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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llas Jul 06. 2023

공간의 마술, 시간의 연금술 - 대니얼 아샴

이보다 더 잘할 수 있을까

르네상스형 예술가 

대니얼 아샴(Daniel Arsham/이하 아샴)은 주로 건축을 바탕으로 조각, 회화, 영화, 패션, 캐릭터, 무대디자인 등의 영역에서 예술 활동을 펼쳐온 미국의 전천후 현대 예술가입니다. 저 여러 분야를 정말 한 사람이 다 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광범위한 예술 행보를 보여왔는데요. 그것도 실험적으로 해본 정도가 아니라 모두 골고루 진심을 담아 작품 활동을 하고 뛰어난 재능을 보여준 천상 예술가입니다. 오브제일부를 파손시킨 형태로 제작하거나 파손된 부분에 수정을 끼워넣은 조각 작품으로 특히 유명한데 피카츄나 포르쉐같은 대중적 이미지에도 동일한 세계관을 적용해 피규어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장르와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해왔는데 NFT 또한 그의 레이더에 포착됩니다. 기존 예술과 전혀 다른 유형의 NFT아트에 그의 작품을 어떻게 녹여 냈을까요? 

대니얼 아샴

그의 NFT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그의 생애, 그리고 NFT를 시작하기 전까지 해왔던 예술을 보아야 합니다. 아샴은 중학교 때부터 사진을 공부하고, 고등학교는 디자인&건축 전공의 특수학교에 진학하면서 일찌감치 예술에 눈을 떴는데요. 뉴욕의 사립대인 쿠퍼 유니언(The Cooper Union)에서 회화와 건축학을 전공했고 전액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성적이 좋았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마이애미에서 여러 친구들과 함께 'The house'라는 예술 전시관을 운영했는데 이 때 엠마뉴엘 페로탕(Emmanuel Perrotin)과의 인연이 시작됩니다. 페로탕은 세계 유수의 갤러리 중 하나인 페로탕 갤러리의 대표로 현재 한국에서도 삼청동과 신사동에 2곳의 지점을 운영할 정도로 한국 미술 시장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데요. 데미안 허스트의 첫 개인전을 연 적이 있으며, 무라카미 다카시를 발굴했고 다니엘 아샴이 20년 동안 전속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말 그대로 세계적인 갤러리이죠. 올해 9월~10월에는 아샴의 페로탕 전속 20주년 개인전이 파리 페로탕과 뉴욕 페로탕에서 동시에 열릴 정도로 아샴의 예술인생에서 페로탕은 가장 든든한 후원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다른 일로 만났을 수도 있지만 직접 전시관을 운영한 적극성이 스타 예술가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2006년에는 전설적인 현대 무용가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을 만나 무대 디자인을 맡기도 했습니다. 아샴이 커닝햄을 처음 만난 것은 불과 25세의 청년 때였지만 2009년 커닝햄이 타계하기 전후까지 커닝햄의 회사인 Merce Cunningham Dance Company(MCDC)와 여러 차례 작업했습니다. 대표적인 협업 작품으로는 'EyeSpace'를 들 수 있어요.  기하학적이고 미래지향적 느낌의 독특한 설치물인데 무대 위의 댄서들과 잘 어울리네요. 

EyeSpace


그 뿐만이 아닙니다. 쿠퍼 유니언에서 만난 Alex Mustonen과 함께 디자인 스튜디오 ‘스나키텍처(Snarkitecture)’를 설립해 현재도 운영 중이며, 영화 회사 'Films of the Future'를 설립해 커다란 생태적 변화를 맞이할 미래 지구의 문명을 담은'Future Relic(미래 유물)'이라는 이름의 9부작 단편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이처럼 다재다능하며 영역을 넘나드는 예술활동은 디올, 티파니앤코, 디즈니, 아디다스, 포르쉐, 퍼렐 윌리엄스 등 유명 브랜드, 아티스트들과의 전방위적인 협업으로 이어집니다.


안녕하세요. 미래에서 왔습니다.

