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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ap Jan 12. 2023

열 살 어린이가 남겨준 이야기

나의 가장 젊은 날들

부모님께 감사한 것은 많지만 그중에 정말 감사한 것이 하나 있다면 초등학생 때 일기를 다 모아서 간직해 주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일기가 밀린 적도 많고 그냥 숙제를 해내기 위해 억지로 쓰기도 했던 것 같은데 다시 보면 꽤나 열심히 일기를 썼구나 싶었다. 몇 년 전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 일기장을 다시 열어보았을 때는 초등학생 때 쓴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진지하고 생각이 깊은 내용들에 적잖이 놀랐었다. 갓 학교에 입학한 여덟, 아홉 살의 일기는 맞춤법도 많이 틀리고 하루동안 있었던 일들을 나열하는 것이 전부인데 반에 열 살 중반부터는 내용이 확 달라졌다. 하루에 있었던 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나의 생각과 관점으로 바라보며 '왜 그랬을까?'를 생각하기도 하고 새로운 다짐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일기 쓰는 것이 예전처럼 즐겁지 않다며 나를 진정으로 이해해 주는 친구 같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일기에서 생각해 봤는데 일기를 친구에게 이야기하듯이 써야겠다고 했다. 일기는 편지형식으로 바뀌었고 일기장에게 하늘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유는 하늘만큼 넓은 마음으로 나를 이해해 주는 친구라는 것이다. 그 발상이 귀엽기도 하고 이 어린이는 얼마나 속 깊은 얘기를 하고 싶어서 이럴까 괜히 짠하게 다가왔다.


한 학년에 일기장이 3-4권이 될 정도로 그 수가 꽤 많아서 다 읽으려면 서너 시간은 더 걸렸다. 읽다 보면 머릿속에서 영상으로 재생되는 날들이 참 많다. 사진보다도 더 생생하고 자세하게 기억이 떠오를 수 있다는 것이 참 소중하다. 오빠랑 티격태격 다퉈서 오빠가 밉다고 썼다가도 늘 오빠랑 어울려 놀았다. 둘이 자전거를 타러 나가고 배드민턴도 치고 아파트 단지에 있던 야외수영장도 참 많이 갔다. 그곳에서 물놀이 후 컵라면이랑 꼭 같이 먹는 게 있었는데 삶은 달걀을 반으로 갈라 그 위에 당근과 오이를 올리고 초고추장을 살짝 뿌려 먹는 음식이었다. 별거 아닌 그 음식이 어찌나 맛있던지 아직도 종종 만들어 먹곤 한다. 그 음식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는데 일기장을 보다가 '계란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계란초가 우리 지역에서만 먹는 음식이라는 것은 최근에 알게 되었다. 또 일기를 보면서 알게 된 사실이라면 나는 어렸을 때부터 관찰도 많이 하고 궁금증이 많은 아이였다는 것이다. 무엇을 하라고 하면 꼭 '왜?'가 붙었다. "엄마 그건 왜 그런 거예요?"라고 묻거나 어느 날은 통화로 다투는 듯한 엄마를 지켜보다가 통화가 끝나자 "엄마 왜 화가 났어요?"라고 묻기도 했다. 오빠의 어떤 행동을 지켜보다가 마무리는 "오빠가 왜 그랬을까?"로 끝나는 날도 있었다. 지금도 어떤 일에 있어서 분명한 목적이나 의미를 알고자 하는 성격인데 이러한 성격이 크면서 발달되었다고 생각한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중 열 살 어린이가 서른 살이 넘은 어른에게 힘을 주는 몇 가지 문장들이 가슴에 콕콕 박혔다. 먼저 부모님이 하신 말씀들이었다. 달리기 시합이 있었던 날 나는 1등을 하지 못해 속상해하고 있었다. 아빠에게 1등을 못했다고 죄송하다고 했더니 아빠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1등은 중요하지 않아. 달리기를 끝까지 해냈다는 것이 중요한 거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냈으니 잘한 거야.' 미술학원을 늦어 선생님께 많이 혼난 날이었다. 엄마에게 혼나서 속상하다고 얘길 했더니 엄마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잘못한 일은 혼나야지. 혼날 땐 확실하게 혼나고 칭찬은 기분 좋게 받아야 해.' 마지막으로 가장 힘이 되었던 열 살 어린이의 다짐이 있었다. 방학 중 생활 계획표대로 실천하는 것을 한 번도 빠짐없이 잘 지키고 있다는 것에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이번 겨울방학은 정말로 보람차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을 적었다. 졸린 것도 꾹 참아가며 했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진짜로 나도 할 수 있어. 모든 일은 꼭 용기를 가지고 해야지.'라는 다짐을 하며 끝을 맺었다. 새로운 일에 조심스럽긴 하지만 큰 두려움 없이 나는 할 수 있다는 해낼 수 있다는 나의 믿음은 그때 그 열 살 어린이의 다짐으로 시작되었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 다짐이 다른 누군가가 아닌 과거의 나의 다짐으로 마주하게 되자 더 큰 용기와 자극으로 다가왔다. 수많은 용기기 필요할 올해의 한마디로써 충분했다.


글이란 게 참 쓰기 어려운 것 같지만 어린아이의 일기처럼 처음에는 무엇을 쓸지 모르다가도 쓰다 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고 결국 그렇게 쌓인 글들이 나의 기록이 되어 남는다는 게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사진이나 영상으로 추억을 남기곤 하는데 가끔은 너무 단편적이라 지나고 나서 시각적인 것만 남는 거 같아 아쉬울 때가 있다. 어린 시절 사진첩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처럼 말이다. 사실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이때 이랬구나- 정도의 생각들. 글로는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 무궁무진하다. 글로도 사진과 영상을 남길 수 있고 그 모두를 뛰어넘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글과 시각적인 것이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현재 진행형인 나의 소중한 기억들을 차곡차곡 쌓아가야겠다. 훗날 조그만 할머니가 오늘을 추억할 수 있도록.






몇 장 찍어온 일기를 올려봅니다.

촛불을 켜고 생각에 잠기고 싶은 어린이


그때나 지금이나 자연의 아침 소리가 좋은 어린이


시고르자브종 아롱이 키우던 시절 별안간 동시 짓기


진짜 다 컸으니 촛불을 켜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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