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 더 선샤인 인>, 이자벨
아무리 생각해도 내 인생에서 제일 잘한 일 중 하나는 남자와의 로맨스가 내 인생을 구할 거라는 환상을 안 믿었다는 것이다. 어릴 때도 제인 오스틴 같은 문학이나 고전 로맨스 영화를 좋아했었고, 여전히 멜로 영화를 너무 좋아한다. 솔직히 지금도 60년대의 멜로 영화나 유치한 로맨틱 코미디를 보면서 운다. 평생 봐온 게 만화, 소설, 영화인 만큼 로맨스에 대한 환상이 분명 있었다. 스무 살 무렵에는 내 또래 남자들은 유치하다고 무시하면서 나이 많은 남자를 좋아하는 알 수 없는 병에 걸리기도 했다. 스스로 훨씬 성숙한 사람이라고 착각했었고 나이가 많은 남성이 나의 부족한 점을 채워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것 같다. 어리고 불안정한 여성을 쉽게 이용하려는 늙은 남자들이 세상에 생각보다 아주 많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면서 내가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했었던 게 웃길 뿐이다. 의지할 곳이 필요했었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의존하거나 빠져들지 않았던 건 어쩌면 영화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식민주의나 성과 폭력을 주제로 한 강렬한 영화를 만들어온 클레어 드니가 내놓은 로맨틱 코미디(라고 할 수 있을까?) 영화 <렛 더 선샤인 인>은 그 전의 작품들과 결이 달리 수다스럽고 농담 같은 순간들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영화를 보면서 종종 심각한 얼굴을 하곤 했는데 쏟아버린 커피에 얼룩진 셔츠 같은 로맨스만 있는 이 영화가 나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줄리엣 비노쉬가 연기한 50대 여성인 이자벨은 여전히 사랑을 꿈꾼다. 하지만 자기 곁을 맴도는 남자들은 아내는 따로 있으면서 덥썩 꽃다발을 내밀지를 않나, 친구인지 사귀는 건지 모르겠다고 하질 않나, 어떻게 하나 같이 실없고 실망스럽기만 하다. 어찌 보면 이자벨은 우리가 철딱서니 없다고 혀를 차기 좋은 캐릭터다. 그 나이에 아직도 사랑을 믿어? 요즘엔 세상을 냉소로 바라보는 게 쿨한 거니까 사랑을 믿는 여자는 영화에 나오기엔 따분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정말 이자벨은 한심할까?
내 세대의 친구들이 많이 그랬겠지만, 어린 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좋아해서 집에 있는 <인어공주> 비디오를 닳도록 보았었다. 지금은 꽤 달라졌지만 그땐 인어공주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공주 이야기는 왕자와 맺어지는 걸로 끝났다. 사실 디즈니 영화는 내 인생에서 가장 처음 접한 로맨스 서사다. 그러니까 로맨스란 그렇게 운명처럼 다가오는 것이라고, 왕자를 구한 에리얼처럼 운명 같은 사랑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물론 그 생각은 크면서 산산조각 났으나 사실 처음부터 약간의 의심은 있었다. 10살 때 일기장에 쓸 만큼 그때부터 이미 진부한 로맨스 서사에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던 거다. 내 연애의 역사를 줄줄이 읊을 수는 없으나, 영화나 드라마에서 로맨틱하게 묘사되는 모든 순간은 현실에서는 지루하거나 형편없었다. 첫눈에 알아볼 만큼 사랑에 빠지는 남자를 만나서 키스를 하게 되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난 내 생의 첫 키스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와 얼떨결에 했으며 별로 떨리지도 않았다. 별로 관심 가지 않는 남자들에게 짜인 시나리오의 역할을 수행할 정도로 내가 외로운가? 하는 질문으로 만남은 끝나게 됐다. 그렇다고 내가 인어공주에 나오는 잘생기고 멋진 왕자만을 기다렸던 것도 아니다. 상대가 내 기준에 차지 않는 사람이여 서라기보단 그냥 나의 로맨스 서사가 너무 재미없는 이야기라는 데에 실망했다.
몇 번의 연애를 거쳐 사랑이라는 게 전혀 로맨틱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건 운명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는 것도, 첫눈에 누군가를 알아보게 되는 일도 아니며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힘든 일이라는 걸 아무도 알려준 적이 없는 데다 로맨스 영화로 쌓아온 사랑에 대한 환상이 가득했기 때문에 거듭된 실망을 통해서만 그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난 영화 속의 이자벨이 한심하지 않았다. 그 실망과 실패가 거짓부렁으로 포장한 로맨스보다는 훨씬 더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이자벨은 중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실제로는 나와 다른 타인을 사랑하는 길은 멀고도 험하기 때문에. 사랑을 바라는 게 그렇게 바보같은 걸까? 아니 정말 바보같은 건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저 사기꾼이잖아. 그렇게 실패하더라도 다시 새로운 사랑을 기다리고 용기를 내는 게 훨씬 더 용감한 거 아닌가?
여전히 인어공주는 좋아하지만, 수많은 로맨스 서사에 실망했던 건 역설적으로 그 이야기들이 사랑을 말하지 않는 나르시시즘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란 주로 상대를 보지 않는 어떤 자기만의 환상 같은 거다. 자기 판타지를 꼭 충족시켜 주는 사람을 만나고 그런 이야기로 진행되어야만 완결이 되는. 평생 동안 봐 온 온갖 픽션이 내게 세뇌시킨 '나를 지켜주는 남성'에 대한 환상이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지만, 그런 관계는 결국 거부하게 됐다. 로맨틱한 관계 속에 나를 종속시키고, 사랑을 갈구하는 일은 나를 결코 채워주지 못한다는 걸
사랑을 받는 어린아이로 남는 것은 쉽지만 사랑을 주는 일은, 어떤 사람들은 평생 동안 실패할 만큼 어려운 일이다. 나는 여전히 내가 낭만적인 사람이라고 믿고 로맨스를 소비하기도 한다. 로맨스의 대부분이 여성 작가에 의해 쓰이는 데 여성 독자인 내게 재미가 없을 수가 없다. 영화 같은 키스가 내 삶에 있기를 바라기도 한다. 솔직히 가끔은 그런 환상이 사라져 버린 내 삶은 너무 재미없는 거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낭만적인 역할극을 더는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낭만으로 덧칠해진 환상이 끝나고 나면 그 후에 거기에 남는 건 뭘까. 그 역할극이 내게 남기는 것은 사랑이 아닌 환멸뿐이다. 서른 살이 다 돼가는 지금 돌이켜봤을 때 10년 간 내가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성장은, 사랑받기를 원하기보다 사랑을 줄 줄 아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는 것이다. 로맨스는 나를 구하지 않는다. 아니 구원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일은 자기 삶을 스스로 마주 볼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렛 더 선샤인 인>의 프랑스어 원제는 <un beau soleil intérieur>, 마지막 점쟁이가 한 대사인 "내 안에서 빛나는 햇살을 찾아보는 거예요." 중요한 건 운명의 남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아닌 내 안의 빛을 볼 줄 안다는 것, 로맨스는 없어도 삶은 언제나 있다는 것. 그걸 이자벨의 미소가 내게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