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로맨스 공모전에 당선되어 출간한 작가였지만 새로운 각오로 내로라하는 문학상 공모전에 투고를 했거든요.
당시 마흔이 넘은 나이였습니다.
마흔에 첫 책을 냈으니까 많이 늦은 출발이었던 겁니다.
아무튼 투고한 문학상 담당자에게 온 전화를 아내가 받았는데. 나이와 직업 따위를 물어보고 그냥 전화를 끊더군요.
당선 통보가 아니었던 겁니다.
나중에 심사평이 실린 걸 보았는데 제 작품과 당선작을 두고 고심했다고.....
그리고 우리나라 대표 원로 작가의 심사평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는 성애장면이 거슬렸다.
거참 지금 생각해도 황당합니다.
이유 없는 성애만 있습니까. 이유 없는 살인도 있고, 어쩌면 우리 모두 이유 없이 태어나 이유 없이 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제가 이런 말씀드리는 건, 아래 제 글을 읽고 혹시 이유 없는 혹은 쓸데없이 삽입한 장면이라고 하실까 봐 미리 선수 치는 겁니다.
제 글은 댓글까지 다 읽어보는 아내에게 한 잔소리 들었거든요. ㅠㅠ
1
아내의 첫사랑이 죽었다. 벌써 작년 여름의일이다.
진석 시인이 얼마나 외롭게 살았는지...... 서울서 사업 실패하고 강원도에 가서 식당을 시작했는데, 그 마저도 잘 되지 않아 첩첩산중으로 들어가서 혼자 살았대. 나중에 그의 아내와 아들이 합류하긴 했지만...... 그렇게 지독한 외로움을 혼자 견뎌내느라 얼마나 힘들었겠어.....
아침에 택배로 받은 그의 유고 시집을 읽고 있던 아내는 말을 잇지 못하고 기어이 울음을 터트렸다.
작년 여름 카톡으로 부고를 받았었다. 하지만 당시 아내는 그저 지나가는 말로 내게 그의 죽음을 알려줬을 뿐이었다.
어머, 진석 시인이 죽었다네! 먼일이야.
간간히 한숨을 내쉬며 애통한 심정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곧 잊은 듯했고 지금까지 그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이 잘 지내왔다.
나는 티슈를 뽑아 아내에게 건넸다. 그리고아무 말 없이 아내의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첫사랑을 향한 마음은 내가 여태보지 못한 마음결을 지니고 있을지 몰랐다. 아내의 머릿결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할 말은 없다. 아니 그 마음은 내 것도 아니고 애당초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이었기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
젊은 나는 아내의 마음이야 어떻든 아내를 갖고 싶어 했다. 당시 내가 원한 것은 아내의 육체뿐이었다.
살다 보면 언젠가 마음을 가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확신이 있었지만 굳이 마음까지 가지지 못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아내는 이미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기에 마음을 얻을 길이 없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남자에게 가 있는 마음을 훔쳐온다거나 강제로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음은 육체처럼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 어느 결에 내게로 와야 하는 것이니까. 물론 마음이 앞서서 내게로 와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이미 다른 남자에게 가버린 마음을 어쩌겠는가.
사람들은 육체를 껍데기라고 말하지만 나는 애써 부인해 왔다. 육체 없이는 마음도 없는 것이라거나 혹은 육체가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라며 위로를 삼았다. 억지를 부린 것이었다.
그러나 아내가 첫사랑의 유고시집을 읽다 말고 서글피 울며 통곡에 가까운 울음소리를 내거나 코를 훌쩍이며 연신 눈물 흘리는 걸 보면 억지는 억지였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의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평생 그 남자에게 있었다는 걸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껍데기뿐인 아내와 살아온 것이 억울하고 슬프고 분하고 수치스럽고 절망스러웠다.
