 무른 나인데 옆에서 선생님의 답글로 응원을 받으며 계속 하다 보니 나 자신에게 좀 더 자신감이 생길 수 있었다. 

◦선생님의 피드백 덕분에 저널을 받을 때가 너무너무 행복했어요.

◦피드백을 읽으면서 정말 감탄사가 터졌어요! 선생님의 조언과 격려를 들으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조금 해소되고 꿈이 생긴 것 같아요.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이렇게 편한 건 줄 몰랐다.    

  

피드백을 받지 않는 아이들은 자신의 저널 쓰기를 즐기며 이 시간을 기다렸다.  

    

◦그 순간은 즐겁고,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냥 제 생각을 맘 편히 글로 쓴다는 게 즐거워요. 

◦솔직하게 쓰면서 조금씩 마음이 편해졌어요.

◦EBS 수업보다 이걸 더 기다렸어요.

◦회기가 늘수록 작문시간에는 저널 쓰는 시간만 기다려졌다.

◦처음에는 글쓰기도 잘 못하고 내 마음속의 얘기를 쓴다는 게 부끄러웠는데 막상 하고 나면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나의 고민을 쓸 수 있고 마음속의 답답함이 없어지는 것 같아 마음도 편안해지고 기분이 너무 좋았다. 

◦이런 글쓰기를 고등학교 와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잊지 않을 거에요! 


차츰 저널테라피에 대한 태도가 긍정적으로 변화되었다. 시간이 아깝고 귀찮고 어색했는데 위안이 되고 도움이 되었다고 소감문에 털어 놓았다. 피드백을 받는 아이들은 물론이고, 피드백을 받지 않는 저널 쓰기로도 이런 경험을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옛날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지금 심정을 까발리는 것도 나에겐 힘든 일이어서 매회 이걸 할 때마다 우울했는데 점점 뒤로 갈 때 뭔가 치유되는 느낌이라 좋았다. 

◦솔직히 처음에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도 하긴 했었다. 하지만 지친 일상에 10분이라는 시간을 투자해서 마음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이 프로그램을 하기 전과 끝낸 후의 기분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기 전 기분은 우울의 극치였다면 끝낸 후에는 난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는 거다. 

◦수시 기간 동안 정말 우울했고,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정말 이 길이 맞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 때 이 프로그램을 하게 되어 정말 행운이었던 것 같다.      


위에 제시한 아이들의 반응은 소감문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8회기 저널테라피를 마치고 아이들의 소감문을 읽고 또 읽었다. 피드백 없이 저널 쓰기만 한 194명 아이들의 소감문을 읽으며 벅차올랐다. 7분 정도의 저널 쓰기를 8번 했을 뿐인데 아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추스렸다. 엉켜있는 생각을 정돈했고 절망 속에서 자신을 건져냈다. 자신의 빛나는 모습을 일으켜 세우며 당당해졌다. 아이들은 저널을 쓰면서 ‘자기 실현 경향성’을 발현하고 있었다.


‘자기 실현 경향성’은 인간중심상담의 창시자 로저스가 주장했다. 그는 사람을 유기체적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모든 유기체처럼 사람은 자신의 잠재력을 발전시키려는 경향을 지니고 태어난다. 선천적으로 선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서 자기를 실현하려고 한다. 저널 쓰기는 자신과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진정한 자기가 되는 경험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였다. 나에 대한 공부였다고 생각한다. 쓰면서 새삼 잊고 있던 것들을 알게 되었다. 

◦깨달은 점이 있다면, 역시 ‘나’는 ‘나’라는 것. 그러니까 앞으로 더 달려 나가야겠다. 세상을 향해서 난 자신 있으니깐. 

◦나 자신이 긍정적으로 보인다. 10분이란 시간들이 나를 성장시키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던 것 같다.

◦나에 대한 믿음, 애정, 확신이 생길 수 있던 기회였다. 나만 그런지는 몰라도 요새 애들이 자기 자신을 많이 안 좋아하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서 아주 조금이나마 나에 대한 애정이 생길 수 있던 기회였다. 

◦열등감이나 추락한 자신감을 자신에 대한 장점을 적으며 ‘맞다! 나도 이런 점이 있었지’ 하고 깨닫고 나 자신을 좀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미주 이야기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미주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였다. 수업 중이면 늘 뒷자리에 앉아 엎드려 있었다. 그 공주가 저널테라피를 하면서부터 맨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미주는 저널을 공개하였고, 매번 열심히 저널을 썼다. 미주의 저널에 피드백을 할 때마다 나는 공주를 깨우는 왕자가 된 느낌이었다. 설레고 행복했다. 미주는 스튜어디스와 바리타스를 꿈꾸고 있었다. 미주가 저널을 쓰는 것도 꿈을 가지고 있는 것도 신기했다. 그런 미주를 정시 합격자 발표가 다 끝난 2월, 복도에서 우연히 만났다. 


미주가 환하게 웃으며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표정이 밝아 보였다. 원하는 대학교에 합격했나 보다 생각했는데 떨어졌다고 했다. 시원스럽게 웃으면서 말하는 게 이상했다. 4년제는 떨어졌고 전문대 결과를 기다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아, 괜찮아요. 전문대도 세니까 떨어질 수 있는데요, 제 꿈을 믿어요. 이번에 안 되면 내년에 가면 돼요. 이젠 공부가 지겹지 않아요. 재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 응원해 주세여. 지금도 선생님이 저널에 써주신 것 읽고 또 읽고 그래요.”     

미주가 자신의 꿈을 햇볕 삼아 자라고 있었다. 미주의 뒷모습을 보며 소리쳤다.

“우리 미주!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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