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2015년 박흥식 감독 작품이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를 연출한 박 감독의 정성 가득한 무협영화이다. 하지만 이병헌 전도연 김고은이라는 탑클래스 배우를 쓰고도 냉혹한 평가를 받고 흥행에 참패하고야 말았다. 백번 양보해서 흥행 실패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 작품이 그저 그런 3류 취급을 받아야 할 만큼 저급한 영화인가는 진정 의문이다.
랑(전도연)에게서 윤동주가 보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동주가 설랑에게서 보인다. 부끄러움에, 모멸감에 설랑은 뼈를 깍는 괴로움으로 울부짖는다. “옳은 것은 누구에게도 옳은 것이다” “사사로움을 끊어야 협이 되느니라 ” 사사로울 수밖에 없는 사람을 내세워 사사로움을 끊을 것을 요구하는 것만큼 잔인 것이 또 있으랴! 심장을 후비는 그녀의 외침은 칸트만큼이나 냉혹하고 백설보다도 순수하다. 그녀의 숨 찢어지는 울부짖음이 이 영화 자체이다.
개인적으로 뛰어난 작품성과 함께 전도연 최고의 연기력을 보여준 영화라고 새겨두고 있다.
천민에서 고려 최고지위에 오른 이의민을 생각한 듯 고려시대 무인 집권기, 덕기(이병헌), 설랑(전도연), 풍천(배수빈), 소위 풍진 3협은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에 핍박받는 민중을 구제한다는 원대한 뜻을 세우고 민란을 일으킨다. 무인 집권자 이의명(문성근 역)의 아들인 이존복(김태우)을 체포하는 등 3협은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나 이의명의 회유책에 걸려들고 만다.
양아들로 삼고 출세를 보장하겠다는 그의 회유에 넘어가 버린 덕기와 이에 반대하는 풍천이 결투를 벌인다. 덕기가 위험에 처하자 그의 연인이었던 설랑은 풍천을 베어버리고 덕기를 구출한다.
이후 덕기는 승승장구하여 특진보국삼종대광이라는 최고지위에 등극하고도 멈출줄을 모른다. 이에 반해 설랑은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고 덕기의 변질에 치를 떤다. 덕기와 이별한 그녀는 풍천의 유언을 지키고자 풍천의 딸 홍이를 몰래 빼내는 과정에서 시력을 잃어 버린다. 이제 맹인으로서 덕기를 심판 할 수없게된 설랑은 찻집을 운영하며 홍이를 복수의 화신으로 키운다. 과연 홍이의 복수는 성공할 것인가? 정의의 복수를 위해 설랑은 어느 길로 가려는 걸까?
이 영화는 무협 사극의 형식을 취한다. 각종 검술과 비기가 선보이고, 해바라기 흐드러지게 핀 들판을 날아다니고 지붕과 벽을 건너뛰며 갈대와 억새 만발한 곳에서 엄마와 딸의 검술 대결이 펼쳐진다. 아름답지만 황당하고 장엄하지만 공허하다. 의문이 든다. 감독이 무협사극 형식을 취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2) 이 영화는 하극상과 힘의 논리로 혼란과 부패의 극치에 달했던 고려 무신 집권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그럼에도 감독은 당시의 무신 집권자들의 부패와 학정을 고발하는 것을 주요한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들을 곁다리 양념정도로 취급한다. 고려 민중과 무신 집권자의 대립은 이 영화의 주요모순이 아니다. 이를 뒤집어 보면, 민란을 영웅시하거나 민란의 영웅을 묘사하는 영화가 아닌 셈이다.
3) 이 영화는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겠다는 대의로 의기투합했던 풍진 3협의 행적을 뒤쫒고 있다. 백성 구제라는 거대담론으로 뭉쳤던 덕기 3인방의 몰락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처참하게 패배한다. 이러한 몰락과정에 대한 묘사는 몰락의 원인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도대체 그들은 왜 몰락했는가?
4) 영화는 3협의 몰락 원인을 사병이나 무술실력, 부패한 무소불위 집권자인 이의명 일당 등에서 찾지 않는다. 그들을 와해시킨 것은 외부의 적(외인론)이 아니라 내부의 적(내인론)임을 명시한다. 내부 분란이 일어난 것이다. 덕기는 풍천을 제거하고 설랑은 덕기와 이별한다. 성공하고자 배신했던 덕기는 홀로 질주하다 실패의 길로 진입한다.
5) 그들의 불화의 첫 단계는 풍천과 덕기의 분열이다. 이는 욕망과 욕망의 대립이라 할 수 있다. 집권자를 힘으로 제압하는 혁명을 함으로써 백성구제를 달성한다는 거대 담론(거대 욕망)과 불가능한 현실을 깨닫고 집권자와 타협으로 개인적 출세를 지향하는 욕망간의 대립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이 영화의 주요 관심사항이 아니다.
두 번째 불화는 덕기와 설랑의 대립이다. 이것이 이 영화를 이끌어 내는 기본 동력이다. 그것은 사사로움에 관한 대립이라고 볼 수 있다. 사사로움에 사로잡힌 덕기와 사사로움을 버리려 고뇌하고 몸부림치는 설랑, 이 둘의 대립에 카메라의 초점이 맞춰진다.
이 영화는 주관(사람, 의식)을 중심으로 보느냐, 객관 (시간과 사건) 시간과 가치를 중심으로 보느냐? 정체성의 변화를 중심으로 보느냐? 상징을 중심으로 보느냐? 에 따라 그 시각이 달라 질 수 있다.
