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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벽 Aug 21. 2023

월화4-2, 청년회장의 경고

어느 여름 해변에서 만난 소나기처럼

청년회 회장과 나는 마을 앞길을 따라 웃말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교회 종탑 아래서 바라볼 때는 차 두 대는 너끈히 지나다닐 만큼 폭이 넓고 운치 있는 흙길이어서 한 번쯤 걸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걸어보니 작은 돌멩이가 발치에 차이거나 뾰족한 돌멩이가 밟히는 불편한 길이었. 더군다나 뙤약볕이 퍼붓고 있어서 목덜미로 땀이 줄줄 흘러내려오고 숨이 턱턱 막혔다.


사택에서 청년회장에게 딱 걸리지 않았다면 절대 따라나서지 않았을지 몰랐다.




-  제가 벗어  놓은 옷을 빨아준다고 가져간 모양인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서, 성의는 고맙지만 그게 사실 세탁기로 빨면 안 되는 거라서......


나는 사찰집사댁  안방 문  앞에 엉거주춤 멈춰 서서 청년회장에게 잘도 둘러댔다.  


- 사찰집사님이 판단력이 좀 부족하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잘해드리고 싶은 의욕이 앞서서 그렇지 악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매사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청년회장도 이내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혹의 눈초리를 거둬들인 그에게 쐐기를 박아버릴 심산으로 나는 내친김에 욕실로  들어가 세탁기를 열어보았다. 그곳에도 내 와이셔츠와 속옷이 보이질 않았다.


- 내 참, 어디에 뒀는지 보이질 않습니다.


나는 사찰댁 안방에서 튀어나온 데 대해 정당성을 입증한 것처럼 당당하게 그러나 난감한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 하하하 절절 매시는 거 보니 피앙세선물 받은 귀한 와이셔츠 같은데.....


청년회장은 웃음보를 터트렸다. 하지만 나는 피앙세라는 말에 순간 다시 긴장의 끈을 졸라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에 대해 잘  모르지그는 나를 너무 잘 아는 사람이란 걸 새삼 되새겼다.


이 낯설고 먼 산골 마을에 왔는데, 그것도 징벌적 이유로 쫓겨왔는데, 내 약혼녀를 알고 그의 아버지와도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니......


게다가 그가 마음만 먹으면 나와 가까운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고 내 험담을 늘어놓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찍힌 몸이라 어쩔 수 없이 서울로 뻗칠 그의 혓바닥의 위력이 자꾸 신경 쓰였다.


 - , 네 그게. 그런데 바쁘시다더니 여긴 어쩐  일로......


나는 달갑지도 반갑지도 않은 속내를 감추고 그저 잖게만 보이려고 하다 보니 목소리가 소심해졌다.  


- 간밤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아무래도 저 윗말 너머 담배밭에 침수가 있었는지 살펴보는 게 먼저 일 것 같아서요. 등급을 잘 받으려면 정성을 들여야 하거든요.


청년회장은 자신의 뜬금없는 출현과 상관없는 변명을 했다.


- 그러면  어서 가보셔야지 여긴 뭣하러....


지나친 소심함은 오히려 그가 나를 얕보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번에는 좀 당당하게 말한다는 게 약간 시건방지게 튀어나왔다.


게다가 이제 사찰집사네 마루에서 내려와 청년회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어서 더 이상 주눅 들 것도 없었다.


그리고 막상 명을 하고 나니 당당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설마 장차 중역이 될 내가 이 가난한 사택에서 뭘 훔치겠다고 기웃거리겠냐는 합리적 뻔뻔함이 고개를 쳐들었다.


-  이 참에 이사장님 사위 모시고 마을 구경도 시켜드려야겠다 생각했지요. 선교관에만 계시면 적적하실 것 같아서요. 그러지 말고 어서  가시죠. 별로 할 일도 없으실 테니 거절하지 마시고요.


당신 담배밭에 내가 왜? 하는 강한 반발심이 솟구쳐 오르는 걸 간신히 억누를 수 있었던 건 어쨌거나 내가 당분간은 그의 신세를 져야 할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그의 입을 통해 수미의 아버지에게 전해질 나에 대한 품평이 신경 쓰였던 탓이었다.


