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2011년, 천천히 걸어간 길
2011년 저널테라피에 함께한 아이들은 고3 학생 6명이다. 2011년에는 2학년 수업만 하게 되어서 3학년 학생들을 만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적 요인이 있었지만 소수 아이들과 저널테라피를 경험해 보고 싶었다. 아이들 각자가 어떤 경험을 하는지 천천히 음미하고 싶었다. 3학년 담임교사를 통해 저널테라피를 안내하고 6명 아이들을 만났다. 2011년 10월 10일 첫 모임을 갖고 2011년 10월 14일부터 11월 1일까지 총 8회기 저널테라피를 함께하였다. 저녁식사 시간이나 청소 시간 20분을 할애하였고, 저널 쓰는 시간은 10분 정도였다. 3년 째 수능 직전 고3을 만나는 자리이니 마음의 여유가 생길 만도 한데 여전히 긴장되었다. 가희, 도희, 문희, 상희, 주희, 태희가 저널을 쓰면서 어떤 경험을 하는지 살피며 이 길을 걸었다. 저널테라피 후 그 두렵던 수능을 마치고 대학교에 입학한 2012년 8월까지 만남이 이어졌다. 아이들이 저널을 통해 마음을 어루만졌고, 자기 본성을 찾아 수능 너머 꿈을 향해 흘러가고 있음을 바라볼 수 있었다.
마음의 어루만짐 수능 직전의 고3, 이들은 누구인가? 수능을 바로 앞에 두고 가장 의욕적으로 열심히 공부하리라는 주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이들은 우울하고 불안했다. 가장 큰 원인은 공부를 해야 하는데 공부가 잘 되지 않아서였다. ‘재수하고 싶어서’, ‘교실 자리 때문에’, ‘친구와의 갈등으로’, ‘공부할 게 너무 많아서’ 등 그 이유는 각각 다르게 표현하지만, 결국 공부가 잘 되지 않아서 우울하고 불안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저널테라피에 참여하였지만 참여를 망설이기도 했다.
요즘 내 마음은 외롭고 두렵다. 왜냐하면 10월 모의고사를 최악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난 다 할 수 있고, 수능 때까지 즐거운 마음으로 수능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친구들과 놀 생각을 했는데, 요즘 나는 계속 재수할 생각만 하고 있고, 내가 고등학교 3년 내내 뭘 한 건가 싶어서 내가 너무 한심하다. 엄마에게 재수얘기 꺼냈다가 엄마랑 싸울 뻔해서 어디 가서 재수한단 소리도 못한다. (상희의 1회기 저널 중)
수능이 걱정된다. 수능 날까지 이제 한 달 남았는데 오늘 선생님들께서 어제 본 모의고사 통계 이야기 해주는 거 듣고 허무했고 걱정되고 나도 열심히 한다고 한 것 같긴 한데 이제야 많이 부족했다고 느끼게 되었다. 해도 오를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도 들고 내가 대학 가서 뭐 해야 하나 생각도 들고 마음이 싱숭생숭한 것 같다. (문희의 1회기 저널 중)
수능 직전 고3 학생들의 시간은 수능 앞에 멈춰 있다. 많은 고3 학생들은 칠판에 쓰인 수능 D-day의 숫자를 보며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다. 좀 더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데에 대해 후회하고 자책하지만, 삶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시간도 미래를 구체적으로 설계할 여유도 없다. 수능까지는 오로지 수능만 생각하겠다는 결심으로 현재를 살아가는데, 그 현재가 수능을 위해 살아지지가 않는다는 데 고3 학생들의 고충이 있다. 아이들 모두가 각자의 이유를 들어 수능 직전에 학습의 집중력이 떨어졌음을 호소하였다.
공부를 잘하는 태희는 교실 뒷자리라는 물리적 공간의 문제가 심란했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사소한 문제로 어이없게 집착하고 힘들어 하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저널에 이 답답함을 털어놓으면서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태희는 저널을 ‘작은 방’이라고 했다. 이 작은 방에서 안정을 취하고 나자 교실 뒷자리의 번잡함을 이겨낼 힘을 얻게 되었다. 더 이상 교실의 자리로 불안해하지 않았다. 저널을 쓰면서 아이들은 우울하고 불안한 마음을 어루만져 갔다. 저널에 털어 놓는 것만으로 마음이 안정되어 갔고 이것이 바로 저널테라피를 하는 동력이 되었다.
이렇게 아이들은 수능 직전이라는 현재적 상황에서 프로그램을 경험하고 한 회기 20분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현재 자신의 모습에 머무르며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었다. 어루만짐의 경험은 자신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으며 의미 있는 타인인 나와의 관계 속에서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어루만짐의 경험은 다시 그동안 불편했던 가족과의 관계, 친구들과 관계를 어루만지는 경험으로 이어졌다.
