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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 Jun 25. 2024

아빠에 대한 마음 (1)

다른 사람들에겐 그다지 의미가 없을 것 같지만 나를 흠칫 놀라게 하는 물건이 있다면 하나는 바늘이고, 하나는 비타민 음료다. 그리고 어쩌면 비슷한 아픔을 떠올릴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는 물건이 있다면, 하나는 파리채고 하나는 각목이다.


아빠에게 처음 맞은 날이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시계열을 거꾸로 해서 기억을 따라가면, 그 끝에는 방구석에서 울면서 떨고 있는 어린 내가 있다. 내 옆에는 같이 울며 떨고 있는 오빠와 여동생이 있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파리채를 들고 소리를 지르는 아빠가 있다. 아빠는 주로 파리채의 딱딱한 뒷부분으로 우리를 때렸다. 그 장면에 남동생은 없는 걸로 봐서 아마도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인 것 같다. (참고로 우리 가족은 여섯 식구다. 아빠, 엄마, 오빠, 나, 여동생 그리고 남동생.)


원인은 '바늘'때문이었다. 원인 제공자는 나였다. 실타래에 비스듬히 꽂혀 있는 바늘을 당겼더니 바늘이 쑤욱, 빠졌다. 실로 단단하게 싸매진 바늘이 결을 헤치고 나오는 그 느낌이 좋았던 것 같다. 나는 다시 바늘을 실타래 속에 밀어 넣고 힘을 주어 당겼다. 그럼 다시 바늘이 빠졌다. 쑤욱, 하는 느낌과 함께. 그렇게 혼자 바늘을 꽂았다 뺐다하는 놀이를 끝내고 아무렇게나 바늘을 꽂아 둔채 떠났다. 그게 내 슬픈 기억의 시작으로 남게 될 줄은 몰랐다. 얼마 뒤 아빠는 바늘을 누가 건드렸냐고 소리질렀다. 그리고 오빠와 나, 여동생 우리 셋을 구석으로 몰아 넣었다. 나는 파리채를 휘두르는 아빠가 무서워서 자수하지 않고 우물쭈물 거렸다. 파리채가 날라왔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그랬다고 잘못했다고 빌었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빠는 자수 후에도 나와 오빠, 동생을 똑같이 때렸다. 연대책임의 원인 제공자였던 나는 파리채 자국이 벌겋게 달아오른 팔을 만지는 척하며 오빠와 동생의 눈을 피했다. 그러나 아직도 미스테리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어린이가 바늘을 만지면 위험하다는 것을 각인시켜 주기 위한 경고였을까? 그러나 말로 훈육하기엔 내가 너무 큰 잘못을 한 것일까? 자수를 안한다고 그렇게 때렸으면서, 막상 자수를 했을 때도 왜 경감없이 똑같이 욕을 하며 때렸을까? 바늘과 아무 상관 없는 오빠와 동생은 왜 맞아야 했을까? 아직까지도 나는 바늘을 볼 때면 금기된 무언가를 마주하듯 마음이 불편하다.


비타민 음료도 미스테리긴 마찬가지다. 그날은 유독 더웠던 걸로 기억한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왔을 , 냉장고에는 비타민 음료  박스가 있었다. 집에 방문한 손님이 주고  것이었다. 손바닥에  감기는 사이즈의 유리병 어찌나 시원한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하나를 꺼내 마셨다. 그리고 그날 저녁 대가를 치뤄야했다. 아빠는 누가 비타민 음료에 손을 댔냐며 소리질렀다. 동생은 내가 먹는  봤다고 바로 대답했다. 그땐 동생이  미웠는데 지금와서 생각하면 동생에게도 아빠에 대한 데이터가 쌓여 있었을 테고,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는  동생 입장에서는 최선이었던 것이. 우리 남매가 콩가루가  데에는 아빠에 대한 공포가  몫을   같다. 아무튼 그날, 아빠의 손에 잡힌 것은 각목이었다.


나도 참 문제였던 게 그렇게 혼쭐이 났으면 비타민 음료라면 경기를 일으키는게 상정인데, 어린 마음에 그 시원하고 신기하게 시그러운 맛이 아른거리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땐 새 박스였으니 바로 티가 났던 거고 지금은 여러 개가 비워져 있으니 아빠도 몇 개가 남았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 않을까, 혼자 가설을 세웠다. 비타민 음료를 하나 가져와 커튼 뒤에 숨어서 몰래 마시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커튼을 확 걷었다. 엄마였다. 엄마는 거기서 뭐해? 한 마디를 던지고는 대수롭지 않게 청소기를 돌렸다.