아무도 없는 사택 안방에서 나오는 내 모습은 나중에라도 그가 혀를 어떻게 놀리느냐에 따라 치명타가 될 수 있다는 판단도 이 불쾌한 뜻밖의 동행을 거절치 못한 중요한 이유였다. 정당성은 확보되었으나 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아직은 나를 지배했다.




- 부사장님, 아이스크림 하나 드시겠습니까?


마을 회관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나보다  년 이상 연배인 청년회 회장이 다 알고 있다는 듯 과장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수미에게 들은 말이 있긴 해도 부사장이란 호칭을 청년회장  입으로 듣기엔 뜬금없고 어색했다.


- 이사님이 보통 이사님입니까! 대기업 하나를 좌지우지하실 수 있는 분 아닙니까. 그런 이사님의 무남독녀 외동딸 사위님께서 중역으로 승진하신다는데 부사장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청년회장은 아이스크림냉장고를 열어젖히고 호기롭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마을회관 잡화점을 지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평소 군것질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는 기왕이면 통팥이 들어간 종류의 빙과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내 의견도 묻지 않고 고드름이라고 써진 빙과를 냉장고에서 꺼내 건네주었다.


- 아, 감사합니다.


내 생각은 비춰보지도 못하고 도리 없이 고드름을 받아 들었다.  


청년회 회장은 방문을 열고 안에다 돈을 던졌다. 그리고 나오면서 고드름을 뜯어서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나도 얼음 조각을 입에 넣었다. 새콤 달콤한 맛이 나면서 혀가 서늘해졌다.


 청년회 회장은 자신이 일방적으로 빙과를 집어준 것을 의식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내 표정이 그래 보였는지 고드름 외에는 달리 먹을 만한 게 없다고 변명했다.


그리고는 마을 회관 뒤에 있는 폐가를 올려다보더니 다시 웃말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월화 이야기를 꺼냈다.


- 저 쓰러져가는 집이 월화네가 살던 곳입니다. 그걸 몇 해 전 부임해 오신 선교사님께서...... 솔직히 저도 선교사님 의견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사람 중하나지만 저렇게까지 교회에 나오지 않으리라곤..... 아래 웃말 통틀어 교회에 안 나오는 집은 딱 월화네 한 집뿐입니다.


그는 헛웃음을 웃으며 이제 거의 보이지 않는 폐가를 돌아왔다.


- 기가 찰 노릇이죠. 교회에 살면서 교회에는 출석하지 않는 기이한 가족들.....


-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죠!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월화의 벗은 몸을 보아버리고 그리고 한 집에서 하룻밤을 지낸 꿈같은 그리움이 내 입술을 어루만졌다.


- 아, 그렇긴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반발이 여간.....


- 주님은 병든 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버림받은 자,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찾아다니시며 고쳐주시고 위로하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교회가 그들을 정죄하고 내쫓는 것은 자가당착이죠.


내게 무슨 대단한 신앙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내 신앙은 젖먹이 때부터 길들여진 습관 같은 것이었다. 


평소에는 누르고 감추어왔던 신앙심인데도 거침없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몸에 밴 신앙심을 월화를 위해 기꺼이 드러냈던 것이다.


- 그래서 저도 마을 사람들을 달래 왔고......


- 앞으로도 회장님께서 월화네 방패가 되어주세요.


- 아, 네. 부사장님 뜻인데 당연히 그래야죠.


- 제 뜻이 아니고 주님의 뜻입니다.




눈앞에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깎아지른 기암절벽과 물둑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 넓고 높은 것의 초화가 만들어낸 아름다움에 나는 적이 감탄하고 있었다.


-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뭔가 없어지면 대놓고 월화나 인화를 의심했습니다. 알고 보면 그 아이들이 훔쳐간 것이라고는 찬밥이나 김치 같은 먹을 것이 전부였을 테지만........


제 짐작으로 그 아이들은 돈이나 패물 따위는 훔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냥 굶주린 배를 채우려는 것뿐이었지요. 바가지에다 똥을 싸놓는 버릇에 대해서는 뭐라고 설명드릴 길이 없네요.......