트위터 갈무리

'미래 유물'이라는 아샴 예술의 핵심 개념처럼 그는 고고학, 시간여행, 공상과학에 관심이 많은데요. 특히 2011년 이스터섬에 방문했을 때 본 모아이 석상과 고생물학 연구 원정대에게서 큰 영감을 얻어 미래 유물이라는 작품을 만들게 된 허구적 고고학(Fictional Archeology)이라는 독특한 세계관을 만들어 냅니다. 허구적 고고학의 소재들은 구형 전화기, 카메라, TV와 같이 현대 문명을 상징하는 것들인데, 이 대상들을 미래에 가져다 놓고 미래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독특한 이질감을 느끼게 합니다. 작품 중에는 포켓몬, 워크맨, 벅스바니처럼 대중문화의 아이콘들도 있는데, 마치 고대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처럼 일부가 부서져 있어 현재를 사는 우리의 눈에 꽤나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미래에 '발견될 유물'들을 현재의 눈으로 바라보는 재미있는 발상으로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참고로 아샴의 트위터에는 그의 현재 위치가 'THE FUTURE(미래)'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컨셉트 정말 확실하군요. 

Future Relic


Bulbasaur(포켓몬스터 캐릭터 중 하나)


이렇게 멋있게 부순다고?

Eroding and Reforming Bust of Rome (One Year)

아샴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미래유물은 '침식'이라는 제목과 함께 12개의 NFT작품으로 재탄생합니다. 이 시리즈들은 2021년과2022년에 만들어 졌는데 작품부터 우선 감상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매력적이고 아름답기 때문이에요. 저도 처음 보았을 때의 감동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데요. 디지털 아트에 관심이 없던 제가 NFT아트의 매력에 빠지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작품들이었습니다. 특히 Eroding and Reforming Bust of Rome (One Year)에서 받은 충격은 대단했습니다. 이 영상 작품을 수차례 돌려본 후 곧장 아샴의 모든 작품들을 찾아보았으니까요. 파괴된 조각상이 오히려 완전한 형상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죠. 정확히 말하면 단순히 파괴되어서 좋다기보다 이미 너무나 아름다운 조각상이 큰 상처가 나듯 파손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각상이 원래부터 그리 예쁘고 멋지지 않았다면 파손이 된다한들 크게 신경이나 쓰일까요? 이미 멋진 외관을 갖고 있었는데 침식되니 더 극적으로 대비되며 숭고함마저 느껴집니다. 르네상스와 중세시기의 멋진 작품들을 보면서 느끼는 감흥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아름다움이죠. 르네상스 시기 최고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미켈란젤로가 만든 다비드상을 볼까요? 뚜렷한 이목구비, 선명한 식스팩, 손등과 팔뚝의 핏줄과 헤어스타일까지. 철저한 식단 관리와 운동을 병행한 프로 운동선수의 완벽한 몸매 아닌가요? 멋지고 경외감이 들지만 나와는 동떨어진 조각상의 모습에 어쩐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입니다. 반면 아샴의 작품에서는 아름다운 조각상의 부식이 세월의 무상함과 함께 고요히 스러져가는 인간의 얼굴에 오버렙됩니다. "그렇지 저게 바로 나와 같은 인간의 운명이지!"라고 감정이입을 하면서 말이죠. 우주와 생명이 마침내 도달하고야 마는 종착역. 그들도 나도 언젠가 사라지고 말 존재임이 분명하다는 사실이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거듭 부활하는 자

이 작품에는 어마어마한(?) 반전이 있는데요. 제목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로마의 침식과 개질의 흉상(1년)(Eroding and Reforming Bust of Rome(One Year). 침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재생/거듭남(reforming)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죠. 단순히 부서져가는 것만이 아니었다는 사실! 

침식된 조각상은 원래의 모습으로 진화(생성)를 거듭하다 처음의 침식된 모습으로 돌아와 다시 원래의 형상대로재생되기 시작합니다. 침식되어 모두가 없어지는 인생 무상의 서러운 작품인 줄 알았더니, 알고보면 복원과 희망의 메시지까지 주고 있다는 삼삼한 반전. 제목 뒤의 1년(One Year)은 이 NFT가 1년을 주기로 침식과 재구성이 반복되며 모양이 변하기 때문에 붙은 것입니다. 작품의 모양이 변한다니 신기하죠? 하지만 사실입니다. 작품의 모양이 실제로 변합니다. 1년을 주기로 하기 때문에 조각상 침식과 더불어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죠. 봄에는 분홍색 잎이 만발한 나무들이 드리워진 가운데 나비가 날아다니고 나무는 푸른 싱싱함을 유지합니다. 반면 가을에는 낙엽이 떨어지고 나무에도 서리가 내린 듯 하얀색으로 변합니다. 사계절이 매년 찾아오고 떠나듯 침식과 개질이 매년 거듭됩니다.  

