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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llas Aug 03. 2024

동그라미 그리고 1천억을 번 예술철학자 - PAK(1)

Murat Pak(이하 Pak)은 The Lost Poet, Censored, The Merge 등 다양한 NFT 프로젝트를 진행해 온 크립토 아티스트이자, 개발자입니다. 솔직히 Pak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Pak이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대체로 직관적으로 느끼기 어렵고 복잡해서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죠. 트렌드에 영합하지도 않습니다. 대중적인 미학보다 철저히 크립토 정신을 좇고 블록체인의 기술적 본질을 드러내죠. 이게 대체 뭔가?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럼에도 크립토 아티스트 중 가장 큰돈을 벌었으며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팬덤도 상당하죠. 조오금 머리를 써가며 보아야 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한 번 도전해 볼까요?

Pak 트위터 계정

Pak은 'Archillect'라는 인공지능을 개발하기도 했는데, 트위터, 페이스북, 핀터레스트 등 소셜 미디어에서 사람들의 좋아요 등 반응을 고려해 이미지를 큐레이팅해 주는 인공지능 서비스예요. 다수의 사람들이 가진 취향과 최근의 관심사를 바탕으로 큐레이팅된 이미지를 직관적으로 볼 수 있죠. 이 서비스는 큰 인기를 얻어 현재 트위터에서 300만 팔로워를 확보하고 있으며, 일론머스크도 관심을 보인 바 있습니다.

Pak이 개발한 인공지능 archillect(트위터 계정)
Archillect가 찾아낸 이미지

디지털 퍼포먼스

Pak이 누구인지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어요. 프로젝트의 규모를 볼 때 개인이 아닌 팀일 것으로 추정이 돼요. 그의 프로젝트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가장 가까운 표현은 '디지털 퍼포먼스'라고 생각됩니다. Pak의 예술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한참 고민을 했는데 Pak에 대한 글에서 우연히 본 이 단어는 그야말로 예술적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정확한 네이밍이었습니다.

Pak는 여느 아티스트처럼 그림을 그리지 않아요. 사진이나 음악으로 예술 작품을 만들지도 않죠. '아름다움'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철학을 보여주기 위해 디지털 이미지와 영상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Pak의 작품 Carbon

대체로 블록체인과 NFT가 만들어가고 있는 디지털 세계의 본질에 관한 것이며, 참여자로 하여금 NFT세계를 체험하고 깨닫게 합니다. 그가 진행하는 프로젝트 과정 자체가 하나의 퍼포먼스입니다. Pak은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규모도 방대한데, 3가지 프로젝트 - The Merge, The Fungible, Censored - 를 중심으로 2편으로 나누어 알아볼게요.


The Merge

‘합병’이라는 뜻의 The Merge 프로젝트는 동그라미 이미지 하나가 전부였어요. 프로젝트가 진행된 3일간 무려 28,983명이 이 동그라미를 구매합니다. 대단하죠? 소셜미디어에서 팔로워 3만 명을 모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돈을 지불한 사람이 3만 명 가까이 되다니. 게다가 3일 만에 말이죠.

동그라미 한 개당 약 30~50만 원으로 누구나 수량 제한 없이 살 수 있었는데요. 총 312,686개의 NFT가 팔리며 3일 만에 9,180만 달러(약 1,080억)를 벌어 들입니다. 현존 NFT 아티스트 중 가장 큰 매출 기록이었으며 역대 수익 합계에서도 1위를 차지합니다. 참고로 이 금액은 2018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생존 화가의 작품 중 가장 비싼 가격에 팔렸다는 '예술가의 초상'(1,019억 원) 보다 더 높은 금액이라 할 수 있어요. 정말 입이 떡 벌어지지 않을 수 없네요.  

cryptoart.io/artists


규칙 - 적자생존

자 이제, 벌어진 입을 살포시 다물고 대체 왜 이렇게 인기가 많았는지 알아볼까요? Merge에는 간단한 규칙이 있어요. 원을 산 개수만큼 원이 합해지면서(merge) 크기가 커집니다. 하나의 원은 하나의 질량인 Mass(이하 m)라고 부르는데, m을 많이 보유할수록 질량이 늘어나 원의 크기가 커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원을 크게 만들고 싶다면? 그냥 더 사면됩니다. 그런데 처음에 동그라미를 10개 구매한 사람이 추가로 더 사고 싶을 수도 있겠죠? 그러면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m의 개수에 추가된 m의 수를 합해 계속 원이 커지며 합병됩니다. 살수록 무한히 합해지는 거죠.