늘 보아와서 그렇겠지만 청년회장은 경이로운 풍경을 대하고도 별다른 감응을 느끼지 않는 듯 이야기에 열중했다.


하지만 나는 그 경이로운 풍경에 사로잡혀 입을 반쯤 벌린 채  월화와  인화가 남의 집 바가지에 똥을 싸지르고 다닌 에 대해 상상하고 생각해야 했다.


도대체 왜 그랬는지 나도 궁금했다. 왜 하필 남의 집 바가지에 똥을 싸질러 놓았던 건지. 하지만 막상 월화와 같이 있을 땐 까맣게 잊어버려서 끝내 물어보질 못했다.


- 월화네 아버지는 간질이 있는 데다 울화병이 들어 일을 못하혼자 산속에서 살고  있고, 월화 어머니는 아시다시피 어디에 취직하기에는 좀 부족한 면이 있거든요. 일을 한다고 해도 겨우 음식이나 헌 옷가지를 얻어 오는 정도지요. 그러니 아이들이 오죽 골았겠습니까.


사찰집사 내외  사이에 아들도 하나 있는데, 제 아들 정수하고 동갑내기이고 지들 딴에는 가깝게 지내는 모양입니다만 그놈은 중학교만 마치고 도시로 나가서 농기계 수리 기술을 배워서 그럭저럭 사는 모양입니다.


인모, 월화 오빠 이름이 인모입니다. 그놈은 무슨 결심을 했는지 율소리엔 발도 들여놓지 않습니다. 가끔 다녀가더라도 밤중에 왔다가 밤중에 돌아간다 하더군요. 제 딴에는 가족이 창피하고 짐스러운 모양이지만..... 여하튼 냉정한 놈입니다.


-.......


나는 저만치 치솟은 바위를 올려다보며 월화의 오빠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월화와 인화가 무서워하던 오빠라는 존재가 왠지 껄끄럽게 느껴졌다.


- 습관이라는 게 무섭습니다. 마을사람들은 요즘도 자기 집에 뭔가 없어지면 월화나 인화 소행일 거라며 수군댑니다. 




청년회장은 먼 데로 시선을 던지고 길에서 벗어나 앞서 갔다. 하천 둔치로 내려가는 오솔길 옆으로 풀숲이 우거져  있었다. 


청년회장은 산딸기를 발견하면 한 움큼씩 따서 내 손에 쥐어주었다.


- 사찰 집사는 다른 마을 총각과 정식 혼례까지 치르고 시집살이를 시작했지만 한 달도 채 안 지나서 소박을 맞았습니다. 모자란다는 게 그 이유였죠.


청년회장은 풀숲으로 들어가 산딸기를 따면서도 이야길 계속했다.


- 그리고 다시 재가를 한 데가 율오리고 간질 있는 월화의 아버지였습니다.

노총각에다 간질까지 있어서 그랬겠지만 월화 아버지는 월화 어머니가 재가든 모자라든 문제 삼지 않았고요. 두 분 다 상처가 깊으니 서로 소중하게 여기며 그럭저럭 남들처럼 살았는데, 츳츳.... 먼 친척에게 보증을 섰다가 전답을 다 날리고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앉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월화 아버지는 화병과 우울증에 시달려 왔고 간질도 심해져서.....  월화 어머니가 구걸해 오다시피 하는 음식으로 끼니를 연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월화의 탄생 비화도 들려주었다


사찰 집사의 실성기가 월화를 잉태했을 때 더 심해져서 달밤이면 희희낙락한 얼굴을 하고 들녘으로 싸돌아다니곤 했는데, 달빛이 교교한 어느  하천에 풍덩 들어가서 멱을 감다가 진통을 느끼고 그대로  월화를 낳았다는 것이다.


구름 사이를 간신히 드나들던 보름달이 때마침 구름을 모두 물리치고 대낮 같이 비추었고 그때까지도 없었던 달맞이꽃이 활짝 피어서 핏덩이를 에워싸고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핏덩이가 여느 아기들하고 다르게 우유를 뒤집어쓴 것처럼 고와서 눈이 부실지경이었고, 꼼지락꼼지락 기어 다니며 달맞이 꽃잎에 입 맞추는 것도 같고 달맞이꽃잎을 따먹는 것도 같았다나.


