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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유 Mar 15. 2023

잘 지내시나요.

당신은 분명 잘 지내지 못한다고 말하겠죠. 가끔은 당신이 잘 지내지 못하는 이유가 내가 걸었던 저주의 효과인 것만 같습니다. 당신이 나를 잘 지내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똑같이 힘들었으면 하는, 나는 그렇게 뻔하고도 속 좁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죠. 당신에게 그런 지독한 저주를 내리는.

살면서 처음으로 내 눈이 초롱초롱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언가를 하고 싶은 귀중한 마음을 품으면 눈도 빛나게 되나 봅니다. 난 당신의 눈빛이 싫었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긴 시간 동안 귀한 마음을 꿈꿔본 적이 없기 때문 아닐까요. 나는 당신의 눈이 적어도 나를 바라보는 순간에는 빛나게 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지요. 당신의 눈이 빛나지 않았던 시간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린 충분한 시간을 함께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을 빛나게 할 수 있는 주문을 배우지 못했고 오히려 당신은 내 눈물을 닦느라 아주 조금 남은 빛마저 잃어버렸을 지도 모르겠네요. 

나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아졌음을 실감했을 때, 내 하루는 눈물을 쏟고 닦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소중한 문장들과 사사로운 대화들을 모두 간직하고 싶었음에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날들을 보냈습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탓해도 내가 할 수 있는 변명은 없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몫까지 스스로를 다그쳤습니다. 당신이 건네오는 사랑을 소중히 여겼는데도 당신과 함께 했던 일들과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글자들을 자꾸만 잃어버렸습니다. 모든 순간을 기억하려고 애써봤지만 그건 엄청난 체력이 소모되는 일이면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기억하는 일을 잘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대화를 나눈 누군가는 나의 장점이 기억력이라고 말해주더군요. 꽤나 오랜 시간 나를 봐온 사람이니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내 하루는 읽고 쓰고 그리는 일이 다입니다. 그 당시의 내가 그렇게 많은 것들을 기억하지 못했던 이유는 아마도 당신의 말은 내 눈물이 됐고 그렇게 범벅이 된 당신과의 일들은 닦여버렸기 때문이겠죠. 깊은 새벽이 길어지지 않게 도와준다 말해준 당신이 눈물의 근원이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아예 관계가 없다고도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잘 지냅니다. 잘 지내요. 어제 문득 건물 유리에 반사된 내 모습을 봤습니다. 불이 꺼진 곳에서도, 불이 환하게 켜진 곳에서도 내 머리는 여전히 노랗고 하얗게 잘 보이더군요. 갑자기 소스라칠 정도로 나의 노랗고도 하얀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아니, 보기도 싫어졌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하겠습니다. 그래서 며칠 뒤에 머리를 어둡게 덮으려고 합니다. 대략 3년 만이네요. 나는 나의 노란 머리카락과 함께 무엇을 덮고 싶어 하는 걸까요. 무엇을 가리려고 하는 걸까요. 정체를 알 수 없으면서도 형체도 없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요. 알 수 없지만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절대 당신에게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다짐이 새겨져 있다는 겁니다. 내가 가려는 길에 당신이 서있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은 내가 왔던 길을 다시 돌아 걷진 않을 거라고 약속해요.

잘 지내냐는 인사가 무색할 정도로 당신이 잘 지냈으면 합니다.

<러브레터>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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