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원장이 병실문을 열고 들어왔다. 건장한 남자 간호사도 함께였다. 침대에 묶여 있던 벨레는 분노로 들끓었다. 하지만 입원 후 강제로 삼켜온 약물에 취해 있어서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 미친 것들. 어서 풀지 못해.
벨레는 마리아를 뚫어져라 쏘아보며 안간힘을 다해 소리쳤다. 그러나 입 밖으로 튀어나온 그의 분노는 녹아 흘러내리는 액체처럼 흐물거렸다.
- 알았어요. 풀어줄 테니까 이 문답서를 작성해 봐요. 민철 씨가 미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는 겁니다.
마리아가 차분하지만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로 민철을 달랬다.
- 신들의 하수인 따위가 감히 나 벨레를 가두고 묶다니. 이 벨레가 프시와 합일을 이루는 게 두렵구나. 그러나 이제는, 이번에는 우리의 합일을 막지 못한다.
벨레는 원장이 내민 문답지를 낚아채듯이 받아 들고 중얼거렸다.
- 머지않아 신들은 우리를 찢어놓은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수많은 신들이 우리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날 너희를 불살라 짐승의 먹이로 던져주겠다. 잘 익은 너희 몸뚱이로 짐승들을 살찌우게 하리라.
그는 문답서를 작성하면서도 연신 코웃음을 치고 쉴 새 없이 지껄였다. 그리고 그는 작성한 문답서를 허공에 던져버리고 입과 눈썹을 실룩거렸다.
- 이 따위 종이 쪼가리로 위대한 벨레를 시험하다니.......
그리고 또다시 입안으로 밀어 넣는 약을 삼키며 천년 같은 사나흘이 지난 뒤였다.
벨레는 두 명의 남자 간호사에게 둘러싸여 원장실로 끌려갔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마리아가 그를 힐끔 올려다보고 이내 책상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 이건 신들의 음모야.
벨레는 두 눈을 부릅뜨고 원장의 귀 가까이 대고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두 남자가 재빠르게 그의 양팔을 낚아채고 꼼짝 못 하게 하는 바람에 신음소리처럼 입술 사이로 새 나왔다.
마리아가 그를 날카롭게 쏘아봤다. 그도 지지 않고 그녀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그녀의 오뚝한 코와 찢어진 눈, 갸름한 턱, 그리고 넓은 어깨가 역겨웠다.
- 더럽고 냄새나는 창녀. 신의 하수인.
그는 고개를 외로 돌린 채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내 흐흐흐 웃음을 흘렸다.
산 중의 동굴에서 태어난 헤르메스. 태어나자마자 아폴론이 지키고 있던 암소를 훔쳐 온 사기꾼 도둑놈.
소를 숲 속에 숨겨 놓고도 소를 찾으러 온 아폴론에게 동굴에서 나간 적이 없다고 거짓말을 한 간계와 거짓 맹세의 신. 내 영혼을 훔쳐가려고 하는 변장한 헤르메스.
영혼을 옮겨 가는 제우스의 하수인. 흐흐흐........
- 당신은 사기꾼 헤르메스야. 내가 모를 줄 알고.
벨레는 마리아를 바라보며 혀를 내밀고 뱀처럼 흔들었다.
벨레의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이어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누군가 들어왔다. 평범한 차림의 초로의 여자였다.
- 민철아. 엄마야. 알아보겠니?
여자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 어머니!
- 그래. 엄마야. 이제야 알아보는구나.
-.......
벨레는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 조현병, 그러니까 정신분열증입니다.
마리아가 단호한 어조로 벨레의 어머니에게 통보했다.
-.......
연신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던 그의 어머니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아드님은 지금 심한 환청과 환영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그를 일별하고 다시 그의 어머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심하고 사무적인 태도였다.
- 개 좆같은 소리 하고 있네.....