그래서 인모, 인화처럼 돌림자를 쓰지 않고 월화라고 이름을 지었다 했다.


- 월화 정도 미색이면...... 부사장님 보기엔 어떠셨습니까?


말을 하다 말고 침묵하는 게 그의 습관인 듯 보였다.


-.......


청년회장의 느닷없는 질문에 나는 대답을 못했다.


- 참, 아깝습니다.


그는 뭐가 그리 안타까운 지 한숨까지 훅 내뱉었다.




산딸기를 따서 서로 주거니 받거니 나눠 먹다보니비경이 코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물둑에서 한참 올라온 그곳 두 개의 기암절벽 아래는 수영장만 한 물웅덩이가 있었다. 물웅덩이 저편에 펼쳐진 고운 모래밭 가장자리엔  적송 두 그루가 서  있어 마치 그려 놓은 해변 같았다.


꽁꽁 숨어 있던 그곳은 나중에 유원지로 개발되어 청년회장을 부동산 갑부로 만들어주었다.


하천과 잇닿은 청년회장의 수 천평 담배밭이 수십 배 높은 가격으로 개발업자에게 팔렸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그곳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처녀림이었다. 식견 없는 내가 봐도 그런 비경이 처녀림으로 남이 있다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청년회장은 산과 산 사이로 흘러내려오는 계곡물에 머리를 박고 물을 마셨다.


그리고 그는 계곡으로 사라졌다가 한참만에 내려왔다. 나는 쌍둥이 바위를 에워싸고 흐르는 맑은 물줄기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뛰어들어 수영을 하고 있었다.


- 부사장님, 시원하시겠습니다. 계곡에 올라가면 물이 얼음장 같은데 같이 가실 걸 그랬습니다.


빈손이었던 그는 손에 뭔가를 들고 내려왔는데 그걸 든 채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 이거 드세요.


그는 들고 있던 것을 흐르는 물속에  담그고 한참 닦아서 내게 내밀었다.


- 더덕입니다. 날 것으로 씹어드시면 어지간한 보약보다 좋습니다.


그가 준 걸 받아서 입에 넣고 씹으니 진한 향이 나면서 쌉쌀한 맛이 났다.


- 이렇게 날 것은 처음 먹어 봅니다. 그런데 담배밭엔 언제 가보시려고요.


- 돌아가는 길에 둘러보면 됩니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 부사장님, 사실은 제가 당부드릴 게 있어서 여기까지 모시고 왔습니다.


그는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을 했다.


- 기분 나쁘게 생각지는 마시고요.


하지만 나는 벌써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 월화를 조심하세요. 그 아이는 아주 매력적이고 마음을 빼앗기고도 남을 만큼 아름답지만. 자칫 부사장님을 한순간에 지옥으로 빠트릴 수도 있습니다. 내 말 반드시 명심하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큰일 납니다.


평소 말을 하다 말고 습관적으로 몇 초 동안 뜸을 들이던 그였다. 하지만 경고하는 그의 어투는 베일 것처럼 예리해서 숨이 막혔다.


그는 치밀어 오른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황한 나는 얼이 빠져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담배밭을 둘러보고 오는 길에 지나가던 경운기를 얻어 탔다. 그는 경운기 소음 속에서 목청껏 성가를 불러댔지만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월화가 선교관 안방에 숨어 있는 걸 그가 알고도 모른 척했던 것은 아니었을지 내내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한낱 촌부에게 휘둘리는 것 같아 기분이 몹시 나쁘고 불쾌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모든 면에서 그보다 훨씬 잘난 인간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되었을 뿐이었다.


그는 나보다 똑똑하거나 교활한 인간이었다.


나중에 안 거지만 그는 진즉부터 월화를 가지고 싶어 돈도 주고, 유명 메이커 옷과 비싼 음식을 사주기도 여러 번 했지만 결국 코를 끙끙거리며 월화의 항기를 맡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월화가 그에게만은 몸을 허락지 않은 이유를 내게 말해주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그의 아들 정수가 첫사랑인 데다 이미 10살 때 정수와 첫 경험을 치렀기 때문이었다.