때문에 아내와의 이혼을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일생을 아내의 껍데기와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자 몹시 괴로웠다. 일생을 살면서도 그 남자에게 가 있던 아내의 마음, 사랑이라고 명명된 마음을 나는 회수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늘그막에 그 사실을 절절하게 깨닫고 있었다.
이제라도 아내와 헤어져야 하나, 하는 생각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남은 시간만이라도 아내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살고 싶었다.
속된 말로 살면 얼마나 산다고. 단 하루가 되어도 좋으니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아니 남은 시간만이라도 혼자 고요히 평화롭게 보낼 작정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고 또 그 마음으로 오래 살아왔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마음을 다해 사랑한 사람이 끝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더없는 슬픔이고 불행이었다.
내가 외로움과 소외감으로 몸서리치며 살아온 것도 그 때문이리라.
2
군복무 시절 나는 아내가 아니라 아내의 첫사랑을 만났다. 그는 지방의 예비군 중대본에서 예비군을 관리하는 관리대 소속 기간요원(방위병)이었다.
그리고 나는 사복차림으로 탈영병의 행적을 추적하고 체포하는 이른바 디피(DP)였다. 우리는 2인 1조로 움직이지만 여러 가지 이유와 필요에 의해 따로따로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튼 우리가 지급받은 수사비라고 해야 쥐꼬리만큼도 안 되었다. 또 부족한 경비를 집에서 가져다 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종종 예비군 중대본부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예비군 중대본부를 찾는 명분은 탐문수사였다.
내가 탈영병의 연고지인 한 예비군 중대본부를 찾았을 때 기간요원들은 회식을 하는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고참들이 두 명의 신참들에게 신고식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까 고참들은 술병을 까고 있었고 신참 둘은 원산폭격을 하고 있었다.
- 이 새끼들. 뭐 하는 거야. 고참이 누구야. 너야.
나는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한껏 등을 기대고 앉은 방위병을 노려보았다. 나는 그가 왕고참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원산폭격 중인 신참들은 개구리복을 입고 있었지만 나머지 방위병들은 나처럼 사복차림이었다. 심지어 왕고참으로 보이는 방위병은 머리가 길어서 귀를 덮을 지경이었다. 이쯤 되면 소집해제(방위병은 제대가 아니라 해제였다.)를 며칠 앞두거나 그도 아니면 예비군중대장일 수도 있었다.
예비군중대장이 방위병신고식이나 회식에 함께 하는 일은 없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 만큼 그 방위병은 노숙해 보였다.
그 방위병이 나를 얕잡아보는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거만한 걸음을 서너 번 떼더니 내 앞으로 바투 다가섰다. 나는 그가 예비군중대장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기가 좀 꺾였다.
- 너, 뭐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들어와. 안 나가.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험상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 이 새끼가......
나는 신분증을 꺼내기 위해 점퍼 자크를 내리고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순간 솥뚜껑만 한 손바닥이 내 따귀를 강타했다. 나는 문 앞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 너 이 새끼 디피(탈영병체포조)를 쳐.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 지랄하네. 니가 디피면 나는 헌병대장이다. 이 새끼야.
그는 기죽지 않고 비아냥댔다.
나는 신분증을 보여주고 나서야 기세등등한 그 방위병의 위세를 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자존심을 구긴 뒤라 기분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나는 방위병을 전부 원산폭격 시켰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서 옷매무새를 고치고 떨리는 손으로 아직까지 얼얼한 볼을 두 어번 쓸어내렸다.
방위병들이 마시던 소주를 따라 단숨에 한잔 들이켰다. 그리고 식은 탕수욕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는데 여전히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구석에 놓여 있던 밀대자루를 집어 들고 나에게 따귀를 날린 방위병에게 다가갔다. 아무래도 당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디피라는 걸 어렴풋이나마 직감하고도 일부러 엿 먹인 거라는 소심한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무작정 그 방위병 엉덩이를 향해 밀대자루를 내리쳤다. 세 대 정도 때리고 나자 밀대자루가 부러졌다. 동시에 그도 벌떡 일어나서 나를 노려봤다.