홍이(김고은)를 중심으로 보면, 설랑은 홍이를 자신의 목적을 위해 훈련시키고 주입시킨다. 홍이는 설랑의 의도대로 커간다. 이 점에서 이 영화는 인간의 정체성은 선천적이고 고유한 것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홍이의 정체성 형성과 그 변화를 그린 영화, 즉 사육 또는 훈육을 그린 영화, 또는 복수의 정의를 그린 영화라고 읽을 여지가 충분하다.
그런데 덕기(이병헌)를 중심으로 파악하면, 이 영화는 동지와 자신을 배신하며 민중구제의 거룩한 뜻을 꺽고 개인적 야망을 향해 미친 듯이 돌진하는 고려시대 어느 천민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덕기의 욕망을 그린 영화로 볼 수 있다
또한 설랑(전도연)은 동지였던 풍천을 배신하고 부패한 무신정권에 편승하려는 덕기를 보며 죄의식을 느낀다. 이점을 강조하면 이 영화는 설랑의 죄의식을 해소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질주하는 미래는 옳음의 두 다리로 뛰어가야만 한다. 옳음이 어긋나 버린 절름발이 질주는 멈추어 세워야만 한다. 대의를 위해 뜻을 함께했던 세 사람은 무신 집권자 이의명(문성근)의 회유책에 분열된다. 민중구제의 대의에 충실하고자 했던 풍천(배수빈)은 덕기의 배신과 설랑의 예기치 못했던 반격으로 쓰러진다. 설랑은 뜻을 꺽고 욕심의 구렁텅이에 빠져 버린 자신과 덕기에 모멸감을 느낀다. 이로써 영화는 설랑과 덕기의 대결, 선과 악의 대결, 현재와 미래의 대결,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의무주의와 쾌락주의의 대립 투쟁을 그린 영화로서 자리매김한다.
대의를 저버리고 풍천을 배신했으며, 개인적 야망으로 왕의 자리를 노리는 덕기는 미래의 자격을 상실했다. 이에 반해 홍이는 한 점 부끄럼없는 미래이다. 홍이에 의한 단죄는 참다운 미래를 위한 속죄일 수 밖에 없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절름발이 질주를 멈춰 세우고 참된 미래를 올곧게 세우려는 설랑의 투쟁을 그린 영화, 과거와 미래의 투쟁을 그린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세 주인공의 정체성이 변한다. 홍이는 설희로 변한다 풍진 3협의 무사였던 설랑은 찻집을 경영하는 월소로 변신한다, 덕기에서 유백으로 변한다. 이점을 중점으로 본다면 이 영화는 정체성의 변신의 과정과 그 원인을 추적하는 영화로 볼 수 있다.
영화속 덕기는 자신의 욕심을 위해 동지(풍천)를 죽이고, 자신의 앞날에 해가 되려는 홍이를 죽이려 하며 자신의 경쟁자 존복(김태우)를 잔인하게 살상하며 왕을 협박하여 헌화공주와 결혼하려 한다. 이처럼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충동으로 날뛰는 덕기는 프로이트 용어로 이드(원초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대의를 위해 뜻을 펼치고 굽히지 않는 풍천은 슈퍼에고(초자아), 이들을 중재하는 설랑은 에고(자아)라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셋은 견제와 균형으로 한 몸처럼 행동해 뜻을 세웠으나 덕기의 배신으로 와해된다. 이로써 이들 셋의 균형은 무너진다. 균형이 무너졌다는 것은 균형을 세울 책임이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풍천의 자리에 홍이가 들어선다. 이점에 비추어 보면 이 영화는 이드- 슈퍼에고- 에고의 견제와 균형을 그린 영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풍천은 죽었다. 이제 3자의 균형은 깨지고 덕기의 충동과 설랑의 양심의 부끄러움만 남았다. 전자는 실존적 삶의 맹목적 의지요, 후자는 죽음으로서 실존을 회복하려는 맹목적 의지이다.
전자는 애로스( Eros=삶의 본능)요 후자는 타나토스(Thanatos= 죽음본능)다. 덕기는 살려 하고 설랑은 죽고자 한다. 덕기는 살기 위해서 살고 설랑은 죽기 위해 산다. 덕기는 ‘죽여야 산다’하고 설랑은 ‘죽어야 산다’ 한다. 이 둘을 중점으로 보면 이 영화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에 관한 영화로 읽을 수 있다.
홍이가 개입함으로써 아버지 – 엄마- 오이디푸스 삼각형이 완성된다. 이점에 중점을 둔다면 이 영화는 세 사람을 통해 에로스와 타나토스, 그리고 새로운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리스 로마신화상 최초의 천공신인 우라노스(아버지)- 가이아(아내)- 크로노스(아들) 또는 크로노스(아버지) –레아(엄마)- 제우스(아들)의 관계로 볼 수도 있다.
이점에 중점을 보면 이들 신화에 대한 해석과 나름의 극복책을 제시한 영화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풍천의 죽음으로 견제와 균형은 무너지고 덕기는 악의 화신이 되어 무한 질주한다. 설랑의 고독한 외침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정의의 회복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아버지에 굴복해 버린 프로이트와 라깡의 정신분석학 방법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길일까?
아님 실제 아버지를 죽이고 엄마를 아내로 삼아버린 그리스 신화상의 오이디푸스의 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가이아 크로노스, 또는 레아- 제우스의 길을 걸어야 할까?