예시) m 10 + m 7 = m 17

Merge의 규칙 / 큰 숫자의 색이 작은 숫자의 색을 지운다

m이 일정 개수에 도달하면 원의 색이 변하게 돼요. m을 더 많이 보유한(질량이 큰) 원이 m의 수가 적은 원을 합병할 경우, 더 큰 질량을 가진 원의 색으로 선택됩니다. m10의 색이 노란색이고 파란색인 m5를 합병했다면 m15는 노란색이 되는 식이죠. 또 많이 구매할수록 '보너스 m'을 추가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을 쓸수록 더 높은 수의 m을 얻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어요. Pak은 '합병'이라는 게임의 규칙을 만들고 관람객들을 먹고 먹히는 생존 게임에 참여시켰어요. 돈이 더 많이 투여된 m이 돈이 적게 투입된 m을 합병해서 작은 m의 속성을 없애버리기 때문에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 서바이벌 게임과 다를 바가 없죠. '돈이 없으면 사라질 수 있다'라는 무지막지한 자본주의 힘의 논리를 실감할 수 있어요.

가장 작은 원 1개의 크기 / m(1)


욕망의 크기

크기가 큰 원을 보유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돈을 지불했다는 것이고 희귀도가 높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10억을 지불하는 사람이 30만 원을 지불하는 사람보다 훨씬 적을 테니까요. NFT에서 희귀도는 가치를 결정하는 주요 요소인데요, 가장 희귀도가 높은 원은 가장 높은 가격으로 팔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원을 더 크고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경쟁적으로 구매했습니다.

12,149개가 합병된 m(12,149)

그렇게 해서 가장 큰 동그라미는 몇 개를 합병했을까요? 무려 12,149 개입니다. 그래서 원의 이름도 ‘m(12149)#1’이죠. 원 하나에 최저가였던 30만 원 정도로 단순 계산하면 한화 30억 원 이상의 자본이 투입됐을 것으로 추정돼요. 물론 정확한 금액은 알 수 없지만 엄청난 금액을 쏟아부은 것은 분명합니다. merge라는 이름의 욕망의 전차는 1만 2천 개가 넘어서야 비로소 멈추었습니다.

가장 큰 m(12149)

이 프로젝트는 [돈을 많이 지불한다 > 희귀도가 높다 > 시장에서 인정받는다 > 더 큰돈을 번다]라는 NFT시장의 생리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어느 투자 수단이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NFT 시장은 큰돈을 보유할수록 큰 수익을 낼 수 있는 철저한 시장논리를 따릅니다. merge 프로젝트에서도 마찬가지로 큰 금액을 투자할수록 시장에서 더욱 가치를 인정받는 동그라미가 생성돼요. 물론 가장 희귀한 원을 만들었다고 해서 투자금 대비 항상 더 높은 가격으로 팔릴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리스크가 있죠. 전형적인 '고위험, 고수익(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의 투자시장 논리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 검은 동그라미가 엄청난 금액을 투입해 탄생한 동그라미라는 것을 알고 난 후 갑자기 뭔가 예뻐 보이고 사랑스럽지 않나요? 누구도 쉽게 얻을 수 없는 최고급 명품 중의 명품 작품으로 보이지는 않나요? 이미지는 그대로인데 말이죠. 혹시 이 동그라미를 누군가 주겠다고 하면 여러분은 "그거 받아서 뭐 하게? 나도 그릴 수 있는데"라며 무시할 건가요? 아마 99.9%의 확률로 받겠다고 할 겁니다. 독자 여러분은 이 동그라미가 돈으로 직접 환산될 경우 가치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기 때문이죠. 이 심쿵한 상상을 이론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어떤 대상의 본질적 가치는 외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그 시장에 참여한 구성원들의 합의와 평가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명품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야 가치가 있는 것처럼 작품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가치가 생기죠. NFT의 가치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그건 종이의 양면에 불과해요. "이게 뭐 대단한 거라고 비싼 돈을 주고 사?"와 "어머 이건 사야 해"라는 말은 인식 전환의 문제일 뿐, 우리는 언제든 전자가 될 수도 있고 후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각자가 하는 것이겠죠.

