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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라미 그리고 1천억을 번 예술철학자 - PAK(1)

by Fellas

Murat Pak(이하 Pak)은 The Lost Poet, Censored, The Merge 등 다양한 NFT 프로젝트를 선보여 온 크립토 아티스트이자 개발자입니다. Pak은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크립토 아티스트 중 한 명이지만 그의 이야기를 풀어 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Pak의 프로젝트는 그 진행 당시 직접 참여해 흐름을 따라가거나, 크립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으면 쉽게 와닿기 어려운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대중적이거나 트렌드에 영합하는 프로젝트라고 하기에도 어렵고 말이죠. 그럼에도 그를 빼고 크립토 아트를 논하는 것은 모네를 빼고 인상주의를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한 일입니다. 크립토 아트 본연의 맛(?)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프로젝트이므로 천천히 읽으며 따라가보면서 새로운 매력을 느껴보셨으면 합니다.

Pak 트위터 계정


디지털 퍼포먼스

현재까지 Pak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프로젝트의 규모를 고려해 볼 때 개인이 아닌 팀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의 프로젝트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가장 가까운 표현은 '디지털 퍼포먼스'라고 하면 될듯합니다. Pak에 대한 어떤 글에서 본 이 단어는 그야말로 딱 어울리는 정의였거든요. Pak은 여느 아티스트처럼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모든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한 채 크립토의 사상과 작동 원리를 담기 위해 디지털 이미지와 영상을 활용하죠.

Pak의 작품 Carbon

Pak은 블록체인을 통해 구축되는 디지털 세계의 본질을 다루며, 참여자로 하여금 스스로 체험하고 깨닫게 합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퍼포먼스이며 작품의 일부입니다.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혹은 그 프로젝트를 통해 생성된 작품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진행 과정에서 점점 뚜렷하게 그 의도를 알아차리게 되기 때문이죠.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서도 이 수수께끼 같은 미로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고민부터 되지만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지적 미로의 출구를 찾아 가는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도 있답니다.

방대한 규모로 진행되었던 Pak의 프로젝트 중 3가지 - The Merge, The Fungible, Censored - 를 중심으로 2편으로 나누어 살펴 보겠습니다.


The Merge

‘합병하다(Merge)’라는 뜻의 The Merge 프로젝트는 흰 색의 동그라미 이미지 하나를 판매한 것이 전부였어요. 하지만 개당 수십 만원에 달하는 동그라미 이미지를 프로젝트가 진행된 3일간 무려 28,983명이 구매했습니다. '대체 그걸 왜?'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하군요. 소셜미디어에서 3만 명의 팔로워를 모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동그라미 산다고 돈을 지불한 사람이 3만 명 가까이 되다니.

이 흰색 동그라미는 한 개당 약 30~50만 원으로 누구나 수량 제한 없이 살 수 있었는데요. 총 312,686개의 NFT가 팔리며 총 9,180만 달러(약 1,080억)를 벌어 들입니다. 현존 NFT 아티스트 중 가장 큰 매출 기록이었으며 역대 수익 합계에서도 1위를 차지합니다. 참고로 이 금액은 2018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생존 화가의 작품 중 가장 비싼 가격에 팔렸다는 '예술가의 초상'(1,019억 원) 보다 더 높은 금액이라 할 수 있어요. The Merge가 단일 작품이 아니기에 단순 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큰 금액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cryptoart.io/artists


적자생존

자 이제, 벌어진 입을 살포시 다물고 대체 왜 그렇게 인기가 많았는지 알아볼까요? Merge에는 간단한 규칙이 있는데요. 원을 산 개수만큼 원이 합해지면서(merge) 원의 크기가 커집니다. 하나의 원을 하나의 질량인 'Mass(이하 m으로 표기)'라고 부르는데, m을 많이 보유할수록 질량이 늘어나 원의 크기가 커진다는 개념입니다. 자신의 원을 크게 만들고 싶다면? 더 사면 됩니다.