영화가 어떤 방식의 해결책을 모색하는지 자못 흥미롭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무협사극은 그야말로 비현실적이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홍이는 드높이도 치솟은 해바라기를 뛰어 넘으며 뿌듯해 한다. 물론 이는 영화의 주제를 암시하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초현실적이다. 흐드러진 갈대와 억새밭을 날아다니고 대나무를 걸어 올라다니고...몽환적이고 환상적이다. 때로는 그야말로 황당무게하고 만화 같다. 비논리적, 비약적, 충동적에다, 잔인하고 공포스럽다. 그런데 이처럼 황당무게한 일이 인간에게도 벌어진다. 그곳은 바로 꿈으로 일부 정체가 드러난다는 무의식이다. 무의식에는 각종 억압되고 응집된 충동으로 가득차 있다. 프로이트는 우리는 꿈을 통해 무의식의 세계를 일부나마 알 수 있다고 한다. 꿈에서 우리는 날아다니고, 축지법을 쓰며,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순간 이동한다. 무협극이야 말로 우리의 무의식을 표현하기 좋은 형식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감독이 무협극을 취한 이유라고 보여진다.
이하에서 줄거리를 따라가면서 감상해 보기로 한다.
전술하였듯이 덕기는 무의식적 충동인 이드, 풍천은 슈퍼에고, 설랑은 에고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잠시 프로이트 이론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글의 목표는 영화 평론 그 자체가 아니라 영화를 통해 인문학을 공부해 보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 프로이트는 최면술에 걸린 사람은 자신이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토해낸다는 것, 그리고 깨어난 후에는 그런 말을 했다는 기억도 하지 못한다는 것, 그는 이 사실을 소홀히 지나치지 않았다.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적어도 평소의 자기와 최면술에 걸린 자기라는 두 개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처럼 최면술을 걸어 의식을 빼앗아야만 비로소 정체를 드러내는 기억, 그것을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 불렀다. 술이나 마약 같은 환각작용과는 결을 달리하는 것이 꿈이다. 인간은 잠이 들면 꿈을 꾼다. 그런데 이 꿈의 의식은 소유자가 마음대로 내용을 선택하고 채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간주된다
프로이트는 사람들은 성(性)에 관한 과거의 불쾌한 기억(Trauma)을 무의식에 저장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낸다. 즉 자신이 경험했던 불쾌한 트라우마를 의식에서 쫒아내 무의식에 감금시킨다는 것이다. 이처럼 의식에서 기억을 배제해 무의식으로 추방해 버리는 것을 억압 이라한다. 억압 역시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럼 트라우마를 억압하여 무의식에 감금해 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프로이트는 이를 방어기제라 설명한다. 건물에서는 화재가 발생했을 때 자동적으로 내려진 셔터가 화재를 저지하듯 인간의 마음에도 그런 안전시스템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방어기제(도피, 퇴행, 환치, 보상, 반동, 동일화, 투사, 자기징벌, 합리화등)를 작동시켜 불쾌한 트라우마를 의식에서 제거하고 무의식으로 쫒아내 감금시켜버린다는 것이다. 본래는 자아의 힘으로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욕구를 채우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욕구를 채우는 것이 불가능할 때 이러한 방어기제가 작동되어 자아의 안정을 도모하게 된다.
이 무의식의 영역에는 다양한 본능적 충동과 감정들이 억압되어 있는데, 그것들은 주전자 안에서 펄펄 끓고 있는 물처럼 감옥 밖(의식)으로 넘치려고 한다. 감옥을 지키는 교도관(= 의식)은 끊임없이 탈옥수 때문에 시달리고 있다. 무의식도 의식이 끝내 자신을 무시하면 화를 낸다. 무의식은 무의식적인 제 역할을 벗어나 이따끔 우리 의식의 바닥을 불쑥 뚫고 나와 자기 존재를 알리게 된다.
1) 이드와 리비도
-무의식은 이드(id)의 영역이라 불리며, 충동과 감정에 따라 제멋대로인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가 가득찬 곳이다. 이 리비도가 왜곡되면 노이로제등의 정신 질환이 생긴다. 프로이트는 모든 심리적 에너지의 원천을 성욕으로 환원한다. 이러한 리비도는 문화적, 예술적 사회적 창조의 에너지도 될 수 있다.
2) 초자아(슈퍼에고-superego)
-그럼 리비도를 억누르는 것이 무엇인가? 이를테면, 스마트폰을 사려는데 돈이 없는 경우,
무의식은 도둑질하라 충동질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좀처럼 도둑질은 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양심이 도둑질을 금지시키기 때문이다. 이처럼 양심에 해당되는 것을 초자아(superego)라 한다. ......을 해서는 안된다. ...해라, .....하지 않으면 안된다. 등의 금지나 이상의 추구를 담당한다. 가르침, 도덕적 금기사항을 받아 들임으로써 형성되는 슈퍼에고는 사회적 도덕적 질서가 내면화(무의식화) 된 것이다. 이드와 슈퍼에고는 서로 다투고 대립 긴장관계에 있어서 언젠가 분출될 수 있다.