어머니조차도 두려움에 떨게 할 만큼 벨레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 오 나의 어머니, 어머니는 내 말을 믿어야 합니다. 프시, 그래요 다들 아지라고 불렀던 그 아이가 누군가의 몸을 빌려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어서 가서 그 아이를 찾아야 합니다. 어서 여기서 나가야 한다고요. 저 여자는 나 벨레와 프시와의 합일을 방해하려고 온 신의 하수인입니다.
벨레는 눈자위를 허옇게 드러내고 소리쳤다. 그리고 마리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내 남자들이 그의 양팔을 강하게 붙들었다.
- 가만있지 못해. 어디서 난동이야.병실로 데려가.
마리아가 무섭게 호통쳤다.
- 저리 꺼져, 제우스의 하수인들아. 절대로 프시와 내가 합일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어.
어머니, 이 사람들의 말을 믿지 마세요. 우리가 신들보다 더 진보하고, 신들보다 더 큰 능력을 갖게 되자 제우스가 우리를 찢어놓은 거예요.
제우스가 프시와 나의 합일을 막고 있다는 걸 아셔야 돼요. 우리가 이루어놓은 은빛세계를 제우스가 시기하고 있는 겁니다.
어머니, 제발, 나를 놓아주라고 하세요.
벨레는 남자들의 손아귀에 붙잡힌 채 끌려가면서 발악을 했다.
어머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들썩이며 더욱 흐느껴 울기만 할 뿐이었다.
- 이 개새끼들아. 이 좆같은 영혼들아. 제우스의 똥구멍이나 핥아먹는 신들아.
어머니, 미련한 여자야. 내가 어디 너, 여자를 닮은 구석이 있더냐. 아니면 아비를 닮았더냐.
여자야. 니가 항상 말하지 않았느냐. 어릴 때부터 내 몸에서 향기가 나고 살결이 이 세상 사람 같지 않게 투명하고 곱다고 내 얼굴이 신처럼 아름답다고. 잊었느냐.
이 어리석은 여자야. 니가 유다처럼 이 세상을 구할 안드로규노스를 제우스의 도당에게 팔아넘기느냐.
벨레는 소리를 지르며 병동으로 끌려갔다.
- 조현병 환자한테 그런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향기가 난다는 둥....... 악화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거칠고 사나운 어투로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는 당황스런 속내를 감추느라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들은 철문 안으로 그를 밀어 넣고 문을 잠갔다.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독방이었다.
- 난동 피우면 또 묶습니다.
남자 하나가 벨레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그제야 벨레는 자신이 묶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당신의 선행은 반드시 보답을 받을 거다.
알 수 없는 평화와 안정을 되찾은 벨레는 자신이 끌려온 복도를 바라봤다. 남자들이 사라지고 복도는 텅 비었다.
그러나 또다시 두려움과 분노가 폭풍처럼 달려들었다.
그는 철창에 매달려 목에 핏대를 세우고 제우스와 어머니를 저주했다.
하지만 그의 분노에 찬 외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대신그는 날이 갈수록 기운을 잃고 쇠잔해져 갔다.
간호사에게 침을 뱉거나 성기를 꺼내 자위를 하는 일도 멈추었다.
그는 밥만 먹고 잠만 잤다. 그러는 동안 그의 얼굴엔 새롭게 살이 올랐다. 눈빛도 되살아났고 기운도 차렸다. 그는 더 이상 포악하게 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능청스럽게 애교를 떨었다.
어딘지 모르게 과장되거나 의도된 표정이긴 해도 그의 얼굴엔 여유와 자신감이 넘쳐 보였고 말투는 부드럽고 조리가 있었다.
몇 번의 면담이 있은 뒤였다. 마리아는 벨레를 독방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주었다. 여태껏 감금되었던 독방과 달리 병실문은 열려 있었고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그러나 신중하고 과묵했던 벨레의 성격은 예전 하고는 확연히 달라졌다. 그는 말이 많아졌고 말을 하면서도 과장된 몸짓을 하거나 자주 웃음 띤 얼굴을 했다.
사람들과도 잘 사귀었고 자진해서 병동을 돌며 청소를 하기도 했다. 더러운 욕실 세면대를 반짝일 정도로 닦는 것도 그였다.
