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세벽 Nov 27. 2023

월화 6-1

어느 해변에서 만난 소나기처럼

음악에 맞춰 자유롭게 두드리다보니 ........

정말 오랜만에 올리는 소설입니다.

말없이 기다려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언제 올릴 거냐고 묻고 독촉하신 분께도 감사드립니다. ㅠㅠ


이렇게나마 쓸 수 있는 건 모두 작가님들 덕분입니다.


사실 지난주에 쓴 걸 저장하지  않고 다른 일 하다가 날려먹고 다시 쓰느라 마음고생 좀 했습니다.



글구 제가 서둘러 음반 발매할 거라 입방정을 떨었는데.... 죄송합니다.

녹음 결과가 좋지 않아 다시 녹음하기로 했습니다.

제 노력이 부족했던 탓이 컸기 때문에

발성 훈련과 노래연습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여기서부터 소설입니다.


사놓고는 별로 입어 볼 기회가 없었던 핑크색 체육복을 꺼내 입고 집을 나섰다.

자고 일어나니까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그려보던 삶이 마침내 실현된 기분이었다.




그날들은 여유롭고 활기찼는데 무엇보다 삶 자체가 뿌듯하고 가벼웠는데...... 사라져 버린 혹은 돌아오지 않는 그 남자의 교정 노트를 훔쳐보고 있자니 그날들이 슬픔으로 채색되고 아픔으로 변질되는 것 같다.




어깨에서 팔목까지 그리고 바지의 재봉선을 따라서 발목까지 하얀 띠가  줄로 박혀 있는 핑크색 체육복은 흔하다.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든 살 수 다. 그러나 그 옷을 입고 휴일 아침을 즐겁고 상쾌하게 달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는 자기도취  혹은 자기만족에 빠져 낙엽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뒹굴기 시작하는 거리를 사뿐사뿐 뛰었다. 겨울로 가는 초입이라는 건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말이다.




도대체 그 남자가 사라져 버릴 이유가 없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하다 못해 사소한 다툼조차 없었다. 한 번도 다투지 않았다는 것이 그 남자를 질리게 만들었을까?


나는 그 남자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한 바탕 싸워볼 생각인데.........


아, 몇 개월.......  그 남자와 함께 한 시간이 고작...... 몇 개월이라니....... 평생을 그 남자와 함께 한 것 같은데......


시간은 얼마나 주관적으로 흘러가는지......




산 초입에서부터 시작되는 경사로를 따라서 정상을 향해 뛰었다. 그러다 숨이 차면 잠시 멈추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허리를 굽히고 한 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괴롭게 숨을 헐떡대면서, 나는 한 마리의 연어를 생각하곤 했다.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다 폭포를 만나면 거세게 꼬리를 치며 역류를 헤치고 기어오르는 그 힘찬 몸짓을.


지금에서야 나는 연어의 그 몸짓에 연민을 느낀다. 사나운 물살을 헤치고 거슬러 오르려 발버둥 치는 그 몸짓이 눈물겹다.



공무원이라는 꿈을 어렵게 이루고도 외로움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곧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때문에 몹시도 사나워졌고 쌀쌀맞은 삶을 살았다.


그러나 나는 잃어버린 나에게로 회귀하는 중이었다. 마침내 도달해야 할 모천이 어딘지도, 무엇인지도 모른 채 폭포를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힘찬 도약이라 믿으면서.   




내 목표는 정상이었다. 때문에 나는 약수터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지나쳐서 정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에 다다랐다.


허탈하게도 그곳엔 정상임을 알려주는 표지판만 있을 뿐이었다. 버려진 묘비 같은 화강석엔 해발 470미터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평소에도 야트막하다는 생각을 하고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언젠간 한번 오르고야 말리라고 벼려왔었다. 하지만 막상 오르기 시작하자 아뜩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다다랐을 땐 세상 꼭대기에라도 오른 것 같았다.



내겐 결코 야트막한 산이 아니었다.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은 히말라야 정상 같은 그곳에서 나는 휑한 바람을 반겨주었고 쓸쓸함이 아니라 벅찬 감동을 느끼며 옷소매로 이마와 목덜미에서 쏟아져 내리는 뜨거운 땀을 연신 닦아냈다.


나는 비좁은 산 정상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따뜻한 인사를 건넸고 비켜주는 아량도 보였다.




그 남자, 어쩌면 사랑일지 모르는 그 남자 때문에 나는 상대가 비켜줄 때까지 사납게 버티는 여자에서 기꺼이 양보하는 상냥한 여자로 바뀌었는지 모른다.


