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이하 데미안)는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죠. 유명한 만큼 그에 대한 자료와 글들은 이미 많이 나와 있지만, 그가 진행했던 NFT 프로젝트 ‘The Currency(화폐)’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해요. The Currency는 기존 작품 활동의 연장선에서 진행된 만큼 데미안이 그동안 진행해 온 작품 활동을 토대로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이 많습니다. 데미안 허스트가 어떤 예술을 해왔고, 자신의 원래 작품들을 어떤 방식으로 NFT로 전환했는지를 보면 데미안이 괜히 유명한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과정만 따라가 봐도 덩달아 똑똑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죠. 데미안이 그 명석한 두뇌를 NFT아트에 어떻게 적용했는지 한 번 볼까요?
죽음, 돈 그리고 예술
NFT아트를 보기 전에 데미안이 어떤 예술가인지 대략 알아볼게요. 우선 논란이 많습니다. 작품의 주제가 대체로 ‘죽음’인데 ‘실제 죽음’을 전시해 사람들에게 시각적인 충격을 주죠. 죽은 상어를 포름알데히드에 넣어 생생한 상어의 생전 모습을 보여주거나 소를 절반으로 갈라 시체 내부를 공개하는 방식입니다. 실제 사람의 두개골을 다이아몬드로 장식해 팔기도 했습니다. 죽음이라는 소재는 예술에서 아주 흔하지만 영혼이 떠난 사체를 실제로 이렇게 적나라하게 전시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너무나 자극적인 소재와 방법 때문에 그의 전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죠.
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 Mother and Child (Divided)
데만안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라는 것을 예상했을 겁니다. 하지만 데미안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과감합니다. 논란을 예상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다면 꼭 해냅니다. 돈을 벌 수 있다면 더욱 적극적입니다. 데미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예술은 비평보다 구매자가 필요하다.” 구매자가 생기려면 잠재 고객이 많아야 하고, 잠재 고객이 많으려면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시켜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려면 아무래도 자극적일 수밖에 없겠죠. 물론 그의 예술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닙니다. 'CHERRY BLOSSOMS'처럼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작품들도 있습니다. 같은 사람이 만든 작품이 맞나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죠.
CHERRY BLOSSOMS 비즈니스 예술가
예술로 돈을 벌려면 아주 뛰어난 사업 수완이 있거나 운이 따라야 할 겁니다. 예술로 돈을 버는 일은 어렵습니다. 우리가 이름이라도 들어 본 아티스트들은 0.01%에 속하는 스타 작가일 가능성이 높죠. 예술가가 돈을 벌면 예술의 가치를 훼손할 것만 같은 편견과 예술 시장 규모의 한계 등으로 많은 예술가들은 여전히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기도 해요. 한편으로는 성공을 하게 되면 매우 큰 부와 명예가 따르기도 합니다. 피카소와 앤디 워홀처럼, 그리고 데미안 허스트처럼 말입니다.
Artist As Rock Star | Sep. 15, 2008 | TIME 데미안은 5천억 원에 육박하는 부를 거머쥐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사업가로 보기도 하죠. 단순히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가 매니지먼트 업계 출신의 비즈니스 매니저를 고용하면서 더욱 큰돈을 벌었고, 본격적인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도 찰스 사치라는 영국 미술계의 초대형 컬렉터이자 갤러리 소유자의 후원을 받으면서부터였기 때문입니다. 찰스 사치는 현대 미술 작품을 엄청나게 수집했는데 그가 세운 사치 갤러리는 현대 미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어요. 데미안은 영국 현대 미술의 부흥기를 이끈 예술가 집단인 yBa(young Britich artists)의 주요 멤버였는데 뛰어난 기획력으로 동료들과 함께 전시회를 열었고 이들의 활동을 눈여겨보던 찰스 사치가 그들의 작품을 수집하며 그들의 인연은 시작됩니다. yBa에는 데미안 허스트, 마크 퀸(Marc Quinn),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 등 우리나라에도 꽤나 알려져 있는 작가들이 포함되어 있고 현재는 영국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가의 예술가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습니다.
데미안 허스트(오른쪽)와 찰스 사치(왼쪽) | The guardian 찰스 사치는 벤처 투자자(VC)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떡잎이 남다른 초기 예술가를 후원하고 작품을 수집한 후 세계 최대 광고회사(Saatchi & Saatchi)를 키워냈던 마케팅 역량으로 흥행에 불을 지피는 것입니다. 데미안은 사치의 든든한 후원으로 본격적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는데 후원을 받는다는 것은 후원자에 대한 책임을 의미하기도 하므로 비즈니스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런 데미안 허스트가 NFT에도 진출합니다.
궁금한 건 못 참지
돈도 벌 만큼 벌었고 영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국민 예술가로서 명예를 누리는 그가 왜 NFT를 시작한 걸까요? 그는 아마도 몹시 궁금하지 않았을까요? 사람들이 자신의 실물 작품과 NFT 중에 어떤 것을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할지 말입니다. 또 자신의 작품을 NFT로 전환하면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지, 기존 예술계에서는 이미 너무나 유명한데 새로운 예술 세계인 NFT아트에서도 '내가 통할지' 궁금하지 않았을까요? 다양한 실험적 예술을 시도해 온 데미안은 역시 일반인에게 낯선 영역인 NFT에서도 뭔가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게다가 2021년 광풍처럼 몰아친 NFT시장의 성장은 비즈니스 감각이 남다른 데미안에게 새로운 시장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NFT작품 하나가 800억 원 가까이 판매되는 기록을 세우면서 시장의 열기를 느꼈을 것입니다.
동아일보 2022.03.21 데미안이 자신의 작품 제작 과정을 360도 동영상으로 촬영하면서 직접 설명을 할 정도로 기술 친화적이라는 점도 NFT 여정을 시작한 또 다른 이유일 수 있습니다. NFT아트는 다른 예술 분야에 비해 특히 기술과 더욱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블록체인뿐만 아니라 암호화폐로 거래를 하거나 로열티를 설정하거나 새로운 마켓 플레이스를 이용해야 하는 등 다양한 기술적 장벽이 있는데 오히려 그에게는 호기심에 불을 댕기는 요소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360도 카메라로 자신의 작업 과정을 공개한 데미안 허스트(아래 유튜브 링크 참고) 그뿐이 아닙니다. 2021년은 같은 영국의 비주류 예술계 슈퍼스타인 뱅크시의 작품이 NFT로 만들어지며 큰 화제가 된 해입니다. 영국 최고 권위의 미술상 터너상을 수상한 주류 예술의 대표주자이자 언제나 주도적으로 예술 시장을 개척해 온 데미안이 가만히 있을 리 없죠? 뱅크시의 작품이 NFT로 만들어진 4개월 후인 2021년 7월, 데미안은 직접 NFT 프로젝트를 론칭합니다. 바로 ‘The Currency’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