자아(ego)
-자아란 이드와 초자아 사이에 끼어 이 둘 사이와 외계를 중개하며, 둘을 완화하고 조절하는 영역을 가르킨다. 이는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에 속한다. 스마트폰을 사려는데 돈이 없는 경우 도둑질하지 않고 아르바이트해서 그돈으로 사게 하는 것이 에고이다. 법을 위반하지 않고 욕구를 채우는 자아를 말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무의식의 이드와 슈퍼에고, 의식의 에고의 상호 합동작용으로 사회생활을 유지해 나간다고 한다. 상호 합동작용이란 이른바 3권 분립처럼 서로 간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를 개인에서 확대하여 사회에 적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에도 들끓는 욕망 부분(이드)인 범죄와 충동 , 엄격한 질서 유지 작용(슈퍼에고)인 법과 도덕질서, 그리고 현실적인 삶인 에고가 서로 견제와 균형의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덕기와 풍천, 설랑이 이를 대표 상징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풍천의 죽음으로 이러한 3부분의 견제와 균형이 무너지고 말았다. 균형의 복원은 어떤 방식으로 회복되어야 하는가? 이것이 이 영화의 주요 과제처럼 보인다.
덕기와 설랑은 연인사이 였다. 덕기가 설랑에게 묻는다.
“누이! 내가 무슨 일을 하려 할 때 그게 옳은 일인 죽 어떻게 아는 거야? ”
“그것이 무슨 일이든 석기 네가 하는 일은 옳은 일이야”
이처럼 맹목적으로 사랑하던 두 사람은 합세하여 풍천을 죽였으나 이내 갈라선다. 덕기는 자신의 길을 질주하나 설랑은 이내 죄의식에 휩싸인다. 이 둘의 대립이 영화의 주요 갈등인바, 이는 두가지 의미를 갖는다. 둘의 상징면을 중점으로 보면 둘은 각각 -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둘의 이념적인 측면을 고려해 볼때는 쾌락주의자와 의무주의자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풍천이 죽고 3협의 균형은 무너진다. 악으로의 긴 여행에 몰두하는 덕기에 설랑이 경고한다.
“피로 지은 죄 피로 씻을 것이다. 홍이가 우리의 목숨을 거둘 것이다. 잊지마라 우리는 홍이의 손에 죽는다”
그녀의 경고를 일축하고 덕기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돌진한다. 자신의 최대의 정적인 이존복을 위계를 써서 살해하고 왕을 위협해 무녕궁을 탈취하고 헌화공주와 결혼함으로써 허수아비 왕을 앞세우고 최고 실권자로 등극하기 직전.. 덕기에 의해 궁궐로 끌려온 설랑이 덕기에게 경고한다.
“홍이를 위해 빌었다. 부디의 아비의 피를 씻어 그 원혼을 달래 달라고. 나를 위해 빌었다. 내손에 묻힌 풍천의 피, 그 씻을 수 없는 죄를 알면서도 너를 베지 못한 나를 절대 용서치 마라고. 너를 위해 빌었다. 오장육부가 끊어지는 고통속에 죽어도 이승에서 지은 죄를 낱낱이 깨닫고 죽어달라고.”
덕기는 삶을 위해 살았고 설랑은 죽음을 위해 살았다. 덕기는 살기 위해 죽음을 불사했고, 설랑은 죽기 위해 죽음을 불사했다. 덕기는 죽음보다 깊은 삶을 믿었고 설랑은 삶보다 깊은 죽음을 믿었다. 덕기는 명예로운 삶을 존중했고 덕기는 명예로운 죽음을 존중했다.
이로써 덕기는 애로스가 되고 설랑은 타나토스가 된다.
1) 삶의 본능과 파괴본능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그의 저서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인간의 정신세계에는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본능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는 자기보존 본능과 성적 본능을 결합한 생(生)의 본능인 에로스(eros), 다른 하나는 공격적인 본능으로 구성되는 사(死)의 본능인 타나토스(thanatos)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에로스는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libido)가 관여하는 것으로, 성적인 충동을 담당한다. 애로스는 생명을 유지 발전시키고,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며, 한 종족의 번창을 가져오게 한다.
이에 반해 파괴본능인 타나토스는 생물체가 무생물로 환원하려는 본능이다. 인간 자신을 사멸하고, 살아있는 동안 자신을 파괴하며, 처벌하며, 타인이나 환경을 파괴시키려고 서로 싸우며 공격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사랑의 행위(성행위)를 예로 들면, 이때 일어나는 에너지의 강화와 집중 상태인 극도의 흥분은 결국 흥분이 소멸된 상태 즉 무(無)를 위한 것이다. 무(無)로 돌아가는 무화(無化)의 결과가 쾌락이며 그것이 곧 죽음이다. 따라서 사랑의 쾌락은 죽음을 향한 충동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수컷 거미는 교미를 한 뒤 암컷에게 잡아먹힌다. 수컷 거미는 현재의 삶과 사랑에 대한 충동을 가지면서 죽음에 대한 충동도 느낀다. 사랑의 배후에는 모든 긴장과 집중된 에너지의 소멸을 갈망하는 죽음에 대한 충동이 자리잡고 있다.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리스 신화와 타나토스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타나토스는 밤의 신 닉스와 암흑의 신 에레보스의 아들이며, 잠의 신 히프노스의 쌍둥이 형이라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당대 그리스 사람들이 잠과 죽음을 유사한 개념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타나토스는 죽을 사람에게 찾아와서 그 사람 머리카락을 칼로 잘라 그 영혼을 저승에 데려가며 이 때문인지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누가 사망하면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 애도를 표했다고 한다.