기진해서 누워 있는 사람의 배 위에 올라타서 팔딱팔딱 뛰고 있는 미친 남자를 끌어내리고 훈계를 하거나, 침상에 오줌을 싸놓고 울고 있는 사람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은 순전히 그의 몫이 되었다.
병동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그를 찾았다. 마리아조차 벨레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벨레는 병동에 갇힌 순박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병원에서 구출해야 한다는 좀 더 구체적인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
벨레에게 병동 사람들은 정신병자가 아니라 인간의 진정성 회복을 위해 신들과 맞서 싸우다 잡혀온 의로운 사람들이었다.
- 이 지구의 이면이자 먼 미래인 은빛세계에 존재의 한계를 극복한 초인의 초인이 탄생했는데 바로 그가 안드로규노스였던 겁니다.
그 초인의 초인은 육체와 영적 한계를 극복하고 신의 경지조차 초월했습니다. 그 초인의 초인, 즉 안드로규노스를 신전으로 초대한 제우스는 자신의 도당을 시켜 수억만 년 동안 한 번도 열린 적 없는 고독의 문을 열고 그를 던져버렸습니다.
그렇게 은빛세계의 스승인 안드로규노스는 제우스의 간악한 흉계에 빠져 둘로 쪼개진 채 고독의 공간에 떨어졌던 겁니다.
그러나 안드로규노스는 은빛세계의 이면이자 과거인 푸른 별 지구를 발견하고 합일을 이루기 위해 다시 태어났습니다.
불행히도 태어나면서 모든 능력은 묻혀버렸고 몸은 순전히 육화 되고 말았습니다.
은빛세계의 기억마저 지워지고 합일의 갈망만 어렴풋이 남아 있었지만 다른 한쪽을 만나면 기억을 회복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기억은 능력이며 은빛세계로 열린 길입니다.
그가 합일을 이루어 신들의 계략에 빠진 이 지구의 미래인 은빛세계를 구할 것입니다.
벨레는 하얀 침대커버를 유대인처럼 몸에 두르고 다니며 병동의 사람들에게 인화(人話)를 들려주었다.
깊은 밤, 사람들은 모두 잠이 들었고 병동은 고요한 침묵 속에 빠져 있었다. 벨레는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달빛을 바라보며 눈물짓고 있었다. 프시가 그리웠다.
누군가 그의 침상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소매 깃으로 눈물을 닦고 침상 가까이 다가와 무릎을 꿇고 있는 세 명의 남자를 내려다봤다.
- 선생님, 우리가 기다리는 안드로규노스가 바로 당신이십니까.
그들 중 한 남자가 말했다.
- 내가 말한 적이 없는데 너희가 어떻게 알았느냐.
- 안드로규노스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 많은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 너희는 나를 따르라.
벨레는 그들을 지긋이 내려다보며 침상에 누운 채 말을 하기 시작했다.
- 은빛세계는 이미 너희 것이다. 나는 신의 계략에 빠져 암흑의 고독의 공간에서 억겁의 세월을 외로움과 추위에 떨었지만 그리운 내 짝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이는 은빛세계에 대한 내 사랑이다.
- 선생님께서는 우리 중 누군가와 합일을 이루려고 하십니까?
이번엔 나이가 좀 어린 남자가 말했다.
- 나는 너희 모두와 이미 합일을 이루었다. 하지만 내가 이제 또다시 이루어야 할 합일은 잃어버린 내 반쪽을 찾아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 그러면 또 한 분의 선생님은 어디 계십니까?
처음 말했던 남자였다.
-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할 수 없다. 그는 늘 내 가까이 있으나 신의 훼방으로 인해 멀리 있으며 신의 벽을 깨트리는 순간 우리는 만날 수 있다.
- 만나는 순간 합일이 이루어지고 은빛세계가 도래하는 겁니까?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남자가 물었다.
- 그건 아직 모른다.
- 어떻게 선생님조차 모를 수가 있습니까?