- 씨발놈 영창 가고 싶어. 보아하니 며칠 안 남은 거 같은데. 내가 영창 보내줄까.
- 좆 까. 체포하려면 해. 나 예비군 훈련 봐주고 돈도 뜯었고, 예비군들 업장에 가서 술도 얻어먹었다. 한 건 해. 이 거지 같은 새끼야.
- 너 이 새끼 일부러 날 쳤지?
예비군카드를 아예 집에 가져다 놓고 출석 도장을 찍어주는 방식으로 돈을 뜯어온 방위병들이 줄줄이 군경찰로 체포되어 오는 등 적지 않은 비리에 대해서 익히 들어 알고 있는 터라 나는 무심한 척 들어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방위병들의 비리를 캐는 것은 내 임무가 아니었다.
- 아, 들어오면서 신분증부터 보여주든지. 씨발 우리가 낯짝만 보고 당신이 간첩인지 디핀지 어떻게 알아.
- 며칠 남았어?
그 방위병이 나보다 적어도 대여섯 살은 많아 보였다.
- 그거 알아서 뭐 하게.
- 대우해 주려고 그러는 거 아냐.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나는 그쯤에서 타협점을 찾고 싶었다. 무엇보다 졸병들 앞에서 원산폭격을 시키고 빠따까지 때린 것이 마음에 걸렸다.
- 씨발, 대우는 무슨. 열흘 남았수다.
그가 못 이기는 척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날 예비군중대본부에서 술을 마시다 분위기가 좋아져서 2차로 나이트클럽으로 갔다. 거기서 예비군 웨이터가 가져다주는 맥주와 양주 그리고 과일 안주까지 실컷 먹고 마셨다. 하지만 누구도 계산하지 않았다.
3차는 시장 뒷골목에 있는 방석집이었다. 체육학과 출신인 말년 고참은 그곳에서도 거침없이 술과 안주를 시켰다. 그리고 나에게 여관방을 잡아주고 여자까지 붙여주었다.
그 방석집을 운영하는 주인이 동원예비군이라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말년 고참 뒤를 이어 견장을 찬 사람이 바로 아내의 첫사랑이었다. 그는 나와 같은 대학에 다니다 휴학을 하고 소집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첫날 나이트클럽인지 아니면 방석집에서인지 알았다. 하지만 아는 체하지는 않았다.
그가 견장을 차고 나서도 나는 몇 번인가 더 그 중대본부를 찾아가서 방위병들과 밥도 먹고 술도 마셨다. 나이트클럽과 방석집은 가지 않았다. 방위병들 중 누구도 여관방을 잡아주지도 않았다. 대신 그의 권유로 그의 비좁은 자취방에 가서 잠을 잤다.
중대본부 근처 중국집에서 그와 단둘이 앉아 짬뽕국물을 안주 삼아 고량주를 마시던 날이었다. 취기가 오른 그는 가끔씩 눈물을 보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가 방위를 받기 직전 그의 아버지가 사업 실패로 자살을 했다는 것과 그 이후로 남은 가족들이 먹고살기 위해 뿔뿔이 흩어져서 살고 있다는 말을 듣자 여태껏 술값과 밥값을 내온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 넌 어떻게 생활하냐?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학교 다닐 때 문학동아리에서 만난 애인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 친구가 매달 꼬박꼬박 보내줘서 살아가고 있어요.
동갑이지만 그는 여전히 나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와. 니 애인 대단하다.
한 번 보실래요?
그는 지갑을 꺼냈다.
너에게 생활비 보내주는 그 애인!
내가 호기심을 보이자 그는 지갑을 아예 나에게 넘겨주었다.
예쁘네. 착하게 생겼다. 니가 복이 많은 거야. 감사하게 생각해. 눈물 보이지 말고.
그래야죠. 그런데 전 이제 유진이를 다시 못 볼 거 같아요.
왜?