Pak은 시장의 심리를 꿰뚫어 보고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먹고 먹히는 간단하면서도 잔혹한(?) 게임 속에 참여자(구매자)들을 몰아넣고 그들로 하여금 NFT의 가치 생성과정과 시장논리를 체감하게 했어요. 프로젝트를 통해 돈을 버는 것조차 '설계자' Pak에게는 예술활동입니다.


단순화의 대가. "아트는 껍데기일 뿐이야"

NFT아트 시장에서는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대중들의 이목을 사로잡고 팬을 만들기 위해 작품들을 창작하고 있습니다. 화려하고 예쁘고 신비롭고 때로는 기괴한 아트들을 보며 컬렉터들은 취향에 따라 구매 버튼을 누르곤 하죠. 그런데 The Merge 에는 동그란 원 하나가 전부입니다. Pak은 단순화의 대가입니다. 형태도 단순할뿐더러 색도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세상을 말하려는 듯 검은색과 흰색으로만 구성된 경우가 많아요.

The Merge

모양은 단순하지만 Pak의 프로젝트는 과정이 복잡하고 설명도 많아서 의도를 파악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이에요. NFT와 블록체인에 대해 모른다면 더 이해하기 어려워서 잠시 설명을 덧붙여 볼게요. 'NFT로 만든다'는 것은 블록체인에 기록을 한다는 뜻인데요. 그 기록을 할 때 암호처럼 조합된 문자열의 형태로 기록을 하고, 그 문자열을 해시값이라고 불러요. 예를 들어 '3dadapaklike3dsdlol' 이런 식으로 암호처럼 보이는 문자와 숫자 조합의 나열이에요. 모든 NFT들은 모두 다른 해시값으로 기록이 되는데, The Merge의 동그라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Pak은 프로젝트의 이미지를 겉모습을 최대한 단순화시킨 동그라미 형태로 진행했어요. 누구나 만들 수 있는 모양이기에 디자인 면에서는 아무런 차별점을 가질 수 없죠. 반면 그 동그라미들의 블록체인 해시값은 서로 완전히 달라요. 1만 개의 동그라미 이미지가 있다 해도 블록체인에 각각의 해시값으로 기록되기 때문에 각자 고유의 가치를 갖기 때문이에요. 인간 존재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자아를 갖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블록체인 해시값이 기록되어 NFT가 되는 예시


따라서 어떤 형태의 이미지든 블록체인에 기록되는 순간 블록체인의 속성에 종속되는 셈인데요. 우리가 NFT아트를 구매한다는 것을 매우 단순하게 표현하면, 그 작품이 기록된 블록체인의 문자열 한 줄을 사는 것에 불과해요. Pak은 겉모습을 단순화시켜 이미지에 대한 관념을 배제하고 NFT의 속살을 들여다보라고 주문합니다. 껍데기에 집착하지 말고 NFT와 블록체인이 무엇인지 조금 본질적으로 접근해 보자는 것이죠. 물론 많은 사람들이 실제 Pak의 의도를 고민하면서 구매를 했는지는 의문입니다. Pak은 이미 거대한 상징자본을 축적한 아티스트였고 그 명성에 따른 무지성 투자수익을 기대한 사람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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