술이 취한 월화는 정수 이야길 하면서 울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질투심 못지않은 아픔을 느끼곤 했었다.


- 미안해.


내가 월화의 손을 잡고 그렇게 말하면 그 아인 눈물을 훔치며 쿡쿡 웃곤 했었다.


정수의 아버지, 청년회장은 그것도 모르고 오랫동안 월화를 가지기 위해 나를 여러모로 이용하려고 했고 심지어 협박을 일삼았다.




며칠 뒤였다. 월화가 불쑥 선교관 문을 밀고 들어왔다.


월화의 얼굴은 순백의 꽃처럼 은은하게 빛을 발했고. 검은 머리카락은 어깨 위까지 물결치듯 흘러내렸다. 그 아이의 눈은 그다지 크지 않으면서도 우주를 품은 듯 칠흑 같은 빛을 내뿜었고, 그 눈동자에서는 온갖 오묘한 조화가 일어나는 듯했다.


콧대는 곧게 솟아올라 있으면서도 거만하지 않았으며, 입술은 붉으면서도 안온하게 불타올랐다.


솔직히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독이든 향기를 마신 것처럼 이성과 신앙심은 마비되었고 청년회장의 경고성 충고 따위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열다섯 소년의 마음으로 여신을 대하는 듯 온순하기만 했다.


처음 공터 주차장에서 봤을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고 비를 맞고 선교사관으로 뛰어들었을 때 하고도 달랐다.


청각으로 사람을 미치게 만들 수 있고 후각을 통해 사람을 마취할 수 있듯이 시각을 통해서도 사람을 마비시킬 수 있다면 내가 그날 본 월화의 아름다움이면, 바로 그만큼의 아름다움만 있으면 사람의 영혼까지 마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자기야, 가자!”


월화의 말은 마비된 나를 설레게 했다. 그리고 순종하게 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나는 무작정 옷을 갈아입으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월화가 가자는 그곳이 설사 지옥이라도 상관없었다.


잠시 후 월화가 물컵을 손에 들고 다가왔다. 그 아이는 갈증 난 듯 물을 홀짝이며 말했다.


“청바지 같은 거 없어? 트렁크에 있는 거 봤는데. 청바지에 편안한 티셔츠 입어. 난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늙수그레한 인간들한테 질렸다고. 내가 아는 경찰 서장, 지검장, 병원원장, 변호사, 부장판사, 교수, 사업가 들은 죄다 늙었어. 나도 늙다리 말고 영계하고 좀 놀아 보자.


나는 그제야 습관적으로 넥타이까지 매고 있는 내 옷차림을 내려다봤다.


간이테이블 위에 물컵을 내려놓은 월화가 옷장을 뒤져 평상복으로 입던 청바지와 반팔 티셔츠를 골라주었다.


나는 월화에게 몇 번이나 엉덩이를 걷어차이고 나서야 겨우 청바지를 입을 수 있었다.


옷을 다 갈아입고 오는데 웃말에 멈춰 서 있던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게 보였다.


앞산의 노을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미 해는 지고 산기슭을 따라 띠를 두른 것처럼 남아 있는 붉은 노을의 잔영이었다.


사위는 벌써 흐린 어둠 속으로 침몰하고 있었다. 짧은 저녁 어스름은 언제나 나에게 어떤 위엄과 엄숙한 기도처럼 느껴졌다.


순간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았다. 엄중한 신의 눈동자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떨어트리고 차에 올랐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슬픔이 밀려들었다. 지만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사로잡힌 듯 자동차 열쇠를 꽂고 돌렸다. 부릉




마을 앞 큰길로 내려가는데 때마침 골목에서 튀어나온 방역차가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좌회전해서 돌아가려다 방역차에서 내뿜는 안개를 피해 대문 안쪽으로 비켜섰다. 하지만 순식간에 방역안개가 주변을 뒤덮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까 동네아이들 대여섯 명이 함성을 지르며 방역차 뒤를 쫓았다.


리고 아이들 뒤로 수미가 들뜬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 수미가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작가님들 읽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늘 건강조심하시고요. 언제나 행복하시길 바랄게요.


감사드립니다. 또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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