공장 기숙사에서 생활하시는 어머니 모시고 나오려면 제대하자마자 무슨 일이든 해야죠.
그런다고 못 볼 이유는 없잖아. 너한테 생활비까지 보내주는데, 그 어떤 사정이라도 다 받아들이고 이해할 거야. 괜히 자존심 앞세워서 여자 마음 아프게 하지 마라.
........
야, 정진석! 대답해.
........
뭘요?
새끼가 빠져가지고. 애인한테 잘해주라고.
.........
대답 안 해.
알겠습니다.
이 새끼 복창소리 봐라. 제대로 못해.
일병 정진석. 잘 알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술잔을 부딪치며 웃음을 되찾았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없는 아픔과 쓸쓸함에 사로잡혀 그와 헤어졌다.
3.
제대 후 복학해서 문학동아리를 찾았다. 몇 번이고 망설였지만 결국 이끌리 듯 동아리방을 노크하게 된 것이다.
동아리에 가입하려고 간 것은 아니었는데 어정쩡하게 대꾸하다가 가입까지 하게 되었다.
사진 한 번 본 것뿐인데 유진을 만나고 싶다는 열망은 꽤 간절했다. 그러나 이유 없는 열망이었다. 때문에 나는 그 열망이 조금 부끄러웠다.
진석이가 가정 형편과 여러 가지 이유로 복학하지 못할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유진과 헤어지겠다고 여러 차례 말했었다.
그는 유진을 불행하게 만들 수 없다고 했지만 그보다는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건지 몰랐다.
그런 사정을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니지만 진석에게내 안의 이유 없는 열망 혹은 갈망으로 인한 미안함은 없었다.
합평 모임이 있던 날 처음으로 진석의 사진에서 보았던 그녀 유진을 보았다.
그 모임에서도 그렇고 이후로도 진석에 대해서는 아는 체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유진은 내가 진석과 어떤 인연이 있는 사람인지조차 몰랐다.
그런데이상한 건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시 외에는 읽어 본 적 없는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순전히 유진에 대한 알 수 없는 열망에서 비롯된 거겠지만 시집을 사서 읽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외우는 건 정말 싫어하는 내가 유진의 시를 외우고 있었다.
덕분에 동아리 모임에서 불쑥불쑥 유진의 시를 인용하는 순발력을 발휘해서 유진을 감동시킬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죠? 설마 별거도 아닌 내 시를 외우고 있는 건 아니죠!
아, 저는 외우는 건 정말 못해요. 하지만 어떤 것들은 저절로 기억하게 되죠.
아무튼 유진과 가까워졌다. 아니 서로 말을 편하게 할 만큼 친해졌다. 서로 마음이 잘 맞았던 것 같았다.
어쩌면 자신의 시를 외워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을지 몰랐다. 유진은 기꺼이 둘만의 시간을 내주었다.
우리는 종종 단 둘이 만나서 밥을 먹었고 새벽까지 술을 마셔댔다. 술에 취해 시와 문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나는 끝내 진석에 대해선 말을 하지 않았다.
유진의 가슴엔 진석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가 단 한 번도 진석에 대해 말한적은 없었지만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유진을 향한 열망은 자꾸 커져갔다.
나는 술기운을 빙자해서 입술을 훔치려고 달려든다든지, 그녀를 와락 껴안고 운다든지 하는 식으로 진석이라는 벽을 무너뜨리든지 넘어보려고 애를 썼다.
사실 나 결혼할 사람 있어. 그러니까 너무 애쓰지 마. 세아 형이 좋긴 하지만 사랑은 아니야.
유진아. 파혼해라. 내가 행복하게 해 줄게.
파혼! 내가 잘못 말했나 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그에게 붙들린 내 마음을 도대체 어떻게 파낼 수 있을지 나도 몰라. 아무리 애써도 안 돼. 그는 내 첫사랑이고. 난 반드시 첫사랑과 결혼할 거라고 맹세했거든.
