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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유 Dec 19. 2022

무언가를 진짜로 하고 싶은 마음은 귀하다.


무언가를 진짜로 하고 싶은 마음은 귀하다. 절대 쉽게 오지 않는다. 어느 날 문득 그 마음이 ‘오신'다면 정말 잘해 드리자. 주변에서 미쳤냐고, 무슨 바람이 들었냐고 뭐라 해도 개의치 말 것. 일상이 순식간에 풍요로워질 수 있는 절호의 충동을 모르고 지나치지 않기를. 기민하게 알아차리기를. - <작고 기특한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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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학을 하는 순간부터 나는 무언가를 진짜로 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작년 이맘때쯤 생긴 그 마음은 거의 일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유효했다. 내가 긴 시간 동안 품었던 그 마음이 상당히 가치 있었고 소중한 마음이었다는 걸 최근에야 깨달았다. 하고 싶은 것이 사라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들이 빛나 보였고 그 마음을 잃지 않길 바라게 됐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이 상황이 그동안 내가 겪지 못했던 증상의 번아웃이 아닐까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어제부터 하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서 내 책장을 뒤집어엎는 일이 잦아졌다. 며칠 전에도 책장 정리를 했는데 일기를 찾아보니 11월 초에 하고 한 달도 안 돼서 또 정리를 한 것이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내 방은 내 마음과 같아서 어질러질수록 내 마음도 어지럽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분명 정돈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방을 아무리 치워도 해결되지 않는 무언가. 그래서 의도적으로, 일부러, 미친 사람 마냥 갑자기 책장에 있는 모든 책을 꺼내버렸다. 그냥 닥치는 대로 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책은 내가 조금 더 어렸을 때 집에 있던 책들에 비하면 1/10도 안 되는 양인데 벌써 같은 책이 두 권씩 있고 그런다. (의도적으로 두 번 산 게 있고 집에 있는지 모르고 엄마가 사 온 책이 있다.) 스스로 제일 놀랐던 건 너무 사고 싶어서 교보문고 장바구니에 넣어놨던 책이 책장에서 나왔다. 생각지도 못한 충격을 받았다. 조금 더 신경 쓰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반성도 했다. 누가 본 건 아니지만 혼자 머쓱해하면서 평소대로 장르로 구분 지어서 정리하려고 했는데, 아니 정리했다. 그런데, 꽂으면서 생각하니까 이전과 다른 게 장르별 책장 위치 말고 다른 게 없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이동진 평론가의 파이아키아가 생각나버렸다. (이동진 평론가의 책장 중 한편 이 모두 빨간 책으로만 꽂혀있다.) 나도 색깔별로 꽂아보기로 했다. 사실 빨간색부터 꽂기 시작했는데 눈이 너무 아파서 다시 엎을까 고민했지만.. 칙칙했던 내 방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아서 계속 진행시켰다.

책을 정리하면서 이번에 새로 시도해 본 것은 책 띠지와 곁 표지를 다 벗겨서 버렸다. 항상 읽을 때마다 걸리적거리고 불편했는데 다 빼어버리니까 깔끔하기도 하고 책 표지의 원래 디자인이 나와서 더 예뻤다. 작은 탄성을 뱉으면서 정리했다. 알록달록 해진 책장이 너무너무 마음에 들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땐 역시 방청소지. 역시 책장 정리지.라고 생각하며 침대에 걸 터 앉아 책장을 한참 바라봤다. 점점 책장이 커졌으면 좋겠다. 



솔직히 진짜 예쁘지 않습니까...!! 

위아래 옆으로 한 칸씩 더 있지만 거긴 아직 책과 잡동사니가 엉켜있어 차차 비워낼 예정이다. 나는 의외로(?) 맥시멀 리스트다. 우리 가족 모두가 그렇다. 버리는 것을 잘 못한다. 언젠가 내가 다시 찾을 것만 같고 필요할 것만 같아서 일단 두는. 언젠가 이런 내용으로 글을 썼던 것 같은데, 못 찾겠으니 다시 쓴다.라고 쓰다가 찾아버렸다. 블로그에 검색하니 비공개로 되어 있었다.


