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를 하면 바뀌는 생각들
손맛 좋은 전라도 할머니 손에서 많은 끼니를 해결했었다. 젖갈 감칠맛 가득한 김치부터 김치보다 목살이 더 가득한 중학생 전용 김치찌개, 비 오면 기다렸다는 듯 바싹하게 구워주신 김치전까지 무조건 한식만 먹는 식성이었다. 어쩌다 급식으로 토마토 스파게티라도 나오면 느끼하다며 연신 김치 범벅을 해 먹던 내가 파스타라는 단어를 들으면 있어 보이는 음식처럼 여겼다. 한국인은 밥심이라며 양식집을 가자고 하면 친구들을 뜯어 말리던 흥선대원군 이미르였다.
고등학교 3학년,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생각을 처음 고쳐먹는다. 알리오 올리오를 그때 경험했기 때문이다. 면을 몇 번 움직이면 보이는 기름 때문에 지나치게 느끼하겠다고 느껴진 첫인상과 다르게, 입을 타고 넘어가는 부드러움과 향긋한 구운 마늘향이 왜 그렇게 잘 어울렸는지 모르겠다. 점심 타임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배가 고픈 탓인지 요리하던 실장님이 건넨 한 입 찬스가 5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난다. 무슨 첫사랑 영화처럼 말이다.
시간이 지나 20살, 자취를 시작했다. 요리는커녕 닭가슴살에 밥과 라면만 먹으며 효율이 최고를 외치던 나는 썸나는 사람이 생겨 데이트 장소를 정해야 했고, 있어 보이는 이미지의 파스타를 택했다. 너무 오랜만에 먹는 파스타라 젓가락으로 면치기 하며 먹을까 싶어, 전 주에 시간을 내어 집 앞 "진짜 외국인이 주방에서 영어로 주문을 받아요"라는 신뢰의 한 줄이 느껴지는 집을 연습 삼아 방문했다.
나름 양식집이니 TPO를 맞춘다며 셔츠를 입었던 기억이 난다. 토요일 점심 1인 혼밥은 그 당시 내 기준 난이도 고기집 혼자 구워 먹기 바로 아래 수준이었다. 천만다행으로 테이블이 적어 최대한 구석진 곳으로 부탁해 늘 먹던 걸로 먹는 분위기를 풍기며, 태연하게 알리오 올리오를 시켰다. 전날 유튜브로 파스타 먹는 법을 검색하고는 여유 있게 연습했다. 포크로 면을 돌리는 건 젓가락의 위대함을 알려줄 뿐이었다. 맛보다는 난이도 있는 혼밥을 하고 있다는 압박감으로 최대한 빨리 식사를 마쳤던 기억뿐이다. 결국 그다음 주 양식집에서는 필라프를 먹었다.
또 시간이 지나 지금, 자취를 다시 시작하고 있다. 저속노화니 GI 지수니 따지고 가성비부터 수많은 유튜브 레시피로 배워 이제는 허세 음식이 아닌 라면 다음가는 소울푸드가 되었다. 원팬으로 해먹고, 파슬리도 가끔 넣어 먹고 굴소스와 참치액젓으로 이탈리아 사람을 화나게 해도 마늘향과 번들번들 면을 타고 오는 이 맛은 질리지가 않는다.
이렇게 많이 해먹으니 다시 돌아본다. 파스타는 허세였다고. 하지만 그 허세가 나를 새로운 맛의 세계로 이끌어주었고, 이제는 진정으로 즐기는 요리가 되었다. 전라도 할머니의 한식부터 알리오 올리오까지, 내 입맛의 변화는 곧 나의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너무 망한 알리오 올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