맹세는 깨라고 있는 거고. 안 되면 되게 하면 돼. 내가 깨게 해 줄게. 되게도 해주고. 게다가 첫사랑이라며!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아. 만고의 진리잖아.
아무리 그래도 세아 형이 내 마음에 들어올 틈은 없어. 그러니까 다른 사람 찾아.
사랑하는 마음이 미움으로 뒤바뀔 수 있기도 한 건지 모르겠다. 유진의 완고한 말과 태도로 인해 사랑은 어느덧 미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유진을 미워하면서도 유진을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미운 유진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했다.
그가 진석에 대한 그리움으로 펑펑 울면 같이 울어주고, 그녀가 좋아하는 시를 읽어주고 그녀가 쓴 시들을 외우고 있다가 들려주었다. 진석에 대한 그리움들이 절절히 묻어나는 시라고 해도 기꺼이 말이다.
4.
폭우가 내리치는 어느 여름날이었다. 동아리모임에 나온 사람은 유진과 나 둘 뿐이었다. 우리는 학교 앞에서술을 마셨다. 급하게 술잔을 들이켜는 유진 때문에 나는 번번이 들었던 술잔을 내려놓아야 했다.
취기가 오른 유진은 자신의 자작시 첫사랑을 내게 보여주었다.
첫사랑
김유진
너의 웃음소리
너의 말하는 소리
나를....... 설레이게 해
태어나서 맨 처음 들었던
엄마 목소리
기억할 수 있다면
너의 목소리 듣는
느낌이었겠지
아직은
너를 알지도 못하고
니 손조차 잡아본 적 없지만
이미 내 마음에 새겨진
너의 눈빛과 너
너의 표정과 너
너의 얼굴과 너
먼 훗날 내가 사라지고
천 년이 지난 뒤에도
밤하늘 별처럼
잊혀지지 않을
첫사랑
세아 형한테 처음 보여주는 거야. 유치하지?
사랑은 원래 유치한 거니까.
그거 한 번 읽어줄래. 형의 목소리로 듣고 싶었어.
나? 아무도 안 나와서 그런 거 아니고! 꿩대신 닭 뭐 이런 거 아냐.
형이 읽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
나는 유진의 부탁이 아니라도 소리 내 읽어보고 싶었던 터여서 목청을 가다듬고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내가 숨죽여 시를 한 줄 한 줄 읽어가는 동안 유진은 창밖의 비를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나도 덩달아 가슴이 먹먹해졌다. 하지만 한가닥 빛이 내게로 비치는 기분이었다. 진석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양가감정이었다.
알지도 못하고 손조차 잡아 본 적 없는 그에게 다달이 생활비를 보내주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무겁게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나를 안도하게도 했다.
정말 저속하고 얕은 감성이겠지만 나는 유진이가 적어도 첫사랑 진석과 키스라든지 육체적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했고 그게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이 사라지고 천 년이 지난 뒤에도 잊혀지지 않을 첫사랑이라는 것에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어찌어찌해서 유진과 결혼하게 된다면 그 천 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을 첫사랑을 어떻게 하지?
그래 껍데기뿐이면 어때. 나는 기꺼이 껍데기를 열망해야지.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리고 지금은 기억할 수 없지만 나는 기꺼이 껍데기를 열망해야지, 로 시작되는 시를 쓰기도 했다.
껍데기야 말로 알맹이다. 혹은 껍데기는 민낯이고 진실이다. 따위의 억지스런 시였다. 하지만 지금도
내가 주장한 껍데기론이 틀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맥주에 소주를 타서 연거푸 마시던 유진은 테이블 아래에 고개를 파묻고 토하기 시작했다. 나는 유진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웨이터가 와서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깨끗하게 치울게요.
진정이 된 유진을 의자등받이에 기대어 뉘었다. 그리고 나는 약속한 대로 토사물을 깨끗이 치웠다.
유진을 부축하고 나왔을 땐 비가 그치고 간간히 촉촉한 바람만 불어왔다.
