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조위를 통해 왕가위를 만나다, 그리고 하루키

부산영화제

by 유이

부산 국제 영화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소싯적 영화에 미쳐있던 때에는 부산영화제가 매 해 가을의 중요한 행사 중에 하나였는데, 남의 일처럼 잊고 산지가 벌써 10여 년이 넘은 것 같다. 세계 3대 영화제인 베니스, 칸, 베를린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영화감독과 배우, 스토리는 꿰고 있어도 한국 영화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스크린 쿼터제로 한국영화가 겨우 버티고 있었던 시기에 이런 우리나라에서 국제 영화제가 열리게 되었고 영화팬으로서 1996년 1회 때부터 몇 년을 미친 듯이 쫓아다녔었던 것 같다. 남포동 여기저기 흩어져 상영하던 영화를 보러 이리저리 헤매며 영화 관련 인쇄물과 CD, 배지 등 관련 물품을 닥치는 대로 수집하여 고이 간직했던 기억이 있다. 몇 번의 이사를 통해 엄청난 분량의 씨네 21 잡지랑 영화 OST CD, 각종 포스터, 전단지, 영화표 등이 자연스레 소멸되어 한 때는 영화인을 꿈꾸던 소녀였다는 걸 증명할 길이 없지만 가슴 한 구석엔 정훈이 만화를 거의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이란 자부심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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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 영화의 전당 앞

큰 기대 없이 옛날의 향수나 느껴보자는 심정으로 방문한 영화제에서 아담한 사이즈의 양조위 특별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의 대표작들이 걸려있는 영화 장면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왕가위를 떠올리게 되었다. <아비정전(1990)>, <중경삼림(1994)>, <타락천사(1995)>, <해피투게더(1997)>, <화양연화(2000)>로 이어지는 90년대 아시아 영화, 문화의 아이콘이었던 왕가위! 80,90년 대는 <영웅본색>, <첩혈쌍웅>, <천장지구> 등의 홍콩 느와르가 최고의 인기였고 그들의 사랑과 의리, 배신, 희생에 웃고 울고 했었다. 왕가위의 데뷔작 ‘열혈남아’도 홍콩 느와르로 분리되어 개봉되었지만 그 이후 영화에서 보여준 당시의 기존 홍콩 영화와 전혀 다른 감성에 무한한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경삼림>-정식 개봉 전 야매(?)로 촬영한 화질 구린 영화를 보고도 화면 구도, 촬영기법, 독특한 편집에 감탄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으로 폭발적 인기를 끌기 시작했지만 왕가위 영화의 시작은 <아비정전>이다. 장국영의 맘보 춤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발 없는 새가 있다.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잠이 든다. 평생에 딱 한 번 땅에 착륙하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다."

“1분이 쉽게 지날 줄 알았는데 영원할 수도 있더군요.
그는 1분을 가리키면서 영원히 날 기억할 거라고 했어요...”

- 아비정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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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위 특별관


영화의 전당 라이브러리에서 만난 반가운 책 ‘왕가위의 시간 <Wong Kai-Wai:Auteur of time>-스티븐 테오’. 중 일부를 발췌해 본다.

왕가위는 미장센, 미술, 촬영, 편집, 그리고 음악을 미학적으로 공들여 제작하며 장인정신의 기준을 정립하였다. 그는 나레이션을 통해 각 인물에게 주위를 환기하는 내적인 목소리와 그들을 내러티브의 당사자로 만드는 독특한 시점을 부여함으로써 문학과 영화를 혼합한 또 다른 기준을 정립하였고, 바로 이 점이 그를 문학적이고 시각적으로 독특한 스타일리스트로 만들었다. 중화권 지역인 홍콩에 사는 상하이인으로서 느끼는 고립감에 관해 이야기해왔고, 이러한 자각은 그가 홍콩 영화 업계의 반항아라는 이미지를 갖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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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는 라틴 아메리카의 마누엘 푸익, 홀리오 코르타사르,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 홍콩의 김용, 류이탕 같은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중에서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많은 부분을 영화에 녹여냈다.


어느 맑은 4월의 아침, 나는 하라주쿠의 뒷골목에서 100%의 여자 옆을 지나갔다.
<중경삼림>은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소설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가 모티브가 되었다.
경찰 금성무가 청킹맨션에서 강도와의 추격전을 벌이는 중에 임청하를 밀치고 지나간다. 임청하의 상징적 이미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1963년, 1982년의 이파네마 아가씨>와 닮아있고 금성무와 양조위가 물건들에 말을 거는 장면은 공상과학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등장하는 두개골을 보며 꿈을 읽는 사람들과 비슷하다.
57시간 후 나는 이 여인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금성무는 왕가위 영화의 트레이드 마크인 일인칭 독백으로 추억에 잠김 채 읊조리는데, 이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일인칭 내러티브의 연장선이다. 소설 속 대화 스타일을 반영하는 왕가위의 독백과 추억을 회상하는 구성의 내러티브는 하루키 단편에서 보이는 무상함과 유사한 메시지를 전한다.
인간의 삶은 서로 그저 맞닿을 뿐, 서로 깊이 파고 들어가지 않는다.
(어쩌면 맞닿는 것도 아니라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가는 것이거나 한낱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왕가위는 하루키의 단편에서 보이는 무상함과 유사한 메시지를 전한다.
슬픈 사실은 기억을 떠올리는 데는 처음엔 5초가 필요했지만 점점 10초, 30초 그리고 1분이 걸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에 나오는 신경쇠약이 있는 여자는 <아비정전>의 장만옥, 수리진과 닮아 있다.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소설 속 주인공은 그의 기억을 더듬으며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릴까 두려워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때문에 왕가위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혹은 그 반대인지 알 수 없지만...

20대의 나에게 많은 영향을 준 사람들을 50대에 다시 만나게 되니, 그때의 열정과 가슴 떨림은 없지만,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게 하는 아련함은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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