죽음의 이치 자체를 형상화한 신에 가깝기 때문에 타나토스는 저승사자 역할만 한다. 제우스의 사주로 인간 시지푸스를 잡아 저승으로 보내러 갔다가 붙잡히고 아레스에게 구조되는 굴욕을 당하기도 한다. 타나토스의 본질이 의인화된 죽음인지라 그가 시지푸스에게 붙잡혀 있는 동안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가 소실되어 죽을 사람이 죽지 못하는 촌극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처럼 이 영화는 덕기와 설랑을 통해 사랑과 죽음의 변증법, 애로스와 타나토스의 변증법을 표현했다고 본다.
홉스는 인간은 쾌락과 고통이라는 두 주권자의 휘하에 놓여 있어 고통은 피히고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역설한다. 덕기는 이에 부합한다.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라면 거칠 것이 없다. 풍천을 배신하여 애써 사로잡은 이존복을 풀어주면서 덕기는 외친다.
“난 이미 마음을 정했소. 저들이 약조했소. 형님만 마음을 바꾸면 우린 모두 무사하오. ”
“백성들과 함께 세운 뜻보다 더 큰 뜻이 어디 있다는 말이냐?”
하지만 풍천이 냉철히 거부하자 덕기는 그와 결투를 벌이고 설랑의 도움으로 그를 죽이는데 성공한다. 풍천을 죽인 댓가로 자신을 거두어 주고 양아들로 입적해준 이의명(문성근)을 독살 한 이후 덕기는 그의 친아들이자 자신의 의붓 형인 이존복을 속임수를 써서 독살을 감행한다. 죽어가는 그 앞에서 덕기는 자신의 회한과 비웃음을 토해낸다
“이의명 장군께서는 얼마를 버티셨죠? 3개월이라... 형님이 세워놓은 것들 하나하나 내손에 무너지고 이 고려 땅이 온전히 내 발아래 놓일 때 그때까지 버터야 돼. 그 좋은 구경을 놓쳐서는 안되옵니다.....내 마음속의 불길이 처음으로 눈을 뜬 때가 언제인지 아시오? ”
덕기는 자신에게 사로잡힌 이존복이 목욕하는 장면을 보며 혼자 되뇌인다.
“ 보아라 사람은 본디 저와 같이 모두 벌거벗은 몸으로 태어난다. 저토록 보잘 것 없는 자가 가진 것을 너는 한번도 탐내 보지 않았단 말인가? 탐을 내거라.. 모든 것을 다 가져라...”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이존복을 제거한 덕기가 새로 지은 궁궐인 무녕궁을 달라고 간청하자 왕이 노여워한다.
“지나치구나. 공의 입으로 무녕궁은 헌화공주의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 니놈이 왕실을 능멸하느냐 천한 것 주제에”
이에 격분한 덕기가 극도의 하극상을 왕에게 표출한다.
“니 목숨의 주인이 너 인줄 알았더냐? 백성을 보지도 않고 다스릴 줄 알았겠지.. 궁궐 밖으로 나가보지도 않고 세상을 보지도 않은 채 세상을 주무를 수 있다고 믿었겠지. 니 아비를 죽인 자들이 니 형을 왕으로 만들고 니 형을 죽인 자들이 너를 왕으로 앉혔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허수아비 노릇을 하면서 ...지금 니가 나의 주인인가? 내가 너의 주인인가? 지금 이순간 내가 너의 주인이다.너를 죽이지 못해 죽이는 것이 아니다. 오늘 너를 살려 주는 이유를 정녕 모른단 말인가?”
겁을 잔뜩 먹은 국왕은 덕기와 헌화공주의 결혼을 승낙하고 무녕궁을 그에게 바치고야 만다.
자신의 야망 행복(=쾌락)을 위해서 무한 질주하는 덕기의 모습이 잘 포착되어 있다.
풍천의 검은 뜻을 세웠고, 설랑의 검은 불의에 맞서며, 덕기의 검은 뜻을 완성하리리 믿었지만 덕기와 설랑의 배신으로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설랑의 칼을 맞고 죽어가는 풍천은 설랑에게 유언을 남긴다.
“그래 설랑아! 내 너와 덕기 세상의 빛을 보게 해 주겠다. 부디 홍이만은 설랑 네가 지켜 주겠다고 약조해다오. ”
풍천과 덕기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자신의 연인인 덕기의 편에 서서 풍천을 베어버린 설랑. 그것은 사사로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대의를 저버린 죄이다. 설랑은 자신이 한없이 추악하고 혐오스럽다.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덕기와 자신 설랑은 죽어야 한다. 복수의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 이땅의 정의를 위해서. 그것이 역사다. 자신의 마지막 의무이다. 이 의무는 개인적 의무가 아니다 보편적 의무이다.
맹인 설랑은 홍이에게 자신의 검을 주면서 추상같은 어조로 설파한다.
“그 검이 니 아버지의 심장을 찌른 검이다. 그날 설랑과 덕기의 배신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너의 아버지 너의 어머니도 죽었다. 내가 바로 설랑이다. 너에게 붉은 자락을 준 그자가 덕기이다. 나 설랑과 덕기가 홍이 너의 원수이다......이집을 떠나라. 다음에 만날 때 너와 나 둘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
“홍이야 길을 잃었다고 느끼는 그런 날이 올 것이다. 그 땐 무엇이 옳은 지만 생각하거라. 그러면 보일 것이다. 옳은 것은 모두에게 옳은 것이니라. 죄를 묻는 자에게도 죄값을 치룰 자에게도 혹여 연민이 들거든 명심해라..그 연민으로 너의 칼을 강하게 만들어라.. 사사로움을 끊어내는 것 그것이 협의 길이니라...”