그녀의 집은 걸어서 20여분 거리에 있었다. 택시를 타면 오 분 거리였다.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데려다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냥 그대로 걷고 싶다고 했다.
유진은 곧 혼자서 걸을 만큼 빠르게 술에서 깨어났다. 학교 정문 앞을 지나서 가로수 길을 걷는 동안 우리는 말이 없었다.
나쁜 새끼.
유진은 앞뒤 없이 그렇게 내뱉었다.
응, 나? 너 껴안아서 화났니?
나는 내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능청스럽게 물었다.
세아 형.
유진은 술기운이 남은 눈빛으로, 아니 물기가 촉촉이 젖어 있는 눈빛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순간 키스라도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유진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정말 갖고 싶은 입술이었다.
고마워.
야, 뭐가 고마워. 니가 토하고 그러면 내가 다 치워줄게. 평생 너한테 그렇게 해줄 수 있어, 난.
난 그토록 미워하고 있는 유진에게 불쑥 그런 말을 내뱉었다.
왜? 내가 뭐라고 그렇게 잘해 줘?
미움도 사랑이었다. 나는 그렇게 미워했는데 유진은 내가 미워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던가 보았다.
아무튼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할 기회가 왔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러나 나는 사랑한다는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용기가 없었던 것일 수도 있지만 진석이가 유진의 마음속에 콕 박혀 있다는 것 알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나저나 나 하고 싶은 말 하면 그만인데 나는 가슴 밑바닥에 있는 그 말을 끌어올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유진이 첫사랑한테 연락 안 와?
나는 엉뚱한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왔어.
연락이 왔다고?
나는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한다고. 미안하다고.......
유진은 쓸쓸하게 웃었다.
나중에 내가 들은 걸 요약하면 이렇다.
진석은 제대(정확히 말하면 소집해제) 후 공장에 취직했다. 동생들과 어머니 뒷바라지 때문에 복학은 꿈도 못 꾸는 일이 됐다. 어머니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해서 초등학교 동창과 찬물 한 그릇 떠놓고 결혼식을 올렸다.
유진은 진석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차츰 그런 내막을 들어 알게 되었다.
아무튼 그날 나는 유진을 집 앞까지 데려주었다. 그리고 유진을 향한 미움은 다시 희망과 기대로 바뀌었다. 나는 유진의 시 첫사랑을 바로 그날 외었다. 유진의 시를 외우는 게 내가 유진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사랑을 누리는 즐거움이었던 것 같다.
5.
이제 유진의 첫사랑이 떠났으므로 그녀를 향한 내 마음(사랑이라고 쓰기엔 아직도 쑥스럽다.)은 여유로웠다.
그 마음(사랑)의 여유로움 가운데 나는 유진이가 진석의 결혼 소식을 들은 즈음 첫사랑이라는 시를 내게 읽도록 한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았다.
그즈음 유진은 종종 수녀가 되고 싶다는 말을 했고 많은 시간을 성당에서 기도하며 보낸다고 했다.
나는 처녀성의 훼손이라든지 첫사랑을 정신적 흠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유진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유진은 첫사랑을 처녀성의 훼손과 비슷한 마음의 훼손으로 생각하고 나한테 고백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수녀가 될 운명에 처한 유진을 구할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던 것이다.
유진의 첫사랑이 문제가 될 수도 없고 문제라고 여겨본 적조차 없지만 어쨌든 나는 그냥 그렇게 믿기로 마음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유진을 구해주기로 작정하였다.
내 마음(사랑)에 또한 번의 시련이 닥친 건 그해 여름이 채 가기 전이었다.
동아리 모임이 있던 날이었다. 유진은 휠체어를 밀고 카페로 들어왔다. 휠체어에 앉은 남자는 약간 비뚤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고 헤벌쭉 웃고 있었지만 잘 생기고 알 수 없는 매력도 있었다.