- 아직 합일이 이루어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
- 게다가 난 불완전하다. 어쩌면 그래서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한 건지 모른다. 내가 완전해지면, 즉 합일을 이룬 후에는 너희들을 은빛세계로 먼저 데려가겠다. 너희는 그곳에서 나와 함께 영원히 신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충성을 맹세한 추종자들은 벨레가 합일을 이룰 수 있도록 세상으로 내보내기로 했다.
그들이 벨레를 세상으로 내보내는 일은 억울한 자신들의 삶을 만회하는 길이었고, 세상을 구하는 길이었으며, 은빛세계로 가는 길이었다.
그들은 며칠 동안 열띤 토론을 거쳐서 구체적인 탈출계획을 세웠다. 마리아 원장을 인질로 삼고 텔레비전 방송사와 인터뷰를 하면 그를 기다리고 있던 프시가 나타날 것이고, 세상 사람들은 안드로규노스의 존재를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추종자들은 판단했다.
추종자들은 이 기회에 자신들이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방송국을 통해 가족과 회사, 그리고 이 사회에 알릴 작정이었다. 그렇게 함으로 자신들을 모함한 누군가를 처단하고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명예를 회복한 뒤에는 스승인 안드로규노스와 함께 은빛세계로 가려는 꿈이 추종자들에게 있었다.
정신병원에서 나가기만 하면 정치권력을 한 손에 쥐고 세상을 낙원으로 바꾸어놓겠다고 호언장담해 온 위대한 정치가 노만호가 탈출위원회의 행동대장으로 지명되었다.
노만호는 자기가 되찾는 모든 권력을 은빛세계의 회복을 앞당기는데 쓰도록 하겠다고 맹세한 충성심 강한 제자였다. 노만호는 육재현과 민상규를 부대장으로 임명했다.
육재현은 자신이 컴퓨터 천재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윈도 프로그램이 그 증거며 하버드에서 공부할 때 알게 된 빌게이츠(육재현은 빌게이츠보다 스무 살은 어렸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반박하거나 의심하지 않았다.)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윈도프로그램을 훔쳐간 뒤로 자신은 악당들에게 쫓기다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민상규는 삼성과 현대 그리고 엘지와 같은 대기업의 실제 총수라고 늘 자랑해 왔다. 민상규가 가끔 무거운 얼굴로 털어놓은 그 내막은 대강 이러했다.
자신이 땀 흘려 일구어놓은 기업을 누군가 정부와 기업의 서류를 전부 조작한 뒤에 빼앗아 갔다는 것이다. 그는 곧바로 소송을 재기했으나 판관들 대부분이 뇌물을 받아먹었기 때문에 올바른 판결을 내릴 가능성은 거의 없고 혁명에 의해서만 명예와 부를 되찾을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은 힘을 합해서 인류가 하루속히 진보하여 은빛세계로 나아가게 하는데 기여하겠다고 서약하고 충성심이 식지 않도록 매일 밤 잠들기 전 한차례 씩 맹세의 의식을 가졌다.
그러나 탈출 계획은 거사를 하루 앞두고 밀고자의 배신으로 들통나고 말았다. 그 일로 주모자인 벨레는 다시 독거 수용되었다. 하지만 벨레는 분노하지 않았다. 침묵을 지키며 기다렸다.
노만호와 육재현 그리고 민상규는 벨레가 혼자서 꾸민 일이라고 발뺌했다. 마리아 원장은 그들 사이의 정신적 유대를 끊어놓기 위해 추종자들을 용서해 주는 심리전을 썼다.
마리아 원장이 벨레를 원장실로 불렀다. 원장실 안에는 또 다른 방이 있었다. 원장은 그곳으로 벨레를 데리고 들어갔다.
- 민철 씨, 많이 힘들었죠.
사납던 마리아 원장이 전에 없이 부드럽고 자상한 목소리로 벨레를 대했다. 병동에 오기 전에 어머니와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을 원장의 목소리로 듣자 마음이 착잡해졌다. 은빛세계를 모른 채 평범한 인간으로서 살아온 날들이 아프게 되살아났다.
