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ona Nov 06. 2022

내가 사는 좁은 세계



아시안 여성으로서 해외에 살다 보면 꼭 얘기하게 되는 주제 중 하나가 인종차별, 특히 인종차별이 섞인 성희롱에 관한 것이다. 꼭 해외에 살지 않더라도 성차별이나 성희롱 때문에 화가 났던 경험은 여성이라면 그렇게 드물지 않을 것이다. 아시안 여성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모욕과 그냥 길을 걷기만 해도 수도 없이 당했던 캣콜링까지 불쾌했던 경험을 일일이 적기엔 너무 많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하다가도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별 일도 아닌데 내가 너무 유난을 떠는 걸까? 그래 그냥 잊어버리는 게 나을지도 몰라. 그런데 그렇게 생각할수록 내 안의 분노가 쌓여가는 게 느껴졌다. 나를 더욱더 화나게 하는 것은 '나는 그런 일 겪은 적 없는데? 내 주변은 안 그렇던데. 그냥 네가 운이 안 좋았나 봐' 같은 반응이었다. 

이건 극단적인 예시지만 작년에 애틀랜타에서 피해자 모두가 아시안 여성이었던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을 때 경찰은 브리핑에서 그날이 가해자에게 나쁜 날(bad day)이었다고, 그가 저지른 일이 그저 우발적인 행동이며, 인종차별에서 비롯된 증오범죄임을 부정하는 듯한 말을 했었다. 내가 인종차별적인 말을 듣거나 성희롱을 당하는 것은 '단순히 그날의 운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 사람이 겪어 본 적이 없다고 해서 내게 일어난 일이 없는 일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화가 나다가도 나 또한 나의 좁은 경험에 비추어서 다른 사람들이 겪은 일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됐다. 


타이거 맘, 네일아트샵에서 일하는 여자, 조용하고, 순종적이고 공부만 잘하는 아이... 아시안 여성에 대한 편견에 대해 얘기하는 태국계 미국인 작가인 아만다 핑보디파키야의 그래픽 작품. 작년에 타임지 표지를 그리기도 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작가의 작품은 뉴욕 등 여러 도시의 공공장소에서 전시되었는데 지금까지는 거의 인식조차 되지 않았던 아시안 차별이 이렇게 여러 작품을 통해 이야기되고 화제가 되는 것이 반가웠다. https://www.morethan.art/ 에서 더 많은 작가의 작품과 다양한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솔직히 유럽에 살면서 사소한 차별을 겪을 때도 있지만 내게 친절을 베풀어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내게는 보장된 안전한 삶이라는 게 있고 이게 쉽게 깨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안다. 나와는 또 다른 사회적 계층, 다른 인종의 사람들이 프랑스에서 겪는 일, 그들이 느끼는 기분을 나는 영원히 모를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일을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다고 해서 그게 아예 없는 일이 될 순 없다. 미국에서 흑인이 대통령이 됐다는 사실이 이제 흑인 차별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것처럼 당신에게 흑인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걸 뜻하지 않는다. 어떤 부부의 남편과 아내의 월급이 똑같아졌다는 사실이 세계적으로 여성의 인권이 상승됐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통계나 정확한 수치보다도 본인을 둘러싼 아주 좁은 세계를 더 신뢰하는 사람들의 말에 나는 분개했다. 내가 사는 좁은 세계를 조금만 벗어나 눈을 돌려 보면 나와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그들이 토로하는 고충을 쉽게 지워버리기란 너무나 쉽다.


몇 년간 해외 생활을 하면서 나는 내가 겪는 차별의 경험이나 불쾌했던 경험을 소리 내어 밖으로 말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내게 정신적으로 필요한 과정이기도 했지만 나와 같은 경험을 했던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순종적이고 표현을 잘하지 않는다는 동아시아 사람들에 대한 편견 또한 지긋지긋했다. 내가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면 내가 겪은 일은 없는 일이 돼버릴 것이고, 결국은 그게 혐오를 퍼뜨리는 사람들이 바라는 일일 것이다. 내가 겪은 일이 큰 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그게 차별과 혐오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권리가 있다. 세상은 분명 조금씩 변하고 있고, 그걸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신의, 나의 주변이란 그 변화하고 있는 세상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세상이 더 나아질 것도 없을 만큼 이미 너무 좋아졌는데 다들 왜 그렇게 예민하고 불만인지 이해가 안 간다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나는 계속 누군가가 상처받았다고 말한다면 귀담아듣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그게 내가 세상의 변화의 일부분이 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작가의 이전글 다정함은 모든 걸 이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