그즈음 나는 엄마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뒤늦은 눈물을 흘렸고 심지어 아버지와 할머니까지 용서할 마음이 생겨나곤 해서 곤혹스러웠다.


그 남자가, 혹은 내 마음속에 생겨난 사랑이 나를 바꿔놓고 있었다.  




그 남자가 나한테 무엇을 해주었는데,라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그 남자가 나한테 해준 것이 없다고도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준 것도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서로에게 무엇을 해주어서가 아니라 서로에게 무엇을 해주고 싶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리석지만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는 지성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는, 그러니까 똑똑하지 못한 어쩌면 바보천치 같은 면이 있는 감정이다. 내겐 그랬다. 사랑이 그랬다.




나는 그 남자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실제로 무엇이든 해주지는 못했지만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 남자의 교정 노트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 남자를 기다리며 돌아오기를 꿈꾼다.  교정 노트 따위는 얼마든지 무시하고 눈감아 줄 수 있다. 설마 사형수였다고 해도 나는 그 남자에게 실망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정상 아래 숨어 있는 약수터로 내려갔다.  물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바가지를 들고 기웃거리자 물을 받고 있던 아저씨가 양보를 해줬다.


“받아가는 사람보다 마시는 사람이 먼접니다.”


아저씨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아무튼 나는 엄청나게 많은 물병들이 채워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 고마웠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물을 반쯤 마셨다.


그 남자와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보였다. 아파트로 이사 한 뒤로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이 약수터에 올라가서 아침 운동을 해보겠다는 다짐을 수도 없이 해왔다. 하지만 한 번도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이제는 매일 아침마다 올라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결심이 아니라 삶이 나에게 동기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당시엔 그랬다.




바가지를 제자리에 걸어 두고 약수터 옆 생활체육공원으로 다가갔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운동에 열중이었다.


고함치지 마세요. 주의 사항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산인데도 소리를 지르면 안 되는 것이었다. 아마도 산 아래 주민들의 항의가 있었던 것 같다. 그도 아니면 바로 이곳에 모인 사람들조차 야호 소리를 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을지 몰랐다.




산 아래를 향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야호,라고 외쳐봤다. 웃음이 나왔다.


- 미녀 씨!


그때였다. 그 남자가 다가왔다. 남자는 내 이름을 두고도 늘 그렇게 불렀다. 미녀라고.......


- 어머, 남자 씨!


나도 그 남자의 이름을 두고 그렇게 불렀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미남이라고 불러주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 남자가 미남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나는 누군가를 칭찬하는 일에 서툴렀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집을 오가며 함께 술을 마시고 음식을 나눠 먹고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도심 한 복판에 있는 그 산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 남자도 나도 아침에 일어나 그 산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바로 전날 우리는 약간의 술을 마시고 함께  잠을 잤다.


그 남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듯하더니 내 볼에 입을 맞추고 자기 집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산에서 그 남자를 보니까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 남자의 팔짱을 꼈다. 내려가는 길에 그 남자가 내 손을 잡았다. 경사가 심했던 탓이지만 완만한 길에서도 그 남자는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월화 6-1.


오후 늦게야 잠에서 깼지만 거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 때문에 침대에 엎드린 채 선뜻 일어날 수가 없었다.


수미가 그때까지도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자고 있는 나를 그냥 두고 갈 수 없었던 건지 모른다. 무작정 서울로 돌아가 있으라고만 해놓고 안방으로 들어와서 누워버렸으니까.




거실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 느낌이었다. 보이는 것들은 모두 반짝반짝 빛이 났다.


아마도 수미가 모든 것을 쓸고 털고 닦아냈을 터였다. 게다가 정리 정돈이 되어 있어서 타락한 내 영혼에 안정감과 알 수 없는 평화로움을 안겨주는 듯싶었다.


하지만 그것을 죄책감 없이 받아들이기에는 지난밤, 아니 새벽녘 내가 수미에게 저지른 일들이 너무 잔인하고 무례하고 비열했다는 자각과 함께 수치심이 해일처럼 덮쳤다.




너는 중학교 때부터 나를 미래의 남편으로 생각했다면서 어떻게 순결을 지킬 수 없었던 거지. 부모님들끼리 약혼한 걸 네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살아왔다면서 도대체 왜 순결을 날려버린 거냐고. 난 그깟 약혼 따위는 농담으로 들어 넘겼어도 동정을 지켜왔는데.


동정을 늙은 창녀에게 돈까지 줘가며 불살라버려 놓고도 나는 뻔뻔하게도 수미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깟 순결이니 동정이니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나는 당시 바보가 아니라면 문제 삼지 않을 순결과 동정에 꽁꽁 묶여서 괴로워했다.