- 민철 씨처럼 잘생기고 똑똑한 사람이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려고 해요. 얌전하게 있어야 여기서 나갈 수 있어요. 마음을 굳게 먹고 환상과 환청을 부인해 보세요.
아니 민철 씨가 거짓이라고 믿는 현실을 받아들여요. 민철 씨에게는 의지가 있잖아요. 그 의지로 두 개의 세계 중 하나를 선택하는 거예요. 현실의 세계를 선택하는 순간 여기서 나갈 수 있어요.
나를 납치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민철 씨를 믿지 않아요. 텔레비전에 대고 소리쳐도 소용이 없어요.
마리아 원장은 너그럽고 자상하게 벨레를 설득했다. 하지만 벨레의 귓가에서는 마리아를 경계하라는 목소리가 끊이질 않고 들려왔다.
- 그러지 말고 이리 와 봐요.
마리아 원장이 그의 볼을 두 손으로 감싸고 음흉하게 웃었다.
- 여자를 느껴보세요. 민철 씨의 반쪽은 어디에나 있어요. 또 바뀔 수도 있고, 내가 민철 씨의 반쪽이 되어 줄 수도 있어요. 그게 바로 진실한 세상이에요. 아니 민철 씨에겐 거짓된 세상이겠지만 그걸 깨뜨려야만 해요. 자, 내 말을 믿고 새로운 진실을 받아들여 봐요. 내가 밖으로 내보내 줄게요.
마리아가 벨레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가슴에 댔다.
- 어서 나를 만져 봐요.
마리아 원장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
- 어때요, 반쪽의 느낌이.......
마리아는 벨레의 다른 한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치마 속으로 밀어 넣었다. 벨레는 축축하고 미끈한 느낌을 받았다. 불쾌했다. 힘껏 손을 빼내고 마리아 원장을 밀쳤다.
벨레는 다시 독방에 갇혔다. 며칠 뒤, 보호사라고 부르는 남자들이 그를 눕혀놓고 강제로 주사를 놓았다. 그는 몽롱한 채 마리아에게 끌려왔다.
마리아는 약 기운에 취해 있는 벨레를 간이침대에 눕혀놓고 옷을 벗겼다.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자신을 가눌 힘조차 없었다.
독신녀인 마리아가 알몸으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마리아 원장은 그의 배에 엎드려 암고양이 같은 신음을 토했다. 마리아 원장의 사타구니에서 나온 불쾌하고 끈적끈적한 질액이 그의 몸을 더럽혔다.
마리아 원장이 핥고 간 자리에서는 역겨운 타액 냄새가 났다. 마리아 원장은 그를 올라타고 격렬하게 몸을 뒤틀다가 오르가슴에 도달했다. 마리아 원장은 연거푸 세 번씩이나 오르가슴을 느낀 뒤에서야 내려왔다.
- 왜, 사정을 안 하는 거지. 특이한 체질이군. 아니 약 때문인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괜찮아. 나는 충분히 만족하니까. 민철 씨는 예상한 대로 정말 매혹적인 몸을 가졌어. 진작부터 느꼈지만 정말 탐스러워.
벨레는 다시 동료들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는 노만호와 육재현, 민상규를 너그럽게 용서하고 다시 제자로 받아주었다. 그들은 다시는 배신하지 않겠다며 그의 발등을 차례로 핥았다.
마리아 원장이 종종 그를 원장실로 불렀다. 그는 그때마다 약에 취한 상태로 강간을 당했다.
육체적으로 더럽혀지고 있다는 생각이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프시는 단 한 번의 강간을 견디지 못하고 육체를 버렸는데 날마다 강간을 당하면서 뻔뻔하게 숨을 쉬어야 하다니 살아 있다는 것은 나에게 모독이고 치욕이다. 그는 수시로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하지만 두개골 깊숙이 새겨진 프시의 마지막 편지가 언제나 그를 죽음의 벼랑 끝에서 돌려세웠다. 그래 육체적 순결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육체적 순결을 강요하는 것은 육체적 욕망일 뿐, 영혼이 바라는 것은 영혼의 순결뿐이다.