공식 판매 기간 동안 원을 구매한 이후에도 2차 거래(본 판매 이후 구매자들끼리 직접 거래하는 P2P 시장)를 통해 다른 사람의 원을 추가로 구매해서 합병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동그라미를 10개 구매(보유)한 사람이 추가로 원을 사고 싶다면 다른 사람이 판매하고자 하는 원을 구매해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m의 개수에 다른 사람의 m을 더해 계속 원을 키울 수 있는 것이죠. 몇 개까지 살 수 있느냐고요? 돈만 있다면 개념상으로 무한히 살 수 있습니다.

예시) m 10 + m 7 = m 17

Merge의 규칙 / 큰 숫자의 색이 작은 숫자의 색을 지운다

여기에 몇 가지 규칙이 더 있는데요. m이 일정 개수에 도달하면 원의 색이 변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m을 더 많이 보유한(질량이 큰) 원이 m의 수가 적은 원을 합병할 경우, 더 큰 질량을 가진 원의 색으로 최종 선택됩니다. 노란색인 m10이 파란색인 m5를 합병했다면 최종 결과물인 m15는 큰 숫자의 색을 따라가므로 노란색이 되는 것이죠. 또 많이 구매할수록 '보너스 m'을 추가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을 쓸수록 더 많은 수의 m을 얻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마치 이자가 불어나듯이 말이죠. '돈이 많다=승리'의 공식을 심지어 이자 개념까지 포함해 친절하게(?) 알려 줍니다. Pak은 '합병'이라는 게임의 규칙을 만들고 관람객들을 먹고 먹히는 생존 게임에 참여시킨 셈입니다. 자본이 보다 많이 투여된 m이 상대적으로 적게 투입된 m을 합병해서 작은 m의 속성을 없애버리기 때문에 자본이 적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냉혹한 적자생존의 논리를 실감할 수 있다고나 할까요?

승자(합병하는 자)와 패자(합병당하는 자)를 가르는 속성을 '색'으로 설정한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는 자신만의 개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만의 색'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요. The Merge에서 상대의 색을 제거하는 것은 상대의 개성을 소멸시키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가장 작은 원 1개의 크기 / m(1)


욕망의 크기

크기가 큰 원을 보유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돈을 지불했다는 것인데 한편으로 희귀도가 높다는 뜻이기도 해요. 10억 원 이상의 큰 돈을 써가며 원을 만드는 사람은 극소수이지만 30만 원을 지불해 원을 만든 사람은 매우 많았기 때문이죠. 어느 분야나 그렇듯 블록체인에서도 희귀도는 가치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데요, 가장 희귀도가 높은 원은 가장 높은 가격으로 만들어 졌으며, 판매될 때도 가장 높은 금액으로 팔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원을 더 크고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경쟁적으로 구매했습니다.

12,149개가 합병된 m(12,149)

그렇게 해서 가장 큰 동그라미는 몇 개를 합병했을까요? 무려 12,149 개입니다. 그래서 원의 이름도 ‘m(12149)#1’이죠. 원 하나에 최저가였던 30만 원 정도로 단순 계산하면 한화 30억 원 이상의 자본이 투입됐을 것으로 추정돼요. 정확한 금액은 알 수 없지만 엄청난 금액을 쏟아부은 것은 분명합니다. merge라는 이름의 이 욕망의 전차는 1만 2천 개가 넘어서야 비로소 멈추었습니다.

가장 큰 m(12149)