궁궐에 침입하다 붙잡혀 버린 설랑이 덕기에게 외친다.
“설랑이 품었던 덕기 그 아이를 니가 죽였다. (과거의 순수했던 덕기를 현재의 덕기가 죽였다는 의미) 내가 품었던 그 아이 덕기를 죽어도 놓지 않으려 했는데 니가 죽였다. 너로 인해 그 아이는 다시 태어나고 태어나도 다시는 예전의 덕기로 돌아 갈수 없다. 내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피까지 너를 증오한다. 너와 나는 죽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
설랑의 이 고고한 의무수행은 아쉽지만 칸트의 의무론과는 결을 달리한다. 사사로움을 끊어낸다는 점에서 일면 비슷하지만 칸트의 의무는 그 어떠한 목적이나 수단과 결부시키면 그것은 보편성을 상실한다. 목적이 변하면 행위의 의미도 쉽게 변하기에 옳은 행위로 평가 받지 못한다. 설랑은 정의를 위하여, 복수를 위하여, 미래를 위하여라는 목적의식에 의한 행위라는 점에서, 그리고 홍이를 사주하고 이용하여 복수의 정의를 실현한다는 점에서 칸트의 절대주의 의무론과는 궤를 달리한다. 설랑의 이러한 행위는 특정 이데올로기에 의한 전사나 양심범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럼에도 설랑의 의무이행은 칸트주의자들보다도 더욱 냉철하고 엄격하며 처절하다. 그녀에게서 윤동주의 아픔과 외로움 처절함이 보인다.
(1) 홍이의 정체성
홍이는 두개 이름(=정체성)으로 산다. 어렸을 때는 홍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의 진짜 이름은 설희였다.
설랑은 풍천의 딸 홍이를 키우며 훈련 시킨다. 일종의 사육이다. 설랑이 너는 왜 검을 익히느냐? 고 묻자 홍이 대답한다.
“두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내 아버지 풍천과 내 어머니를 죽였습니다. 피는 피로 씻는 법, 제가 스무살이 되면 그 자들은 숨을 거둘 것입니다.”
설랑은 홍이를 킬러로 키우며 끊임없이 증오심을 키우며 복수를 주입한다. 결국 때가 되자 설랑은 자신이 홍이의 아버지를 죽인 범인임을 밝히며 증오심을 키운다.
“원수의 손에 의해 먹여지고 입혀지고 살찌워진 네 모습을 보아라. 네까짓게 어떻게 나를 죽이고 그자를 죽이고 그 검에 묻은 니 아비의 피를 씻겨준단 말이냐? 어린 석은 것! 내가아직도 너의 어미로 보이느냐? 명심해라 난 어미가 아니다. 너의 원수 설랑이다.”
이 영화는 자아 정체성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플라톤 이래로 데카르트(본유관념설) 칸트 헤겔까지 이어지는 전통 철학적 입장은 선험적인 자아가 존재하며 이는 신이 보증한다고 주장해 왔다. 즉 자아는 타인이나 그 누군가가 형성해 주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타고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경험론자들은 이에 반대한다. 그들은 타인이나 사회 구조가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한다고 한다. 꽁트는 사회가, 마르크스는 계급이,, 프로이트는 성적 충동이, 라깡은 상징계에 들어선 오이디푸스가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들뢰즈는 사건의 배치와 접속으로 인해 각각 정체성이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이 영화는 전통철학적 입장보다는 사회 결정론 입장에 선 것처럼 보인다. 즉 엄마가 딸의 정체성을 결정한 것이다. 가족은 사회의 일원임이 분명하다.
부모의 복수를 위해 궁궐로 잠입한 홍이는 덕기와 마주쳐 결투를 벌인다.
“니가 홍이냐? 설랑이구나..마음에 드는 눈빛이구나. 풍천 형님이 눈빛이던가, 그런데 설랑이 널 어찌 키운 것이더냐? 고작 이런 실력으로 날 죽이겠다니.....차맛은 설랑이 최고라고 니 아버지도 말했는데..어찌 내가 끓인 차맛은 비린내가 나는지 모르겠구나... 설랑이 예고했지. 홍이 네가 내피를 거두러 올 거라고..그런데 홍아... 난 누이의 차맛이 그립구나..한 번 더 누이의 차맛을 보고 싶구나..니가 내 피를 거두어 가기 전에 내가 니 피를 좀 써야 겠구나....넌 홍이가 아니다”
덕기는 홍이의 눈빛과 등의 흉터를 보고 그녀가 풍천의 딸 홍이가 아님을 직감한다. 덕기는 홍이를 칼로 찌르고 저수지에 던져 버린다.
덕기는 잡혀온 설랑에게 따져 묻는다.
“홍이가 아니었어. 그 아인 홍이가 아니야. 그 아인 풍천의 눈을 닮지 않았어. 그 아이등의 상처는 내가 남긴 것이 아니야. 설랑네가 남긴 것이야. 어디서 고아 하나 주어다가 니가 키우고 만든 거야. ”
설랑은 딱 잡아뗀다.
“”흐흐 탐욕으로 탁해지는 니 눈이 그렇게 믿고 싶은 게지..“
덕기에 의해 저수지에 수장당했다 사부와 설랑의 구출로 홍이는 가까스로 살아난다. 홍이는 사부에게 기초부터 다시 무술을 배운다. 가열찬 훈련 도중 홍이는 자그마한 무덤을 발견하고 무덤의 주인이 누구냐고 사부에게 묻는다.