프시는 제우스가 인간의 머리통 속에 쇠말뚝처럼 박아놓은 관념에 속은 것이다. 누가 인간에게 육체적인 순결을 강요하고 육체적인 순결 때문에 목숨을 버리도록 했겠는가. 과연 몇 사람이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에서 순결을 끝까지 지킬 수 있다는 말인가. 순결 따위는 소중하지 않아. 치욕을 느낄 필요도 없다. 새로 태어났을 프시를 찾아야 해. 프시가 원하는 건 나의 죽음이 아니라 찾아옴이다.
그는 날마다 자신을 죽음으로 내모는 상념과 싸웠다.
어느 날 벨레는 자진해서 마리아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는 작고 탄력 없는 마리아 원장의 젖가슴을 애무했다. 마리아 원장은 성급하게 그의 머리를 아래로 밀어 내렸다. 그가 배꼽쯤 내려갔을 때 마리아 원장은 다리를 양쪽으로 벌리고 엉덩이를 쳐들었다. 피비린내와 지린내가 뒤섞여서 콧속으로 밀려들어왔다. 그는 역겨움을 간신히 참았다.
마리아원장이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몸을 움츠리는 순간이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열쇠꾸러미를 들고 밖으로 도망 나왔다. 알몸이었지만 부끄러움 같은 건 없었다. 오르가슴의 여운에 사로잡힌 마리아 원장은 벨레가 나가는 것도 모른 채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벨레는 열쇠로 병동의 철문을 열고 사람들을 탈출시켰다. 추종자들은 원장실로 뛰어 들어가서 마리아 원장을 묶었다. 마리아 원장은 의자에 묶인 채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간호원들과 남자직원들도 묶어서 그가 강간을 당하던 원장실 뒷방에 가두었다.
행동대장 노만호는 여비서를 시켜서 방송국과 신문사에 전화를 했다. 곧 기자들이 병원으로 몰려왔다. 인터뷰만 하고 나면 세상은 그들의 진실한 모습을 알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사방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기자가 들이대는 녹음기와 마이크 앞에서 그들은 차례로 인터뷰를 했다.
벨레는 은빛세계와 안드로규노스, 그리고 제우스의 음모와 프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추종자들은 재벌가 재산의 소유권과 빌게이츠의 부도덕성 그리고 정치세력의 배신에 대해 차례로 털어놓았다.
그들이 기자회견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몽둥이를 든 수십 명의 남자들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저항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다시 병동에 감금되었다. 이제는 세상이 자신들을 알아주겠지 했던 당당한 마음은 사라지고 원망과 실의에 사로잡혔다. 난동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분노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텔레비전 지방뉴스에서는 그들의 인질극을 정신병동의 해프닝 정도로 잠깐 보도했다. 지방신문의 가십난에도 그들의 탈출극이 조그맣게 실렸다.
벨레와 추종자 세 명은 제각각 독방에 수감되었다. 벨레는 상담 중에 마리아 원장을 강간하려 했다는 혐의까지 뒤집어썼다. 덕분에 그는 추종자들이 독방에서 나오고 난 뒤에도 몇 달 동안을 더 독방에 갇혀 있었다.
세 명의 제자는 다시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제자들은 스스로 충성심을 내보였다. 마리아 원장은 더욱 당당하게 벨레를 원장실로 불러 강간했다. 그는 마리아 원장의 간곡한 권유에 설득이라도 당한 것처럼 차츰 현실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환상의 세계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그는 스스로 마리아 원장을 찾아가서 만족시켜 주었다. 그렇다고 환상과 환청이 사라지는 것도, 프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선가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프시의 목소리가 끝없이 들려왔지만 그는 사람들, 특히 마리아와 어머니 앞에서 두 세계를 가려내는 훈련을 끊임없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