이 프로젝트는 [돈을 많이 지불한다 > 희귀도가 높다 > 시장에서 인정받는다 > 더 큰돈을 번다]라는 NFT시장의 생리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어느 투자 수단이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NFT 시장은 큰돈을 보유할수록 큰 수익을 낼 수 있는 철저한 시장논리를 따릅니다. merge 프로젝트에서도 마찬가지로 큰 금액을 투자할수록 시장에서 더욱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동그라미가 생성돼요. 물론 가장 희귀한 원을 만들었다고 해서 투자금 대비 항상 더 높은 가격으로 팔릴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리스크가 있죠. 전형적인 '고위험, 고수익(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의 투자시장 논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 검은 동그라미의 가격을 알고 나니 왠지 더 예뻐고 사랑스러워 보이지 않나요? 누구도 쉽게 얻을 수 없는 명품 중의 명품으로 보이지는 않나요? 혹시 이 동그라미를 누군가 주겠다고 하면 여러분은 "그거 받아서 뭐 하게? 나도 그릴 수 있는데"라며 사양할 건가요? 아마 대부분은 갖겠다고 할 겁니다. 여러분은 동그라미의 가치를 알고 있기 때문이죠. 반면 그 가치를 모를 때는 단순한 이미지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겁니다. 이처럼 가치를 인식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는 가치 평가에 커다란 차이를 보일 수 있는데 구성원들의 평가와 시장의 합의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가치를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NFT의 가치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그건 종이의 양면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이게 뭐 대단한 거라고 비싼 돈을 주고 사?"와 "어머 이건 사야 해"라는 생각은 인식 전환의 문제일 뿐, 우리는 언제든 전자가 될 수도 있고 후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각자가 하는 것이겠죠.

Pak은 시장의 심리를 꿰뚫어 보고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먹고 먹히는 간단하면서도 잔혹한(?) 게임 속에 참여자들을 몰아넣고 그들로 하여금 NFT의 가치 생성과정과 시장논리를 체감하게 했어요. 프로젝트를 통해 돈을 버는 것조차 '설계자' Pak에게는 예술활동입니다.


단순화의 대가. "그림은 껍데기일 뿐이야"

NFT아트 시장에서는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대중들의 이목을 사로잡고 팬을 만들기 위해 작품들을 창작하고 있습니다. 화려하고 예쁘고 신비롭고 때로는 기괴한 아트들을 보며 컬렉터들은 취향에 따라 구매 버튼을 누르곤 하죠. 그런데 The Merge 에는 동그란 원 하나가 전부입니다. Pak은 단순화의 대가입니다. 형태도 단순할뿐더러 색도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세상을 말하려는 듯 검은색과 흰색으로만 구성된 경우가 많아요.

The Merge

모양은 단순하지만 Pak의 프로젝트는 과정이 복잡하고 설명도 많아서 의도를 파악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이에요. NFT와 블록체인에 대해 모른다면 더 이해하기 어려워서 잠시 설명을 덧붙여 볼게요. 'NFT로 만든다'는 것은 블록체인에 기록을 한다는 뜻인데요. 그 기록을 할 때 암호처럼 조합된 문자열의 형태로 기록을 하고, 그 문자열을 해시값이라고 불러요. 예를 들어 '3dadapaklike3dsdlol' 이런 식으로 암호처럼 보이는 문자와 숫자 조합의 나열이에요. 모든 NFT들은 모두 다른 해시값으로 기록이 되는데, The Merge의 동그라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Pak은 프로젝트의 이미지를 겉모습을 최대한 단순화시킨 동그라미 형태로 진행했어요. 누구나 만들 수 있는 모양이기에 디자인 면에서는 아무런 차별점을 가질 수 없죠. 반면 그 동그라미들의 블록체인 해시값은 서로 완전히 달라요. 1만 개의 동그라미 이미지가 있다 해도 블록체인에 각각의 해시값으로 기록되기 때문에 각자 고유의 가치를 갖기 때문이에요. 인간 존재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자아를 갖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블록체인에 해시값으로 고유한 정보가 기록되는 NFT


따라서 어떤 형태의 이미지든 블록체인에 기록되는 순간 블록체인의 속성에 종속되는 셈인데요. 우리가 NFT아트를 구매한다는 것을 매우 단순하게 표현하면, 그 작품이 기록된 블록체인의 문자열 한 줄을 사는 것에 불과해요. Pak은 겉모습을 단순화시켜 이미지에 대한 관념을 배제하고 NFT의 속살을 들여다보라고 주문합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Pak의 의도를 고민하면서 구매를 했는지는 의문입니다. Pak은 이미 거대한 상징자본을 축적한 아티스트였고 그 명성에 따른 투자수익을 기대한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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