”알고 싶으냐? 니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데 그래도 알고 싶으냐?.. 그 무덤의 주인은 홍이라는 아이다. 넌 홍이가 아니라 설랑의 딸 설희이니라“
홍이는 잠시 충격을 받는다. 설랑이 키우려고 데려온 풍천의 딸 홍이는 열병으로 죽었던 것이다. 설랑은 풍천의 유언을 떠 올리며 맹세한다.
”이 아이가 태어나면 홍이라 이름짓고 홍이로 키우겠습니다. 제가 더러운 목숨 연명할 유일한 이유입니다.“
풍천의 딸은 죽었는데 설랑은 풍천과의 약속, 자신의 죄의식으로 인해 자신과 덕기의 딸인 섷희를 홍이로 키웠던 것이다.
모든 사실을 알고난 설희는 혼란을 극복해 내고 그녀는 머리를 잘라내며 이내 결단을 내린다.
”사부님. 검을 주십시오“
”설희야!“
”홍입니다....저는 낳을 때부터 홍입니다“
궁궐로 잠입한 설희가 외친다.
”듣거라. 나 풍천의 홍이가 송유백(덕기)의 피를 거두러 왔다 “
자신이 풍천의 딸 홍이가 아니라 덕기와 설랑의 딸 설희라는 진실을 알고도 그녀는 설희의 삶을 거부하고 홍이로써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이는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실존적 결단, 양심에 따른 결단과 일면 유사성을 지닌다. 하지만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결단은 본질을 추구하는 결단에 대해서는 극도로 반대한다. 사르트르의 구토(사르트르 소설)를 유발할 뿐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본질이 없는데 본질이 있다고 착각하며 본질에 매달려 사는 사람을 경멸한다. 그의 실존적 결단은 본질로 부터의 도피인 셈이다. 그런데 홍이는 복수를 본질로 부여 받은 사람이다. 그녀가 진정한 실존적 결단이 되기 위해서는 홍이로서의 삶을 버리고 설희로서의 새로운 본질을 만들어 나가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결단은 무의미한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희는 설희의 길을 가지 않고 홍이의 길을 선택했다. 그건 뼈를 깍는 고통을 수반한 결단으로 볼 수 있다. 설희의 이름으로 산다면 복수의 근거가 희박해 진다. 홍이의 이름으로 살아야만 복수의 정의(아버지를 죽인 복수의 정의)라는 명분이 부여된다. 복수로서 정의를 실현한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간직하겠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사사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설희의 이름보다는 홍이의 이름이 더 달성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친부모가 아니라는 생각이 패륜과 사사로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사사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면 협녀가 될 수 없다. 협녀가 되지 못하면 정의는 실현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미래는 암담할 뿐이기 때문이다.
사사로움에서 벗어나는 것, 이 영화의 제목이자 내용이며 메인 테마이다.
풍천(슈퍼에고)이 무너짐으로써 덕기(이드)의 충동적 행동이 이어진다. 삼자간의 조화와 균형은 깨지고 정의는 무너져 내린다. 균형이 무너지면 복원하려는 힘이 자연적으로 발생한다. 설랑은 3협의 균형, 즉 이드와 슈퍼에고, 그리고 에고의 복원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무의식적으로) 그것은 복수의 정의가 실현됨으로써 실현 될 것이다. 또한 설희가 덕기와 설랑의 친자임이 드러남으로써 오이디 푸스 콤플렉스 삼각형이 완성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구조주의의 모토다, 프로이트는 구조주의의 선구이다.
영화는 여기서 기존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뛰어넘고 싶은 야망을 드러낸다. 감독은 어떤 모형으로 뛰어 넘을 것인가? 먼저 프로이트의 오이디 푸스 콤플렉스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3세에서 6세까지의 시기인 남근기부터 이드, 에고, 슈퍼에고는 역동적으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남근기의 아동은 이성의 부모에게 성적 관심을 갖게 되면서 남아는 남성답게 여아는 여성 답게 행동하려고 한다. 남아는 어머니를 사랑하여 소유하고 싶어하나 아버지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여기에서 거세 불안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남아는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무의식 속으로 억압해 버린다. 아버지에서 느꼈던 적대감을 억압하고 아버지와 동일시함으로써 아버지와의 경쟁적 관계를 해결하게 된다. 여아의 경우 자신이 남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거세된 것이 어머니의 탓이라고 보고 어머니를 미워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에게 남근이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남근 선망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남근을 갖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어머니를 동일시하게 된다.
어머니와 2자 관계였던 상상계를 벗어나 아버지가 계신 상징계로의 진입은 억압에 의한 무의식의 형성과 일치하며 이는 다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등장과 상응한다. 아이는 어머니에 대하여 자신이 전부이기를 바란다.(실제로 그런 다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남근)이 됨으로써 자신은 어머니의 욕망을 욕망한다. 이처럼 라깡의 욕망은 결핍으로서의 욕망이자 자신의 고유한 욕망이 아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들뢰즈는 이를 부인)
하지만 엄마를 차지하려는 아이는 경쟁자인 아버지로부터 거세 공포증에 시달린다. 이를 상징적 거세라 한다. 아버지를 극복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아이는 엄마를 포기하고 아버지에 복종한다. 여기서 아버지는 사회의 관습, 법규, 권위등을 상징한다. 이처럼 아이는 아버지의 법 상징계의 근본적인 권위를 수용하는 과정을 통해서 사회화하고 성숙된다.