그는 뇌성마비로 하반신이 마비된 찬경이었다.
나도 찬경을 캠퍼스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아마 유진도 휠체어로 이동하는 찬경의 모습을 캠퍼스에서 보았을 것이다.
뇌성마비를 앓은 천재 공학도, 휠체어 맨, 혹은 휠체어를 탄 천재, 등으로 이미 캠퍼스의 유명인사가 된 그였기 때문에 동아리 멤버들 모두 일어나 그를 환대하였다.
유진은 우연히 지하철에서 만난 찬경을 도와 강의실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그날의 친절이 계기가 되어 함께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심지어 술도 함께 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때마다 타고났거나 혹은 몸에 밴 유진의 친절과 배려는 유감없이 발휘되었고 우리보다 서너 살 어린 찬경의 마음을 무한 감동으로 사로잡았다.
찬경의 말을 빌리자면 유진은 자신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꿰뚫어 보는 천사였다.
유진은 늘 그와 붙어 다녔고 그의 수족처럼 움직였다. 합평시간에도 뒤풀이 시간에도 유진의 시선과 관심, 아니 모든 감각의 안테나는 찬경을 향해 있었다.
유진은 찬경의 작은 몸짓 미미한 눈빛에도 즉각 반응했다. 일어나서 물을 가져다준다든지 떨어트린 걸 주워준다든지, 휴지를 한 움큼 뽑아주는 것은 물론 찬경이 아무 말하지 않아도 화장실까지 데려가는 걸 보면서 나는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는 유진에게 거의 잊혀진 존재였다. 때문에 첫사랑이라는 시를 내게 읽힌 유진의 의도 따윈 퇴색되고 말았다.
나는 다시 유진을 미워하고 있었고 독신으로 살아갈 작정까지 했었다.
세아 형, 나 찬경이한테 프러포즈를 받았어.
유진이 졸업을 얼마 앞두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유진과 나는 정말 오랜만에 카페에 마주 앉아 있었다.
사랑하는 거니?
나는 오빠처럼 불만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아니, 나한테 사랑은 첫사랑뿐이야.
그럼.
걔의 부족함이 안쓰러웠어.
그럼 거절하면 되잖아.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게 수녀가 아닐까?
너 바보야. 수녀는 신에게 온전히 삶을 드리는 거니까 완전히 다르지. 차라리 수녀가 돼.
그럴까?
뜻밖에 유진은 눈물을 흘렸다.
나는 말없이 휴지를 가져와 건넸다. 그리고 고개 숙인 유진의 머리를 내려다봤다. 파마를 하고 염색을 해서 본래의 머릿결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유진의 착한 성격, 행동, 특히 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당시로선 좀 파격적인 긴 갈색 파마 머리였다.
유진은 졸업 후 출판사에 들어갔다. 나는 고시 공부를 몇 해 하다가 유진이가 덜컥 임신하는 바람에 건셀회사에 입사했다. 그리고 출산을 서너 달 앞두고 급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유진에게 거절당한 찬경은 자살 소동을 일으켰다. 찬경의 어머니와 누나가 자신의 모든 것들을 유진에게 남긴다는 유서를 들고 찾아왔다. 유진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자신의 잘못이라고 사과하고 돌려보냈다. 하지만 찬경은 어머니와 누나에게 다시 가보라고 들볶았다.
찬경의 성화를 견디지 못한 그의 어머니와 누나가 세 번이나 다녀 간 뒤였다. 찬경이가 직접 찾아와서 소란을 피웠다.
하지만 유진은 찬경을 만나주지 않았다.
이후 그가 미국으로 건너가 박사 학위를 받고 나사에 들어갔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지만 결혼 여부는 모른다.
그렇게 나는 모든 난관을 뚫고유진의 껍데기와 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사십 대 즈음에 진석이가 돌아와서 나를 괴롭혔다.
유진이가 만든 문학카페에 서울에서 사업을 시작한 진석이가 가입하면서 나의 속앓이가 시작된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순수시문학 동인이라는 모임이다.