이런 효과가 가능한 것은 기존 디지털 미디어 작품과 차별화되는 NFT아트의 특별한 기능 때문인데요. 바로 블록체인의 스마트 컨트랙트입니다. 스마트 컨트랙트를 통해 복수의 디지털 이미지나 영상이 일정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교체되도록 코딩을 한 것입니다. 아샴도 이 기능을 알게 되면서 NFT아트를 시작했다고 해요. 자신의 예술을 어떻게 NFT로 구현할지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존 예술에서는 불가능했던 표현이 블록체인을 통해 구현되면서 아샴의 예술이 총체적으로 관객들에게 전달된 것이죠.

침식 정도의 비교(위/아래)

상처에 돋은 새 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각상의 파괴된 부분에서는 핑크 빛의 무언가가 반짝거립니다. 바로 수정(크리스탈)입니다. NFT뿐만 아니라 실물 조각 작품들에서도 침식된 부분에 수정을 배치한 것을 자주 볼 수 있는데요. 수정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물과 만나면 점점 자라나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부식된 공간을 수정으로 채우는 것은 재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상처가 난 곳에 새 살이 나오듯 수정의 성질을 이용해 회복과 치유의 가능성을 상상케 하는 것이죠. 소멸과 함께 새로운 탄생을 목격함으로써 우리는 상실의 좌절감이 아닌 '변화의 원리'를 깨닫게 되는데요. 소멸과 재구성, 좌절과 희망의 순환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푸시킨의 시를 연상케 합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푸시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은 덧없이 사라지고

                                                   지나간 것은 또 그리워지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침식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 즐거운 날이 오리니 - 재구성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 미래 유물

모든 것은 덧없이 사라지고 - 허구의 고고학


이렇게 대입해보면 푸시킨 시의 감성과 아샴의 철학이 그럴듯하게 닮아 있지 않나요? 

감상은 자유니 마음껏 상상해 보자구요. 무엇을 상상하든 아름다움은 빼앗아 갈 수 없을 테니까요.

꽃처럼 피어난 수정

공간의 마술 - 디테일 대마왕

작품에서 조각상은 고고한 은유를 짊어지고 흥미로운 자태를 뽐냅니다. 그런데 이 조각상들을 빼고 배경만 집중해서 한 번 보세요. 뭐가 느껴지나요?

벚꽃이 흐드러진 숲이 보이는 고즈넉한 방, 천사가 내려올 듯 힘찬 햇살이 사선으로 뚫고 들어오는 동굴, 개구리가 우는 숲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연못.. 처음부터 '공간'을 주제로 한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데요. 작품에서 첫 눈에 띄는 주인공은 조각상이겠지만 여러차례 감상을 하다보면 점점 배경이 눈에 들어 옵니다. 평범해 보이는 자연의 배경은 커다란 조각상과 콜라보를 이루며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세련되기까지 합니다. 특히 Bust of Rome에 표현된 세세한 공간 연출을 관찰해 보면 그가 얼마나 건축과 공간에 애정이 많고 관심을 쏟는지 알 수 있습니다. 

Eroding and Reforming Bust of Rome (One Year) 갈무리

조각상 앞에 책이 두 권 있습니다. 두 권 중 한 권의 책은 돌아오자마자 다시 읽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려는 듯 책의 한쪽을 둥글게 말아 읽던 페이지를 열어두었군요. 마치 방금 전까지 옆에 놓인 방석에 누군가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죠. 다소 심심할 수도 있는 배경에 방석과 펼친 책만으로 작품에 생동감을 주고 온기를 불어 넣습니다. 사람의 흔적. 이 공간이 단순히 작품을 돋보이기 위함이 아닌 사람의 호흡과 기억이 머무르는 '현재성'과 '현장성'의 공간임을 암시합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쇠퇴와 재생의 무한한 순환을 나타내는 조각상과, 유한하지만 실재하는 우리들의 자취를 같은 공간 안에 밀도 높게 표현했습니다. 