몇 개월 만에 수미를 만나 호텔로 직행했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수미가 내뱉는 교태어린 신음 소리를 듣는 순간 하마터면 그녀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죽일 뻔했다.


당시 나에겐 사악한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 아름다운 신음 소리를 좋아하기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세뇌된 인식을 부수고 무너트리고 내다 버리느라 고통의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월화는 석녀였다. 그 아이는 관계 때마다 새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신음소리를 내곤 했지만 모두 가짜였다.


월화의 어머니, 사찰집사가 월화가 어렸을 때 똥통에 빠지면서 사타구니를 크게 다친 적이 있다고 말해서가 아니었다.


월화와 관계하면서 나는 그 아이의 신음 소리가 가짜라는 걸 곧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그 아이가 안쓰러워 신음 소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계속해서 신음 소리를 냈고 가끔은 웃어 젖히곤 했다. 자기가 생각해도 자신의 신음이 우스웠던 모양이었다.




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그 아이의 아래를 핥았다. 그리고 생각날 때마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가며 아래를 살펴봤다.


하지만 똥통에 빠져 다친 흔적 따위는 찾지 못했다. 월화의 불감증은 어쩌면 그녀 자신도 모르는 마음 깊은 곳 상처 탓이 아닐까 싶다.


지금 생각해 보면 누구를 위해 불감증인 그 아이의 아래를 그토록 열열이 핥아댔는지 알 수가 없다.  




월화가 어떤 늙은 놈팡이 놈의 꾐에 빠져 한 달 정도 동남아로 여행을 가버렸을 때였다. 나는 복수심에서 그 아이의 언니 인화와 날마다 호텔을 전전하며 잠자리를 했다.


 (우리 모두에게 아픈 혹은 슬픈 기억을 남기고 떠난 인화에 대해서는 나중에 적기로 하자. )


내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 탓인지-나는 그제야 월화가 나에게 만족하지 못해서 이 남자 저 남자 사이를 넘나 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바보천치 같은 생각이었다. - 아니면 우연이었는지 모르지만 인화의 몸은 가끔 전율했고 그럴 때마다 그 아이의 입술 사이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인화, 그 아이는 자신의 신음 소리를 부끄러워했고 심지어 더럽다고까지 했다.


나는 그 아이가 멍청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고 도도하고 심지 있는 것 같다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아이는 사랑도 없이-인화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밝혔고 그래서 절대 입술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와 잠자리를 가졌고 월화가 돌아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조금 전까지 인기척이 들려오던 거실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집안을 두리번거리며 욕실문을 열었다. 금방까지 들리던 수미의 목소리가 환청이었던 것일까 싶을 정도로 집안은 고요했다.


바지를 끌어내리고 좌변기에 앉자마자 오줌발이 쏟아졌다. 비우는 쾌감 속으로 끼어드는 불쾌한 장면들.




월화와 늙은 신사가 뒤엉킨 채 나뒹구는 모습. 늙은 신사의 바리톤 음성. 우리들은 월화를 여신으로 부릅니다. 달의 여신 난나라고. 태양의 신 샤마시의 어머니죠. 월화는 신이기 때문에 선택받는 자만이 은총을 입을 수 있습니다. 월화의 선택은 어느 때든 상관없이, 몇 명이든 상관없이 성결합니다. 사교邪敎모임에 끌려갔다 온 것처럼 머릿속이 혼미해졌다.


꿈이었던 것일까. 나는 그 뒤로 늙은 신사를 만나지 못했다.  




나는 수건을 목에 두른 채 거실 창 가까이 다가가 마당을 바라봤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장갑을 끼고 마당을 치우던 수미가 안을 들여다봤다. 찢어지고 구겨진 종이상자들. 마당 귀퉁이에 버려진 검게 그을린 솥단지. 전에는 개가 살았으나 지금은 개가 살지 않는 낡은 개집. 사람 밥그릇이었다가 나중엔 개밥그릇으로 쓰였을 찌그러진 그릇. 모양과 재질이 다른 각종 병. 나무 조각과 합판 쪼가리.


나는 어질러진 마당 주변과 익숙해지려고 노력해 왔는데 수미는 치울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어느새 어지럽던 마당이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수미가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환하게 웃는 수미와 어색하게 눈이 마주쳤다.




나는 다시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 아래서 지난밤을 생각했다. 아니 어젯밤 일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저수지에 빠진 줄 알았던 월화가 길 위로 달아나가는 것을 보고 나는 뒤쫓아갔다.


 


이어서 계속됩니다.


읽어주신 작가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건강조심하시고요.

늘 행복하시길 바랄게요.


또 뵐게요. 감사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바빠도 너무 바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