나는 동인이 아니지만 가끔 유진의 수행 기사로 모임에 참석하곤 했다. 하지만 진석과 유진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칠 때마다 알 수 없는 질투심으로 괴롭고 힘들었다.
돌아보니 그 세월이 자그만치 십 여년이다.
코로나가 오면서 모임이 중단되었다. 가끔 번개모임이 있었지만 지방에서 살게 된 우리는 모임에 가지 않았다.
코로나가 겁이 나기도 했고 아내가 더 이상 시를 읽지도 쓰지도 않으면서 흥미를 잃은 탓도 있었다.
전원주택에 살면서 아내는 꽃 가꾸고 살림 사는 재미에 빠진 듯 보였는데 실상은 무력한 시간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아내는 결혼 이후 처음으로 세탁기를 돌리기 시작했고 반찬 만드는 일에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내의 속옷까지 손으로 빨아 입히던 나로서는 더없이 반가운 변화였다. 하지만 아내로서는 무력함을 극복하려는 시도였다니 참 사는 건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어쨌거나 이제 더는 껍데기뿐인 유진과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우리 이혼하자?
나는 아직 눈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아내를 향해 무거운 목소리를 날렸다.
뭐!
이혼하자고.
이자가 미쳤나. 그냥 나가면 되지 그 서류 쪼가리가 뭐 중요하다고. 니가 나가.
단 하루라도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하고 살고 싶어. 이제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러니까 나가라고. 나가서 찾아봐. 혹시 있을지 알아. 더 늦기 전에 얼른 짐 싸서 나가.
나가기 전에 하나만 물어보자. 나를 단 한 시간이라도 사랑해 본 적 있어? 아니 십 초라도.
아이구, 저 돌. 내가 사랑하지도 않는데 여태 애 둘씩이나 낳고 살았겠냐.
그럼 첫사랑은?
진석 시인은 내 마음에 새겨진 시 같은 거야. 수많은 서정시 중에 하나라고. 젊은 날의 사건인 건 맞지만 그 충격도 이미 다 잊었어. 그냥 한 편의 시로 남은 것뿐이라고. 그 나이 먹도록 깨닫는 것도 느끼는 것도 없니. 너는.
천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거라며
지랄, 니, 그 좋은 머리로 고작 하는 짓이. 남의 시 외워서 싸울 때 써먹니.
자꾸 니니 할래. 내가 나이가 많은데.......
아내는 좀 화가 나면 너, 니, 이자, 이런 호칭을 마구 남발한다. 나이 들면 다 그렇게 되는 건가 싶다.
솔직히 일 년도 안 가서 다 잊히더라. 그러니까 시도 다 허구야. 소설이나 마찬가지라고. 너 집 나가면 아마 한 시간도 안 돼서 다 잊힐 걸. 그러니까 잊히고 싶으면 한번 나가봐.
그래 그럼 나를 사랑한 거네. 그래도 나이 많은 나한테 니, 너, 이러지 좀 마라.
니 소리 듣기 싫으면 빨리 짐 싸서 나가.
한번 빨자.
이자가 또 시작이네. 내 가슴이 니 장난감이니.
나는 지금 외로워.
나는 아내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가슴을 헤집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내는 못 이기는 척 가슴을 내주었다.
음음 냠냠 쪽쪽
요란하게 아내의 가슴을 빨아댔다.
허천났네 허천났어. 그만해. 빈젖 빨면서 요란 떨지 말고 짐 싸서 나가.
빈 젖은 왜 빈젖이냐. 외로움을 달래주는 꿀 같은 기운이 쏟아져 나오는데. 음음 냠냠.... 외로움을 달래는데는 당신 젖만한 게 없는 거 같애.
나는 귀찮아하는 아내의 가슴을 다 열어놓고 양쪽 을 번갈아가며 쪽쪽 빨아댔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따위의 말은 세상없는 진리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