또 의 내용은 보이지 않지만 펼쳐진 페이지에 드러난 색은 배경공간과 같은 톤의 갈색과 검은색 계열로 위화감이 전혀 없죠. 이런 디테일 장인같으니라고! 저 옆쪽 탁 트인 방의 한쪽 면에는 햇살을 가리는 차양막이 내려와 있어요. 작품의 아랫부분은 그림자로 다소 어둡게, 작품의 중간과 윗부분을 햇살이 비추도록 해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는 분위기가 되었어요. 마음 편히 힐링하면서 독서도 하고, 차도 마시고 싶어지지 않나요? 실제로 이런 곳이 있다면 가보고 싶을 정도로 아늑하고 정갈합니다. 

Eroding and Reforming Bust of Rome (One Year) 갈무리
Bust of Rome(가을)

조각상 옆에서 책을 읽던 그 사람은 작가 본인일 수도 있고 저와 여러분같은 관객(감상자)일 수도 있습니다. 아샴은 자신의 공간으로 관객을 초대했고 관객들은 어느새 주인공이 되어 작품 안팎을 드나듭니다. 우리를 관객으로 만드는 이 공간은 바로 아샴이 꾸민 전시장이자 미술관입니다. 


시간의 연금술 - 지구의 날과 화성의 날

Eroding and Reforming Digital Sculptures 컬렉션에는 3개의 작품이 있습니다. 이들은 각각 시간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제목에서 보이는 지구의 날, 72.6년, 화성의 날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제우스의 흉상 - Eroding and Reforming Bust of Zeus (Earth Day)

Eroding and Reforming Bust of Zeus(Dusk)

제우스의 흉상이군요. 제우스는 신들의 왕으로 하늘을 지배하며 우주를 주관하는데요, '지구의 날(Earth Day)'이라는 표현처럼 지구의 24시간을 기준으로 낮과 밤의 배경이 변합니다. 동일한 한 작품이 시간에 따라 변하면서 4가지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데요. 새벽 동틀 무렵, 정오, 황혼, 자정의 모습으로 하루 4번 변화합니다. 신들의 왕도 시간의 흐름은 피할 수 없나 봅니다. 그냥 보면 너무 밋밋할거라고 생각했는지 어지럽지 않은 정도로 시점을 살살 옮겨가면서 카메라 워킹(?)을 해주는군요. 또 잘 들어보면 시간대에 따라 개구리 소리, 새 소리, 귀뚜라미 소리 등 다른 사운드가 들려 더욱 실감납니다. 역시 디테일, 디테일! 

Eroding and Reforming Bust of Zeus의 네 가지 형태


아를의 비너스 - Eroding and Reforming Venus of Arles (72.6 Years)

Eroding and Reforming Venus of Arles (72.6 Years)

아를은 아프로디테라고도 불리는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입니다. 호메로스에 따르면 제우스의 딸이죠. 또 올림포스 12신 중 하나로 영어로는 금성(Venus)을 뜻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아를=아프로디테=비너스입니다. 아를은 본래 우라노스의 생식기가 바다에 떨어져 생성된 거품에서 태어났는데요. 르네상스 화가 보티첼리는 그 장면을 '비너스(아프로디테)의 탄생'이라는 그림에서 아프로디테를 조개껍데기 위에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이 얘길 하는 이유는 조각상 뒤에 있는 벽처럼 보이는 구조물 때문인데요. 어떤 이유로 뒤쪽의 다른 배경을 가리면서까지 벽을 만들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굳이 추측을 해보자면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첫 번째는 아프로디테의 조개껍데기를 빗살이 쳐진 벽으로 형상화했을 가능성이에요. 이 배경 공간도 비너스라는 이름에 비추어 금성일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는데요, 아프로디테가 바다의 거품에서 태어났지만 금성이라는 행성의 특성상 물이 없을테니 조개껍데기를 그대로 가져다 놓을 수는 없고 벽으로 대신 묘사한 것은 아닐까 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벽을 통해 침식 과정을 보다 눈에 띄게 하려 했을 가능성입니다. 이 작품은 아샴 작품 중 드물게 영상 작품이 아닌 고정된 이미지예요. 정적인 느낌이기에 침식과정이 확연히 보이지 않을 수 있죠. 게다가 72.6 Years라는 제목처럼 72.6년 동안 총 73개의 모습을 보여주며 진화하는데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천천히 변하니 변화과정을 알아보기가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뒤의 벽이 허물어지는 모습을 본다면 좀 더 실감나겠지요? '아를의 침식비교'이미지를 보면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비너스 상도 그렇지만 뒤의 벽의 철골이 삐죽삐죽 튀어나온 모양이 두드러집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그저 여러가지로 생각해보면서 재미를 찾아가는 것 뿐이죠.