이로써 남근으로 존재하려는 욕망을 포기하고 즉 상징적으로 거세되고 남근을 소유한 아버지와 동일시를 성취한다. 아이는 근친상간의 금지에 바탕을 둔 문명세게로 진입하는 동시에 기표체계에 갇히게 된다.
3) 이처럼 프로이트와 라깡의 오이디푸스론은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고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그 본질이다. 거세공포를 이겨내지 못하고 아버지로 상징되는 사회질서에 복종할 수 밖에 없는 자아를 묘사 한 것이다. 이 경우 아버지가 정의롭고 훌륭하다면 이 이론은 수용할 만하다.
하지만 영화속 설희는 아버지에 복종하지 않는다. 거세 공포증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 대한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굴복하지 않는 설희(김고은)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이쯤되면 감독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넘고 싶은 야망을 보여준 듯 하다. 그는 프로이트 라깡의 오이디푸스론에 염증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런측면에서 아들 아닌 딸(김고은)은 주연으로 내세웠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위 영화 덕기처럼 아버지가 난폭하고 흉측한 괴물이라면 어떻게 해야하나?
이 난관을 어떻게 뛰어 넘어야 할까? 정의롭지 못한 아버지를 극복한 사례는 무엇이 있었을까?
설희는 덕기를 뛰어넘어야 한다. 불법 불의를 방치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설랑의 명령이요 정의의 명령이다. 과거엔 어떤 사례가 있었을까?
크로노스는 자신의 아버지 우라노스의 악행을 보고만 있지 않았다. 크로노스의 아버지인 우라노스는 그리스어로 "하늘", "천공"이란 뜻으로, 자신의 어머니이자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남편이다. 우라노스는 자신이 낳은 괴물같은 아이들을 혐오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이들을 대지(=가이아) 안 깊숙한 곳인 타르타로스에 가두어버리는 만행을 저지른다. 태어난 자식들을 다시 어미의 자궁속으로 집어넣어버린 셈이다. 이에 격분한 가이아가 아이들에게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하라고 명령하자, 다른 자식들은 다들 겁을 먹거나 꺼리는데 유일하게 나선 사람은 막내아들인 크로노스였다. 아버지인 우라노스가 가이아와 동침하려 할 때 크로노스가 뛰쳐나와 낫으로 그의 성기를 잘라 바다로 던져 버린다. 우라노스는 결국 신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크로노스가 왕좌를 이어 받는다.
제우스도 자신의 아버지인 크로노스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네가 네 아비를 내쳤듯, 너 역시 같은 운명이 될 것"이라는 가이아의 저주가 두려워 아이를 낳은 족족 크로노스가 삼켜 버리자 제우스와 그의 어머니, 레아가 힘을 합쳐 크로노스를 제거해 버린다. 이로써 크로노스는 물러나고 제우스가 집권하여 세상에 정의의 평화가 도래한다.
오이디푸스는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아버지인 테베의 라이오스 왕을 살해하고 엄마인 이오카스테 왕비를 아내로 맞는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인줄 모르고 살해 한 점에서 크로노스, 제우스와는 상황이 약간 다르다.
여기서 아버지는 상징이나 무의식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실제 친 아버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아버지는 구세대와 법, 권위를 상징하고 아들은 신세대와 정의를 상징한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2) 영화는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으로서 일단 프로이트나 라깡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론을 배격한 것으로 보인다. 거세 공포에 의해 아버지의 권위와 법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은 현대사회의 이념과는 동떨어진 것이라 평가하는 듯 하다. 물론 인간이 무의식의 충동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라는 점도 고려 되었을 것이다.
결국 감독은 오이디푸스보다는 크로노스 제우스의 길을 택한 것으로 본다.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은 불의대 정의의 싸움이자 과거와 미래의 대결이다. 덕기와 설희의 대립도 이와 다르지 않다.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일보직전 덕기는 자신을 거두러 온 설희를 맞아 대결을 한다. 설희는 덕기가 자신의 친부임을 안다. 그가 불의의 화신임을 인식하고 있다. 설희는 제우스의 운명을 담담히 걷는다.
눈내리는 밤, 부녀간의 결투가 벌어진다. 장엄하고 엄숙하다. 쉽게 판가름이 나지 않는다. 설희를 내리 치는 덕기의 칼을 설랑이 가로 막는다. 여전히 설랑을 몹시 사랑한 덕기는 무척 놀란다. 설랑은 덕기를 껴안는다. 덕기도 그녀의 품에서 운명에 순응한다. 설랑은 설희에 신호를 보낸다. 설희가 돌진한다. 칼을 부모의 몸으로 보낸다. 칼은 반쯤 들어간다. 사사로움은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칼날의 끝머리에 여운으로 남아있다. 덕기는 그 칼을 잡아 당긴다. 설랑과 덕기는 한칼에 한몸이 되어 쓰러진다. 눈물이 메마르지 못한 설희는 무릂을 꿇으며 부모를 보낸다. 여전히 사사로움은 눈꽃처럼 남아 있었다.
영화는 설랑의 부끄러움에서 시작하여 부끄러움의 해소로 완결된다.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고 싶었던 그녀. 자신의 연인이라는 사사로움에 이끌려 대의를 저버렸던 과거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이를 회복하고자 하는 부끄러움의 의지가 백설 보다 눈부신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사사로움에서 벗어나는 것, 바로 그것이 협의 길이다.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인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