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와 선택의 기로
데미안은 2016년부터 제작해 온 실물 작품 ‘The Currency’를 NFT로 전환하며 NFT 세계에 데뷔합니다. The Currency시리즈는 얼핏 다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모두 다릅니다. 제목도 작품마다 제각각이기 때문에 고유의 차별화된 가치가 있어 자신이 소유한 작품에 더욱 애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비슷하게 생긴 작품이라도 마음에 드는 제목을 가진 작품이 있다면 더 높은 가격으로 살 수도 있을 겁니다.
The Currency 시리즈 The Currency 이 프로젝트는 종이에 그려진 실물 원본 1만 개와 각각 매칭되는 NFT 1만 개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 NFT 1만 개는 개당 2천 달러로 모두 판매되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묘미는 지금부터입니다. 데미안은 NFT를 구매한 사람들에게 1년간 고민을 해보고 2022년 7월까지 작품의 실물과 NFT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합니다. NFT구매자들은 그대로 NFT만 가질 수도 있고, 실물을 원한다면 NFT를 없애고 실물을 가지도록 선택권을 준 것입니다. 구매자들은 꽤나 갈등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과연 어떤 선택을 더 많이 했을까요?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구매자라면 실물과 NFT 중 어떤 것을 선택하실 건가요? 선택되지 않은 하나는 무조건 소각된다는 전제하에서 말이죠.
4851 : 5149?
짜잔. 1년 후 결과가 나왔습니다. 4851 VS 5149. 어느 쪽이 많을까요? 구매자 중 4,851명은 NFT 작품을, 5,149명은 종이로 제작된 실물을 선택했습니다. 얼핏 비슷한 비율로 선택한 것 같죠? 하지만, 1만 개 중에 1천 점은 처음부터 데미안 본인이 자신의 소유로 할당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데미안은 자신이 소유한 1천 개 전부를 NFT로 선택해서 자신의 의견을 간접적으로 표명합니다. 결과적으로 NFT를 선택한 사람은 3,852명, 실물을 선택한 사람은 5,150명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또 한 명이 여러 개의 NFT를 보유한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마저도 정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실물을 선택한 사람이 많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NFT보다 실물 작품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Artforum.com 어찌 됐건 NFT를 선택한 사람들의 1:1 매칭이 되는 실물 작품은 모두 소각되었습니다. 데미안은 직접 방화복을 입고 여러 작업자들과 함께 수백 개에 달하는 작품을 소각로에 넣으며 이 장면을 소셜 미디어로 생중계합니다.
작품들을 소각하며 데미안은 이렇게 말합니다.
(NFT와 실물 중) 무엇이 더 가치가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아직 모르겠어요.
(NFT와 실물 중) 무엇이 더 좋은 것일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여전히 몰라요.
하지만 NFT가 실물 작품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는 어떤 것이 더 가치 있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자신이 보유했던 1천 개를 모두 NFT로 선택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내비쳤습니다. 말은 신중하게, 행동은 확실하게. 데미안의 영리함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호기심 많은 예술사업가의 가치 실험
그의 의도는 명확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가치를 측정하거나 비교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흔한 수단이 바로 The Currency, 즉 화폐이고, 이 화폐로 표현된 ‘가치’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NFT의 가치를 실물과 비교해 보고 무엇이 진정한 가치인지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사실 2016년 The Currency가 실물작품으로 만들어질 때에는 "언제 예술이 변화하여 화폐가 되고 언제 화폐가 예술이 되는지, 바로 그 화폐와 예술의 경계를 탐구한다"라는 주제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술이 화폐가 되고 화폐가 예술이 된다'는 것은 예술과 화폐 사이의 치환, 즉 '거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가장 손쉽게 예술 작품이 거래되는 NFT시장의 성격과 맞아떨어지는 설명입니다. 당시 NFT시장의 존재 자체가 전무하다시피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NFT를 염두에 두고 제목을 붙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마치 NFT아트를 수년 전부터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절묘하게 어울리는 제목이 되었습니다. 우연이라 해도 여러 모로 뛰어난 센스를 갖고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무엇이 원본인가
여기에는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바로 ‘원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그가 수년 동안 작업해 온 실물 작품들에는 각각의 제목과 번호가 매겨져 있을 뿐 아니라 작가의 도장, 사인, 워터마크 등 원본을 증명하는 장치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퍼포먼스를 통해 원본이라고 인증된 실물이 불태워지고 NFT만 남게 됩니다.
데미안 허스트의 도장이 찍힌 실물 작품 데미안은 이에 대해 "물리적 버전을 태워서 이러한 물리적 예술작품을 NFT로 변환하는 작업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상 둘 다 원본이고 자신은 NFT를 선택했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 않나요? 앞서 소개한 '거리에서 블록체인으로 - 뱅크시'를 읽으신 분은 기억하실 겁니다. 뱅크시의 실물 작품을 소각해 NFT로 전환하면서 가치가 실물 작품에서 NFT로 옮겨갈 것이라고 했었죠? The Currency는 그보다 훨씬 큰 규모와 드라마틱한 장면으로 철저히 기획된 데미안 버전의 아트 쇼이자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은 각자의 몫으로
NFT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은 NFT의 가치에 대해 의구심을 지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우스 우클릭으로 저장해도 되는 디지털 파일을 비싼 돈을 들여 사고파는 것은 그저 돈 욕심에 눈이 먼 투기성 자본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데미안은 이러한 대중의 심리를 훤히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은 확고히 NFT아트의 가치를 지지하면서도 유난을 떨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는 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비교해 보라며 답을 슬쩍 떠넘기고 같이 더 생각해 보자고 합니다. NFT아트가 가진 과도기적 성격을 인정하면서, 새로운 예술이 탄생할 때마다 생기기 마련인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화려한 퍼포먼스 쇼와 함께 던지며 대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습니다. yBa 초창기 시절 자신의 전시를 직접 기획하며 찰스 사치의 눈에 띈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죠. 200억 원이 넘는 수입은 그저 덤일 뿐입니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오늘날에도 NFT아트에 도전하고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현대미술 작가 중 데미안만큼 NFT아트 세계에 부드럽게 연착한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그대로 활용하면서 말이죠. 사안의 본질을 간파하는 통찰력,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비즈니스 감각과 치밀한 기획력, 확신이 생기면 낯선 분야의 리스크마저 정면 돌파해 버리는 과감함까지. 어떤 분야의 일을 했어도 성공했을 것 같은 부러운 능력입니다. 어쨌거나 The Currency는 이처럼 성공한 프로젝트로 일단락되었는데 데미안은 여전히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듯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무엇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나요?
• The Currency NFT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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