그런데 왜 작품이 72.6년 동안이나 변화하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72.6년은 바로 지구인의 평균 수명을 의미합니다. 침식된 비너스의 재구성 기간을 인간의 평균 생애 주기와 동일하게 만든 것이죠. 비너스의 재구성은 시간이 지나도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을 나타낸 것일까요? 그럴리는 없겠지만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점점 아름다워진다면 어떨까요? 물론 이 작품이 만들어진 해에 태어난 사람들은 작품이 완전한 형태를 갖추게 되는 해에 평균적으로 생을 다한다는 것이 진실이지만 말입니다. 70년이 넘는 초장기적 시야와 인간 삶의 시작과 끝이라는 원초적 조건의 조합이 무서울 정도로 짜임새 있습니다. 작품과 인간이 시간적 평행 선상에서 함께 변한다는 점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이 작품은 한 개의 에디션만 발행되었습니다. 

아를의 비너스 침식비교(왼쪽/오른쪽)


멜포메네의 흉상 - Eroding and Reforming Bust of Melpomene (Martian Day)

Eroding and Reforming Bust of Melpomene (Martian Day)
Eroding and Reforming Bust of Melpomene (Martian Day)

멜포메네는 그리스 신화에서 예술분야 중 비극을 담당하는 여신으로 역시 제우스의 딸입니다. 멜포메네라는 말은 '노래하는 여인'을 뜻하는데요. 불행을 겪는 인간들에게 노래를 통해 힘을 주어 운명을 극복하고 승리하도록 도와준다고 합니다. 멋진 신이죠? 이 작품은 화성의 날이라는 제목처럼 '화성의 시간'을 기준으로 작품의 모습이 변하는데요. 화성에서는 지구와 달리 하루가 24시간 37분이라고 하는데요, 따라서 그 시간을 기준으로 하루 24번 모양을 바꿉니다. 조각상의 침식 정도와 햇살이 내려오는 위치가 달라지죠. 아샴다운 작은 디테일은 조각상 앞에 서 있는 작은 사람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요. 조각상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의 크기로 비추어 볼 때 조각상의 크기가 대략 가늠이 되죠? 그리고 작품이 변할 때마다 사람의 자세와 몸의 방향도 조금씩 달라지는데요, 조각상이 무너져 내릴 정도가 되니 두 다리를 벌리고 서 있습니다. 안타까움일까요 아니면 당당함일까요?

멜포메네의 흉상 침식 비교(왼쪽/오른쪽)

이처럼 침식과 재구성 컬렉션은 지구, 금성, 화성을 그리스 신에 빗대어 각각 고유한 시간의 주기를 나타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를 반복하는 작품들을 보며 한 발짝 떨어져 삶을 조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변화의 순간도 언젠가 끝이 날 것임을 직감하게 되죠.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끝이 있기에 오히려 더욱 소중해 지는 우리의 유한한 삶입니다. 