본성으로의 회귀 수능 직전 고3 학생들은 수능이라는 거대한 댐 앞에 고여 있는 물처럼 보인다. 콘크리트로 높게 쌓아 물을 가두고 있는 그 견고한 댐 앞에서 흐름을 멈춰 버린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어디에서부터 흘러왔는지도 잊어버리고, 어디로 흘러가고 싶어 하는지 잘 모른 채 그 거대한 댐 앞에 기가 질린 모습이다. 수문이 열리면 그때부터 어디로든 흘러가게 될 거라 생각하고, 자신의 존재가치인 ‘흐름’의 본성을 아예 잊은 것처럼 보인다. 이런 모습은 수능 직전 고3 학생들이 지닌 페르소나(persona, 가면)이다. 이들의 진짜 모습은 아니었다. 이들은 저널테라피를 경험하면서 자신이 흘러 온 시간들을 되돌아보았다. 내면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았으며 자신의 소중한 모습을 발견해 갔다. 아이들은 과거 경험 중 의미 있는 경험들을 끌어냄으로써 본래 자신의 모습을 환기할 수 있었다.
제일 자랑스러웠던 순간은 16살 때 혼자 비행기를 타고 교환학생을 갔을 때이다. 특히 비행기를 타는데 새벽1시부터 4시까지 낯선 공항에서 혼자 기다리고, 티켓을 받고, 비행기 타기까지 혼자 다했다. 그때 무서워서 울었었다. 4시간 동안 2번째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가방 3개를 들고 한 자리에 있었다. 돌아다니거나 잠들면 큰일날까봐. 모든 비행을 마치고 무척이나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도희의 2회기 저널 중)
도희가 혼자서 무엇인가를 성취했을 때를 자랑스러워 했다면, 상희는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인정받았을 때를 자랑스러워 했다. 이런 자신에 대한 발견은 현재 자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현재 삶은 각자의 과거 경험의 연속선 위에 진행되는 것이다. 그 과거 경험은 현존재인 자신에 의해 다시 말해지며 현재로 되살아닜다. 도희가 지금 불안한 것은 수능을 망쳐서 중요한 성취에 실패할까봐라면, 상희는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까봐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자신에 대한 깨달음은 불안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하고 원래 자신의 본성으로 회귀할 수 있도록 한다.
저널테라피를 하던 당시 주희는 친구와의 갈등으로 매우 힘들어 했다. 자신의 성격에 문제가 있어서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친구들과 좀 다를 뿐이지 틀린 게 아니라는 걸 주희가 깨달으면서 편안해졌다. 주희는 저널을 쓰면서 자신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학교생활이 즐거워졌다. 자신을 문제 있는 아이로 만들어서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않게 되었다. 대학교 1학년 주희가 보낸 메일의 일부이다.
막무가내로 다른 사람들과는 안 맞아서 못 지내겠다고 말하는 제게 선생님께서는 그게 너의 개성이라고 해주셨습니다. 저마저도 정신적 장애고 왕따라고 생각하던 것을 개성이라고 고쳐 주셨습니다.(2012.8.29. 주희의 메일 중에서)
주희는 대학생이 된 후 많은 이들과 자유롭게 소통하며 활기찬 학교생활을 했다. 19살 저널의 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수능 너머 꿈을 향한 흐름 매슬로우Maslow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자기실현’을 이룬 사람으로 보고, 대부분 이 욕구를 실현시키지 못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실현 욕구’를 갖고 있다고 했다. 이 욕구는 로저스Rogers가 말한 ‘실현 성향’으로 고유의 잠재력을 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성장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앞 장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자기 실현 경향성을 아이들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저널테라피를 시작했을 때 아이들은 수능 너머에 있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불안했고 수능 결과에 따라 그 미래는 엄청난 파장을 가져올 거라 상상했다. 수능이 앞으로 겪을 많은 시험 중의 하나라는 것을 깨달아 가면서 수능 앞에 멈춰 있던 흐름이 꿈을 향해 움직였다.
지금 당장은 내 인생에 전부인 것 같고 이거로 내 미래가 결정될 것 같지만 수능은 내 인생에서의 극히 일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소홀히 하지는 않겠지만 12년 동안의 나의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 되지 않을까. (문희의 5회기 저널 중)
수능은 거대한 댐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징검다리에서 만난 돌덩이 하나라는 걸 깨달아 갔다. 수능 너머의 미래에 자신의 발을 옮기기 위해 잘 밟고 지나가면 되는 그런 돌덩이였다. 그래서 이들은 차츰 흔들리는 마음의 무게 중심을 잡으며 수능 너머의 미래를 희망차게 설계해 나갔다. 수능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미래 때문에 자신이 지금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수능이 인생의 전부라고 믿고 수능 앞에서 하얗게 질려서 바르르 떨며 흐름을 멈추었던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향해 흘러갔다. 가희는 잘 나온 수능 점수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원하던 교대가 아닌 사회학과를, 주희는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는 물리학자의 꿈을, 태희는 자신이 원하던 변리사의 꿈을, 상희는 지방대이지만 재수가 아닌 승무원의 꿈을, 도희는 두 갈래 길에서 경영학과를, 문희는 새로운 꿈을 찾아 무역학과를 선택했다. 이 순간에도 시간이 흐르고 강물이 흐르듯 참여자들의 삶은 꿈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
나는 이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어서 감사하다. 천천히 걸어가며 바라본 아이들 이야기를 다음 장에서 하나씩 풀어가려고 한다. 가희 이야기, 도희 이야기, 문희 이야기, 상희 이야기, 주희 이야기, 태희 이야기를 1인칭 주인공 이야기로 정리했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언급했듯이 아이들 저널은 공개 동의를 받았으며 이름은 가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