그게 끝이었다. 엄마는 나를 혼내지 않았다. 공포는 그때부터였다.  엄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거지? 나중에 아빠에게 이르려고 그러나? 공포감으로 잠을 설치던 , 나는 초등학교 4학년 이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엄마는 비타민 음료를 마시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은  같다. 아빠도 그랬을 것이다. 아마도 아빠는 화풀이  곳이 필요했을 테고, 마침 내가 걸려들었던 것일 테다. 그렇지 않으면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도 많으니까. 다만 나는 비타민 음료를  때면 따끔거리는 마음을 아직도 어쩌지 못하겠다. 아빠는 기억도 못하겠지.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일화들이 줄줄이 떠올라 마음을 조여온다. 정말 슬픈 것은 '아빠로부터의 상처’는 우리 가족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기억과 감정이라는 것이다. 어느날 아침, 아빠는 또 화가 났다. 나와 오빠는 학교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초등학생이었고 오빠는 중학생이었다. 아빠가 화가 난 대상은 오빠였다. 이유는 모른다. 무엇이 아빠를 그렇게 분노하게 했을까. 바늘을 건드렸거나 비타민 음료를 마셨거나와 같은 것일 수도 있다. 확실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빠가 오빠를 발로 차는 모습이었다. 여러 번. 오빠는 발에 밀려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났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기만 했다.


아빠는 오빠에게 학교에 가지말라고 했다. 내게는 학교에 가라고 했다. 나는 그런 오빠를 등지고 혼자 학교에 갔다. 비겁했다. 불가피했다고 변명하고 싶다. 내가 거기 남아있었더래도 아빠의 화를 더 돋구기만 하지 개선되는 것은 없었을 거라고. 나도 초등학생이었다고. 무서웠다고. 다른 남매들도 나를 도와준 적 없었다고. 그렇게 혼잣말을 하다보면 내가 떠나고 덩그러니 서있을 오빠의 모습이 그려진다. 등 돌리고 도망치는 나를 보며 오빠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오빠와 그날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은 없다. 아빠에게 발길질 당했던 오빠는 그래서 몇시에 학교에 갔을지 아직까지도 모른다. 그날의 아침을 내가 아주 선명히 기억하듯 오빠도 기억하고 있을런지, 그것도 모른다.


아픈 기억을 꺼내는 것은 그때 느꼈던 아픔과 비슷한 통증을 준다. 지나가다가 어린 학생을 보면 그저 예뻐보이는데, 저런 아이를 어떻게 때릴 수 있을까?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아빠는 왜 자식을 때리는 아빠가 됐을까. 아빠도 경험으로 학습한 것이 아닐까 조심히 추론해본다. 내가 이런 어른이 된 것 처럼, 아빠도 그런 어른이 된 것일 뿐이겠지. 아빠는 입에 할아버지 욕을 달고 살았다.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할아버지에게 맞은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늘어놓았다. 아빠도 나처럼, 할아버지가 손에 쥐고 있던 도구까지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우릴 때릴 때 보였던 그 살기 어린 눈은 어디가고, 위로를 기다리는 듯한 어린 아이의 눈을 보였다. 그럴 때면 아빠가 안됐기도 했다가, 아빠가 할아버지를 원망할 자격이 있나 싶어 짜증나기도 했다가 하는 이상한 마음이 반복됐다.


아마 아빠의 말은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고모들도 할아버지를 그렇게 기억하고 원망했으니까. 다만 아빠가 나이 들어 힘이 빠진 할아버지에게 악담을 퍼붓길 택했다면 고모들은 할아버지를 찾아오지 않길 택했다. 그러나 묻고싶다. 아빠의 상처와 울분을 해소하는 대상이 왜 우리가 되어야 했냐고.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은 사실이다. 아빠가 할아버지를 답습했듯, 오빠가 아빠의 폭력성을 답습하는 것을 나는 똑똑히 목격했고 때론 피해자가 되곤 했으니까.


내게도 그런 모습이 있을까봐 두렵다. 인정하고 싶지 않다. 아빠와 닮았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나는 부정하기 위해 발버둥 칠 것이다. 다만 나는 벗어나고 싶다. 파리채를 볼 때면 기분이 확 나빠지는 이 피해의식으로부터. 아직도 바늘과 비타민 음료 같은 것들에 갇혀 있는 나로부터. 발버둥친다면서 동시에 갇혀 있는 모순을 애써 모른 척 한다. 이 못난 마음이 옅어지는 날이 오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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