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에블린
나는 언젠가부터 슈퍼히어로 영화에 점점 질려가고 있었다. 아무 기대도 흥분도 없이 영화관에 앉아 의무적으로 감상하고 나면 이 영화가 도대체 나한테 준 게 뭐지? 하는 생각으로 극장을 빠져나오기를 여러 번. 오락적인 재미마저도 이젠 못 찾겠는데 다들 보니까 나도 보긴 봐야겠고. 너무 많은 프랜차이즈 영화가 쏟아져 나와서 이젠 어떤 영화에서 캐릭터가 뭘 했는지 순서와 인물의 관계마저도 뒤죽박죽 돼서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매번 비슷한 구성과 플롯도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래 쟤는 초능력이 있고, 다 잘났으니까 이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겠지. 별 것도 없는 내 인생 하나도 못 구하는 나는 공감되지가 않았다. 실수해도 되돌릴 수 있고, 죽어도 어차피 다시 살아나고, 세상 구한답시고 다 때려 부술 수 있는데, 쟤가 사는 세상엔 안 되는 게 없는데. 코카콜라보다 펩시가 조금 더 싸니까 어쩔 수 없이 펩시를 사야겠다는 생각 따위나 하고 있는 내가 세상을 구해야겠다는 사명으로 가득 찬 히어로에게 감정 이입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처음에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별로 끌리지 않았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또 멀티버스 얘기라니 지겨울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니까 슈퍼히어로인 줄 알았던 주인공 에블린은 나보다도 더 눅진한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운영하는 세탁소에 밀려드는 세탁물, 영수증 정리와 세금 신고 같은 세상에서 제일 미루고 싶은 일 따위에 치여서 꿈같은 건 잊어버린 지 오래다. 얼굴만 보면 싸우는 딸 때문에 골치가 아프고, 남편과의 사랑은 이제 옛날 얘기 같고, 몸이 성치 않은 아버지까지 돌봐야 한다. 에블린은 잠시 세탁소에 걸린 티브이 화면으로 고개를 돌려 무도회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을 보며 다른 세상을 꿈꿔본다. 만약 내가 여기 있지 않았다면, 과거의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미국으로 이민 오지 않았다면... 하지만 그 온갖 '만약'을 실현시킨 다른 우주의 에블린들이 존재하는 데도 불구하고, 세탁소를 운영하는 별 볼 일 없는 에블린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단 하나의 에블린으로 선택된다. 그 이유는 에블린이 엄청난 힘을 가져서가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우주의 모든 에블린들 보다 이룬 게 없고, 가장 평범하기 때문이다. 이룬 게 별로 없기 때문에 역으로 앞으로 이룰 수 있는 것도 많고 가능성도 크다고 여겨진다.
그 별 거 없는 에블린이 택한 세상을 구하는 방법은 다정함이다. 다른 슈퍼 히어로들이 온갖 무기와 슈트를 개발하고 도시를 날려버리고 있을 때 에블린은 주변 사람들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기로 한다. 늘 남에게 굽히기만 하는 자세라 답답하다고 여겼던 에블린의 남편은 말한다. 사람들은 나를 바보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친절함은 내가 사는 데에 필요한 방식이야. 그 말을 들은 에블린은 서로를 파괴하는 대신 주위에 더 친절하게 대함으로서 혼란스러운 세상을, 엉망진창인 것 같던 자신의 삶을 구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다른 우주에 아무리 멋진 삶이 기다리고 있어도,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게 수두룩한, 이 별 거 없는 세상에 남기를 택한다.
나는 다정함이나 친절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50대쯤 내 얼굴에는 미간 주름이 선명할 게 분명하다. 좀 더 어렸을 때는 냉소에 가득 차서 세상을 비웃는 게 내 세계를 지키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냉소는 내게 어떤 해결책도 주지 않았고 삶을 더 낫게 만들지도 않았다. 그냥 세상을 좀 더 차가운 방식으로 미워하게 만들 었다. 그런데 이 엉망진창인 세상을 구하는 방법이 다정함이라고? 이 무슨 순진한 소리인가 싶지만, 나는 그 뻔한 말을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위기와 아픔의 시간을 견뎌낸 2022년의 세계에 가장 필요했던 건 우리를 구해줄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모두에게 친절하라'는, 너무 뻔해서 할 필요도 없을 거 같은 그 말이 아니었을까. 그 말은 세상은 못 구할지 몰라도 적어도 나의 오늘과 당신의 내일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시간을 돌리는 능력도, 다른 우주로 갈 능력도 없고, 그래서 실수를 되돌릴 수도, 슬픔을 복구할 수도 없다. 그런 우리를 결국 버티게 해주는 건 세탁소 주인에게 건네는 감사 인사, 이웃에게 나눠주는 쿠키 같은, 바보 같은 농담, 잠깐의 미소, 별 거 아닌 것이라는 사실을 이 이상한 수퍼 히어로가 다시 기억하게 해 줬다. 사실은 별 것도 아닌 삶, 엉망진창 세상 속의 우리는 서로 다정하면 된다. 결국 다정함은 모든 걸 이긴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