"나는 맥시멀 리스트인데 감정에 있어서도 그렇다. 왜 그 작은 물건, 작은 감정까지 끌어안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물건을 버리지 않고 쌓아두는지에 대한 이유를 생각해 보면 왜인지 아쉽고 아깝고 필요해질 것만 같아서이다. 감정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미세하게 변하는 모든 감정들을 외면할 수가 없다. 언젠간 이 감정도 추억이 되겠지 혹은 이 감정이 필요할 때가 생기겠지. 20220420"









최근 일주일 간 느낀 것들을 기록해 보자면 일단 올해 마지막 페어를 빼놓을 수 없다. (12/3 진행된 예술청 페어) 페어는 언제나 괴롭지만 재밌고 힘들지만 즐겁다. 대부분의 페어는 혼자 참여해도 따듯했지만 이번 페어는 유독 외로웠고 소외됐다. 처음 열리는 행사라 그런지 페어가 정리되지 않은 느낌이 들었고 참가자들도 조금은 적응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사람이 없는 건 하도 많이 겪어서 그러려니 한다. 차라리 사람이 정말 없는 페어의 손님들이 오히려 부스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봐주신다.)  나도 다른 참여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계속 어슬렁거렸고 나중엔 그 계속되는 노랫소리에도 적응이 되지 않아 영화 상영관에 혼자 틀어박혀 영화 소리가 나오는 헤드셋을 끼고 책을 보다 영화를 보다 반복했다. 그럼에도 이번 페어에서 분명하게 얻은 것이 있다면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은 분명하게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귀 기울여주는 사람들. 이 맛이지". 이 두 문장을 얻었다. 





여러 번의 페어를 나가면서 항상 하는 실수는 판매에 목표를 두어서 내가 하려던 게 아닌 영역에 손을 대 버리는 일이다. 그렇게 작업을 해서 내보이면 대부분의 손님들도 그걸 알아차리고 나는 후회한다. (일 년 동안 얻은 경험이니 절대 반복하지 않겠지..) 사람들이 꽤 모여있는 부스를 보면서 슬쩍 가서 구경하니 왜 모여 있는지 알겠더라.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아는 사람이, 자신이 잘하는 것이 현재 트렌드인 시점에 본인이 잘하는 것을 했을 때 나오는 시너지가 이건가 싶었다. 부러움을 넘어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흐뭇하게 그 부스를 쳐다봐주었다. 




몇 번의 페어를 통해 얻은 약간의 통계에 의하면 나의 작업들을 좋아해 주시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스타일이다. 일단 조용히 와서 쓱 본다. 한참을 본다. 대부분 말을 걸면 도망가기에 타이밍을 보다가 나는 틈을 노려 설명을 해드린다. 이렇고요~ 저렇고요~ 하면 

1. 비전공자 : 오... 그렇군요... 좋네요..

2. 전공자 : (눈을 기괴하게 뜨면서) 대애박.. 손그림,,, 아니 연필 아니고 색연필... 네? 검은색만 썼다고요,,,? 필압이 ;;; 

이 두 가지 반응으로 나뉜다.






여기서 더 재밌는 점은 1번의 비전공자분들은 감탄을 하고 일단 더 보고 오겠다고 한다. 처음에는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는 말투로 작별을 고했지만 몇 번의 경험 끝엔 알 수 있다. 다시 올 사람이라는 걸... 놀랍게도 둘러보다가 계속 생각이 나서 다시 사러 왔다는 사람들이 제일 많다. 그 말을 들을 때의 두근거림은 아무도 모를 거야!!!!. 나만 미련이 있는 줄 알았는데 상대방도 나에 대해 미련이 있던, 그런 상대방에게 먼저 고백받은 그런 느낌이라는 거. 

이번 페어에서 아주 기억에 남는 거의 유일한 손님은 처음에 슬쩍 오더니 열심히 정성스럽게 들여다보시곤 카드는 안되냐고 하셨다. "죄송해요.. 안돼요... 리더기가 업거든요.."라고 했더니 아쉬워하시며 가셨다. 나도 아쉬웠지만 어쩌겠어하고 다시 부스를 버려둔 채 책을 읽었다. 한 30분 뒤에 또 부스에 가니 그분이 또 오셨다!!! (아니 아직도 안 가셨어요????) "혹시 인터넷으로는 판매하시나요..?"라고 묻길래 "음... 아니요ㅜㅜㅜㅜㅜ"라고 했다. 하 이분을 위해 인터넷으로 팔아야 하나 살짝 고민했다. 그분도 한참 고민하시더니 또 가셨다? 음.. 또다시 책 읽으러 상영관 갔다가 영화가 재밌어 보여 독립영화 한 편 때려주고 다시 부스로 가니 또또 오셨다. 이 정도면 나를 기다린 게 아닌가 싶어 조금 죄송스러웠다. 뭐라고 하셨는지 정확한 문장이 기억나진 않지만 또 살 기회가 있냐 뭐 이런 식의 질문이었다. 나는 "제가 이런 행사에서만 판매하는데 아마 올해 마지막 행사일 것 같아요~" 했고 그분은 "그럼 할인가도 마지막이겠네요..." 하셨다. 진짜 남는 게 없었지만 퍼블리셔스 테이블에서 붙여 놓은 할인 스티커를 귀찮아서 떼지 않았다. 내가 웃으면서 끄덕거리니까 사겠다고 하셨다. '세 번 찍어 안 넘어오는 나무 없다더니 제 책이 당신을 세 번이나 흔들었군요'라고 생각만 하며 예쁘게 포장해 드렸다. 저녁이 돼서 그분이 스토리에 나를 태그 하셨는데 '정말 구경만 하고 오려했는데... '라는 문장과 함께 내 부스 사진을 찍어 올리셨다. 아주 사랑스러운 손님이셨다. 이젠 소중한 한 분의 독자.




