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해미
청년에서 지워져 버린 여성
<버닝>의 해미는 전형적인 하루키 소설 속의 여자처럼 보인다. 실체 없고 신비로운. 그러나 화자인 '나'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켜 줄 정도로 자유분방하고 성적으로는 방종한. 사람들이 그의 이름이 혜미인지 해미인지 잘 기억도 못할 만큼 피상적인 인물이다. 그런데 이 실체 없는 여성의 이미지에 이창동 감독이 생각하는 한국 청년의 이미지가 합쳐져서 더 알 수 없는 인물이 된다. 젊은 여성인 해미는 성형수술을 했고, 고정적 직업이 없고, 카드 빚이 많으며, 삶의 의미를 구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여행을 간다. 경제적 어려움과 실존적 고민을 가진 청년이라는 점에서 종수와도 비슷한 처지에 있지만, 종수는 거기에서 오는 패배감, 분노를 끝까지 밀고 가서 (예술을 매개로) 탐구할 기회라도 주어지는 반면에, 해미는 그냥 휘발된다. ‘청년’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흔히 여성은 누락되는 것처럼 해미는 그냥 종수 인생에 불을 지피기 위한 장치로 사용된다. 중년 감독이 찍은 청년에 대한 영화에서 조차 청년 여성은 남성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해미는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알 수 없는 남자인 벤과 쉽게 만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조차 표면적일 뿐이다. 영화에서 우리는 해미의 생각을 절대 알 수도, 들을 수도 없고, 몇 가지 단서를 조합해 풀어내야 하는 수수께끼와 같다. 그 퍼즐은 작가 지망생인 종수에게는 영감을 주고, 삶이 너무 안정적이라 따분한 벤에게는 흥미를 준다.
보여야만 존재하는 여자
많은 하루키 소설의 여성들이 그렇듯이 해미는 원래 없었다는 듯 사라진다. 원작이 있는 영화니까 인물의 전형성을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고 쳐도, 해미는 철저히 남성의 시각에서만 보이는, 그래야만 존재할 수 있는 여자다. 이 영화에서 해미가 종수나 벤을 보는 샷은 거의 없다. 종수의 시선 끝에서 해미는 벤과 노닥거리고 있거나,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는 일(춤이나 팬터마임 같은)을 한다. 삶의 의미를 구하는 그레이트 헝거를 보기 위해 아프리카로 갈 만큼 해미에겐 삶의 의미가 절실하지만, 해미가 너무 간절하게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옷을 벗고 추는 춤은 종수와 벤 앞에 그리고 관객의 눈에 보이기 위한 공연이 된다. 그 춤이 끝나면 역시나 해미의 잠든 모습으로 장면은 전환되고, 그동안 종수와 벤은 사뭇 진지한 얘기를 나눈다. 해미는 그 대화에 낄 필요도, 이유도 없다. 의미 있는 대화도, 그 안에 잠들어있는 열등감, 질투, 공허함, 그 모든 날 것의 감정도 모두 남성들의 것일 뿐 ‘메타포’가 뭔지도 모르는 해미가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이 날 이후로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할 것처럼 해미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해미는 타인에 의해 살해되었을 수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수도, 혹은 그냥 정말 사라지고 싶어서 떠나버린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해미가 왜 사라졌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해미의 행방불명은 그저 종수의 내면에 있던 분노를 폭발시키는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청년 남성의 감정에 몰두하고 집중하는 것이 이 영화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성공했는지 모르겠다. 이 영화를 보며 종수를 비웃거나 동정하기 쉬우니까) 어찌 보면 벤조차도 도구로 사용된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해미는 종수와 같이 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고, 내몰리고, 삶의 목표를 찾지 못해 허덕이는 청년이지만 별 고민 없이 삭제됐다는 면이 두드러진다.
이 영화를 오랜만에 다시 보면서 나는 해미는 도대체 누구일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봤다. 남성 예술가들의 탐구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실체 없는 여성일 뿐일까? 해미는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힘겹게 자위할 필요도 없고, 자기 인생의 열정을 되찾기 위해 타인을 이용하지도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이 영화의, 그리고 영화 밖의 남자들보다 훨씬 자유로운 인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자유가 허락된 범위를 초과하는 순간 여성은 죽는다. 아니
최소한 이 세상에서 말끔하게 사라진다. 나는 해미가 어디선가 잘 살고 있기를 바란다. 누군가에게 보여지지 않아도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