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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낙하 Nov 22. 2022

낡은 당신에게

글스터디 '항해' 3회차 - 노래를 듣고 글쓰기

임의로 주어진 노래를 듣고 글을 쓰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지정곡 : https://www.youtube.com/watch?v=KBtk5FUeJbk

2회차의 글과 세계관을 일부 공유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아닙니다.

세계관만을 차용한 별개의 글로 생각해 주세요.




  낡디 낡은 방에서 눈을 뜹니다. 색이 바래고 곳곳에 곰팡이가 번진 낡은 벽지, 지난여름의 장마로 울어버린 낡은 천장, 오래되어 안쪽에 먼지가 내려앉은 천장 조명과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진 데다 다소 뒤틀려 여닫을 때마다 힘을 주어야 하는 나무로 된 낡은 문. 겨울만 되면 바깥바람이 들고, 서리가 얼고 녹기를 반복해 눈물이 흐르는 낡은 유리창. 색이 바랜 헌 옷가지와 군데군데 해진 헌 운동화, 헌 시계. 낡은 의자, 낡은 책상, 낡은 벽시계와 낡아빠진 시간. 촌스러운 자수가 새겨진 오래된 이불과 삐걱거리는 철제 침대, 그리고 그 위에 웅크리고 누운 허름한 나는 어쩌면 이곳에서 가장 낡은 존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창 밖에서 들려오는 고물 트럭의 확성기 소리, 하교 시간을 맞이하여 삼삼오오 떠들며 귀가하는 학생들의 웃음소리, 벽을 타고 넘어온 세탁기 돌아가는 진동음, 낡아빠진 동네, 온통 헌 것뿐인 단칸방 침대에 누워 빛바랜 추억들을 세어 봅니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추울 것 같습니다. 10월인데도 난방을 하지 않은 방엔 서늘한 냉기가 돕니다. 두꺼운 이불을 한껏 끌어당긴 나는 애벌레처럼 웃다, 누에고치가 되어 울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aipotu 사의 주식은 상한가를 찍었다고 합니다, 메리 틴케이스인지 뭔지 하는 걸 만들어 체험자를 뽑는다고 합니다. 책을 넣으면 행복한 결말을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가당치도 않지요. 고작 틴케이스 따위로 결말이 바뀔 것이라면 세상에 불행한 것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곳에 저를 넣으면 저도 행복할 수 있을까요? 당신이 있을 적에 그런 것이 있었다면, 그래서 당신을 넣을 수만 있었다면 당신은 행복했을까요?


  아니요, 당신은 점성술 따위 과거의 잔재라며 화를 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누구보다 새것을 좋아했으니까요. 채널을 돌려도 시답잖은 이야기들 뿐입니다. 폭탄이 펑펑 터지는 전쟁 영화,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나누며 깔깔대는 예능 프로그램 따위들. 텔레비전은 수도 없이 번쩍대며 새로운 장면을 비춥니다. 어두운 방 안에 텔레비전이 번쩍번쩍, 눈이 부시게 빛납니다.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당신이 사라진 뒤 나의 세상은 끝없는 여름 속에 갇힌 것만 같습니다. 차가운 계절이 오고, 창틈을 타고 넘어온 때 이른 겨울바람이 방 안을 가득 채워도 내 마음속은 뜨겁게 불타올라 홧홧한 통증마저 느끼게 만듭니다. 당신이 너무 눈부셔서 숨을 쉴 수 없을 것만 같다는 착각도 듭니다. 눈부시게 깜빡이는 텔레비전 탓으로 하지요, 두꺼운 이불 탓으로 하지요. 머릿속이 소란스러워 견딜 수 없습니다. 당신이 저를 부르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요 이것도 다 저의 상상이겠지요, 압니다. 당신은 내가 너무 예민하다고 했지요, 내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민하기까지 해서 당신을 피곤하게 만든다고 했지요.


   당신은 내가 너무 민감하다고, 신경질적이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옳고 나는 언제나 틀렸습니다. 당신은 내가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서 세상은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며 다그쳤지요. 나는 마구 흔들리는 요람 속에 홀로 남겨진 아기처럼 울었습니다. 내 세상의 전부는 당신이었고 당신이 나의 전부였으니까요.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을 손에 쥐고, 마치 목에 줄이 매인 강아지를 다루듯 저를 어르고 달랬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사로잡힌 채 불타는 여름처럼 환하게 빛났습니다. 당신은 나를 가지고도 행복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당신은 언제나 새것만을 바랐으니까요. 당신은 반짝거리는 것만 좋아했습니다. 새것만 좋아하는 당신이 내게 질려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까요? 나를 버리고 당신은 행복해졌을까요?


  나는 당신을 떠나보내고 통제권을 잃어버렸습니다. 나를 통제하던 당신은 사라졌고 나는 혼자가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 매여 지낸 강아지가 자유를 모르듯, 나는 더 이상 스스로 통제하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홀로 남은 방 안에서 찬란한 여름처럼 빛나던 나는 제압할 수 없는 불길처럼 거세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당신을 떠나보내고 나는 혼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나를 통제할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바깥의 사람들은 저마다 행복한 듯 떠들고 웃고 잇습니다. 저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지요. 당신이 떠나고 나는 이토록 홧홧한 가슴을 안고 방 안에서 고치처럼 누워있습니다. 언젠가는 고치가 되어 사라질 수 있을까요. 나를 떠나 당신은 행복하신가요. 나는 불타올라 사라질 고치일 따름인데도.


  그래요, 이 모든 것은 당신의 탓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신은 새것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언제나 새것을 찾아 헤맸지요. 새 옷, 새 핸드폰, 새 컴퓨터, 새 시계, 새 구두, 새 남자 친구. 당신은 다른 반짝거리는 것을 찾아 떠났습니다. 나의 마음에 불을 지른 것도 당신이었고, 나를 빛나게 한 것도 당신이었고, 그 빛에 못 이겨 불타오르게 한 것도 당신입니다. 그래요, 당신을 원망한다면 나는 더 이상 타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은 당신의 탓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신이 나를 낡아빠진 헌 것으로 만들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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