2번 전공자분들은 한 번 보시면 사버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수다의 장이 펼쳐진다. 서로의 작업 이야기하기.. 정말 재밌다. 대부분 나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거나 비슷한 그림체를 가졌다. 그런데 이번 페어에서 만난 분은 나와 전공도 같았지만 무엇보다 그림이 그냥.. 스승과 제자 수준이었다. 서로 의아하게 쳐다보고 바로 인스타그램 맞팔해버렸다.(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작품을 다 보여주셨는데 반해버렸다. 그분한테 그림 배우고 싶다.) 진짜 열띤 토론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림 하나하나 다 보시고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려는데...!! 아직 책을 못 봤다고 책까지 펼쳐서 보셨다. 신나서 열심히 옆에서 설명했더니 감동받으신 표정으로 사겠다고 하셨다. 글이 너무 좋다고 하셨다. 그 작은 말 풍선에 들어있는 글자들이 누군가를 흔들 때마다 내 마음도 같이 흔들린다. 왜냐면 내 진심이니까. 내 일기니까.,,, 내가 원했던 게 이거잖아요. 이 맛에 페어 오지. 기꺼이 들어주고 기꺼이 들여다봐주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기뻤다.


마지막으로 여담이지만 3번의 유형이 있다. 이름하여 흑백&만화 사냥꾼들. 그들은 일단 걸음걸이마저 거침없다. 부스를 슥슥 지나다니면서 흑백이나 만화인, 혹은 흑백이면서 만화인 책들만 사냥한다. 사실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그렇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페어를 둘러볼 땐 흑백이나 그림 위주인 부스들만 정성스레 조진다(?). 그리고 작가들과 안면을 트고 말을 트고 치근덕거린다. 그런 후에 두 번째로 구경을 할 땐 하나하나 꼼꼼하게 글로 된 부스들도 살펴보면서 그림 부스들 중에 마음에 들었던 곳에서 구매를 하는.. 그런 패턴을 가지고 있다. 그 흑백 만화 사냥꾼들은 소중한 존재다. 그냥 내 그림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 거침없는 그들의 발걸음이 그립다!






지난주 토요일 페어가 끝나고 나서 지금까지 한 거라고는 책장 정리와 영화 보기와 책 읽기가 끝이다. 일주일 전 내가 한 다짐대로 그렇게 살았다. 뭘 하려고 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했다. 일요일 알바를 뺄 수 있게 돼서 아주 편한 마음으로 잠들었는데 눈 뜨니까 1시였다. 일어나서 페어에서 읽던 <구의 증명> 다 읽어버리고 시계를 보니 겨우 3시. 넷플릭스 <웬즈데이> 남은 회차 다 보고 <재벌집 막내아들> 못 본 회차 보니까 잘 시간이 됐다. 누워서 읽고 싶었던 <위저드 베이커리>를 읽다 잠들었다. 개구리가 엄청 많이 나오는 꿈을 꾸고 월요일 알바를 갔다.. 그렇게 시작한 일주일은 여전히 같았다. 책 읽고 잠들고 영화 보고 또 책 읽고. 그러면서도 문득 책이 내 회피 수단이 되면 어쩌지.. 같은 히키코모리 책벌레 같은 소리를 일기에 적었다. 회피 수단이 책이라는 사실을 다행히 여겨야 하는지 아니면 그림도 안 그리면서 책이라도 읽는다고 합리화하는 내 모습에 정이 떨어져야 할까 고민했다. 


그렇게 책 읽고 영화 보면서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 넘쳐나는 좋은 작품들, 그것들에 쏟아붓는 내 시간과 돈을 아까워하지 않아야지. 책과 영화는 분명히 나에게 흡수되어 어디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가 내가 그것들을 필요로 할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쉬어도 된다고. 나는 나에게 도움이 되는 쉼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더 큰 세상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졌다. 



블로그에만 적어두기 아까워 브런치에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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