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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유 Dec 20. 2022

오랜 인터미션

괜스레 서글퍼지는 그런 날들이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화요일인데, 그저 내년을 앞두고 있을 뿐인데 말이다. 눈이 쌓인 길바닥과 올해가 2주 남았다는 사실보다 더 나를 서글프게 하는 건 지쳐있는 내 모습이다. 다들 내가 지칠 법도 하다고 말해주지만 학교 다니는 친구들에 비해서 나는 딱히 그렇게 바쁜 일 년을 보낸 것 같지도 않다. 무엇이든 비교해서는 안되지만 이렇게나 혼자 지내는 일상에서 숨통을 틀 수 있는 방법은 희한하게도 비교, 그뿐이다. 숨이 막히는 일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속 시원한 매일도 아니니까. J에게 말했다시피 최근에 내가 그림 없이 살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해봤다. 조금은 위험하고도 아찔한 생각이다. 거의 반 평생을 그림만 그려왔는데, 그림밖에 없던 인간이 평생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을 땐 덤덤하게 나름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무서웠다. 그림을 그리지 않고도, 디자인을 하지 않고도 무척 잘 살아갈 수 있겠다 싶었는데 오늘 오랜만에 바람을 쐬며 생각을 해보니 안 될 것 같다. 내 오만이었다. 미술이 아닌 새로운 길을 이야기하는 J의 큰 눈이 평소보다 더 빛나 보였다.


계절에 취약한 사람. 개중에 내가 포함된다는 사실을 첫눈을 본 순간에 깨달았다. 내가 무척이나 겁내고 있구나. 지독하게 벼랑 끝이구나. 벼랑 끝에서 절벽을 등지고 있다. 한창 작업할 때 읽었던 책을 다시 읽었다. 이연 작가의 <겁내지 않고 그리는 법>. 내가 그림이 즐겁지 않은 이유는 내가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기 때문이구나. 맞아, 내 이야기야. 높아지는 안목에 내 손이 따라가지 못하는 그런 상황. 이것도 난데. '표현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을 때 느껴지는 감각, 그 작은 가려움에서 온다.' 음, 나는 할 말이 없나. 나에게서 꺼낼 말이 다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할 말이 없다고. 근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말할 힘이 없는 거였다. 책을 다시 읽으면서 이전에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슬럼프' 파트를 건너뛰고 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불도저였기 때문에 '슬럼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으리라. 오늘은 아주 천천히 그 부분을 곱씹어 읽었다. 



"애초에 이 책을 그림 그리는 순서로 구성했는데 슬럼프는 정말 딱 이 지점 즈음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게 정말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그걸 겪었다면 당신은 뭔가에 진심이라는 뜻이고, 나 또한 해결 방법을 알 수 없어 힘들지만 그래도 발버둥 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단지 이것이다. 슬럼프를 겪고 있는가? 나도 지금 그렇다. 당신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게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솔직한 위안이다."


이게 슬럼프였군요. 해결 방법을 당신도 모르시는군요. 당신도 겪으셨군요. 작가가 보내는 솔직한 위안에 마음이 조금 풀렸는지 나는 그냥 카페에서 짐을 싸서 일어났다. 그리고 평소에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동네 책방에 들어갔다. 아주 작은 동네 서점은 너무 추웠다. 밖이 더 따듯했다. 목적 없이 들어간 서점은 언제나 즐거운 발견의 연속이다. "이 책이 없어?" 보다 "이 책이 있다고?"라는 말을 더 많이 하게 되는 긍정적인 경험을 얻고 나올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의 저자가 쓴 최신작이 눈에 띄었고 "이게 있네."를 중얼거리며 미소가 지어지는 책들을 샀다. 오랜만에 그림 관련 책이었다. 책을 고르는데 입김이 나는 신비한 경험을 하고 집에 돌아오니 올해 마지막 책 쇼핑이라며 주문했던 교보문고 택배가 문 앞에 놓여있다. 또 미소가 지어졌다. 



이렇게라도 하루하루 사소한 일들에 꾸준하게 설레어야지. 그것마저 잃으면 이 인터미션이 더 길어지게 될 테니까. 화장실도 들리고 잠깐 기지개도 피고 수다도 좀 떨다가 다시 시작하면 돼. 다시 시작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게 중요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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