스마트한 예술은 미래를 달리고

아샴의 NFT작품 12개 중 7개에 자동차가 주요 소재로 등장할 정도로 아샴은 차를 좋아합니다. 특히 포르쉐와의 협업을 통해 차량 내부를 크리스털로 만들어 포르쉐 박물관과 미국, 영국 등에서 전시해 왔는데요. 모래, 석영, 셀레나이트(석고의 일종) 등의 지질학적 재료를 이용해 만들어 고고학적 속성을 드러냈습니다. NFT작품에 등장하는 차들은 역사적인 영화인 백투더퓨처(The Back to the Future), 월스트리트(The Wall Street) 등에 등장했던 페라리, 들로리언, 포르쉐 등의 차종으로 역시 차의 외관이 부식됩니다. 영화와 차에 대한 깊은 애정을 이번 작품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각 작품에 등장하는 차량들의 침식 기간은 해당 영화의 상영 시간을 기준으로 하는데요, 영화마다 상영 시간이 다르므로 각 작품들의 재생 주기 역시 다릅니다. 예컨대 작품 Eroding and Reforming E30의 경우 영화 월스트리트의 상영시간인 126분을, Eroding and Reforming DeLorean은 백투더퓨처의 상영시간인 116분을 기점으로 침식과 재구성이 반복됩니다. 

'Arsham Auto Motive' 전시 작품
Eroding and Reforming E30


두 가지 특이점

아샴은 인생에서 다수의 일반인이 겪지 않는 두 가지 상황을 겪습니다. 첫 번째는 아샴이 12살이던 1992년 허리케인 앤드류가 아샴의 집을 완전히 파괴한 사건입니다. 그 후 같은 자리에 다시 집을 지었는데, 당시의 경험이 오늘날 아샴의 '침식과 재생' 예술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파괴를 단순히 상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복원의 희망을 꿈꾸는 장소로 전환시킨 과정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듯합니다.  

QUARTZ(유튜브) 갈무리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색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려워하는 색맹이라는 점입니다. 때문에 그의 실물 조각 작품들에는 흰색, 회색, 검은색이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작품 활동에 있어 색채의 부족을 '결여'로 단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보기 때문에 어떤 대상에게서 일반인들과 다른 매력을 느낄 수도 있다고 얘기합니다. 또 색을 구분하지 못한 덕분에 그는 물질의 성질과 질감에 집중했고 화산재, 수정, 유리 등의 다양한 소재를 활용해 작품 활동을 이어갑니다. 특히 뜨거운 마그마에 의해 가루가 된 화산재를 이용해 작품을 창조함으로써 소멸을 오히려 생성의 재료로 삼습니다. 화산재로 만든 실물 작품에서도 침식과 재구성, 순환의 과정이 적용된 셈이지요. 

화산재, 수정, 투명석고 등으로 만들어진 실물 작품 'Broken Figure'(출처 : Designboom)

제약을 한계로 느끼지 않는 예술적 탐구와 호기심은 그를 NFT아트로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이 영민한 예술가는 블록체인의 장점을 흡수해 자신의 예술세계를 NFT로 확장시켰습니다. 공간과 조각을 입체적으로 감상하도록 3D영상으로 제작했으며 시간흐름에 따른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블록체인의 코딩을 활용했습니다. 

Eroding and Reforming Floating Sculptures


뇌섹남의 소름돋는 균형감각

그리스 신화를 차용한 스토리텔링과 세심한 연출, 심미적 아름다움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질 것 없는 작품들이 NFT로 부활했습니다. NFT작품들은 아샴이 이제까지 지나쳐온 모든 예술 분야, 즉 회화, 건축, 무대디자인, 조각, 영화 등의 총합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에서 현대, 미래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시간의 폭을 이용해 상상력을 부추기면서 대중성과 예술성을 고루 갖춘 작품들을 탄생시켰습니다. 조금만 알고 보면 누구나 즐겁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건축과 무대 디자인을 통해 습득한 연출력, 나아가 각종 미디어를 통한 소통 능력과 NFT아트를 하면서도 NFT시장에만 매몰되지 않는 균형감각은 그저 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 예술을 NFT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있었을 녹록치 않은 고민의 깊이와 블록체인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아샴의 작품들이었습니다. 



•니프티 게이트웨이 작품  https://www.niftygateway.com/@danielarsham/collections

•오픈씨  https://opensea.io/collection/dan-arsham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danielarsham/?hl=en

•트위터  https://twitter.com/DanielArsham

•웹사이트  https://www.danielarsh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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