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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나 Jul 18. 2024

돌이 되어라

<바이크 라이더스>, 캐시



정조를 굳게 지키던 아내가 멀리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 그대로 죽어 화석이 되었다는 전설적인 돌. 또는 아내가 그 위에 서서 남편을 기다렸다는 돌. 사전에 적혀 있는‘ 망부석’의 의미다. 얼마 전 제프 니콜스의 신작인 ‘바이크 라이더스’를 보다가 이 단어가 떠올랐다. 나는 제프 니콜스가 감독한 대부분의 영화를 좋아하고, 이 영화도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보다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이 여자들은 왜 이렇게까지 기다릴까. 1960년대 미국 중서부의 바이크 모임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에서 캐시는 그 일원 중 한 명인 베니의 자유분방한 매력에 빠져들어 결혼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베니는 어느날 갑자기 삶에 찾아온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아무 예고도 없이 바이크를 타고 떠나버린다. 캐시는 기다린다.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삶이 낸 상처를 아내와 함께 견디기보단 말도 없이 떠나버리는 걸 택한 남자가 끝내 돌아오자 그를 원망하지도 않고 안아주고, 가만히 토닥인다. 캐시는 애초에 이해심 많은 사람이지만 무엇보다 그를 무척 사랑했으니까. 스스로 볼모가 되기를 자처하는 사랑이더라도, 돌이 되더라도, 어쨌든 그걸 지켜낸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내가 삶에서 가장 먼저 접한 로맨스 서사는 당연히 한국 드라마였다. 내가 어릴 적에 본 드라마 속 여자들은 울고, 애가 타고 속이 끓고 한 남자만을 사랑했다. 그의 연락을 기다리고, 그의 애정을 기대하고, 그의 사과를 기다렸다. 남자가 표현이 서툴고, 때로는 그 방법이 폭력적이어도, 본인이 위험에 처해도, 돌이 되어도, 늘 사랑을 택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떠나지 않았다. 죽어서 세상을 떠나는 결말은 꽤 있었지만. 마치 사랑받지 못하면 죽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망부석 설화와 이런 이야기들은 어린 내게 꽤 인상적이었는지 초등학교 글쓰기 시간에 사랑하는 남자를 기다리다가 얼음이 되어 굳어버린 공주의 이야기를 썼던 기억도 난다. 어린 내가 직접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낼만큼 그런 구조의 서사가 익숙했다. 많은 서사 속에서 남자들이 뭐가 됐든 많은 걸 할 동안 여자들은 한 곳에 정박해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변하면서 이런 여성 인물들의 성격도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나는 픽션 바깥의 현실에서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가 다시 돌아와서 용서를 구할 때까지. 나를 기다리느라 그 자리에서 굳어서 돌이 되는 남자 따위는 없었지만 뭐, 원래 그런 거라니깐. 나는 점점 자라면서 내가 뭘 기다리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를 사랑해 줄 남자?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남자? 아니면 사랑을 한다는 기분? 아니면 꼭 기다려야만 하는 알 수 없는 무언가? 망부석 설화를 떠올리며 나는 생각했다. 왜 돌이 돼야 돼? 오지도 않는 남자를 기다리느라? 떠나버린 남자를 그리워하느라?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 죽지 않고 그냥 계속 살아갈 수는 없었던 걸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돌이 되긴 싫었다. 한 자리에서 천천히 굳어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으로 살아있고 싶었고,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기만 한다면 절대 불가능할 그 모든 것들을 탐하고 싶었다. 나는 이야기 속의 여자들이 그 자리에서 가만히 시들어가는 걸 보는 게 싫었다. 사랑을 줘야 한다는 임무를 완수하면 그 후의 삶은 마치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처럼 구는 여자들을, 돌이 되어버린 할머니 엄마 이모를 어떤 마법이라도 부려서 다시 살아나게 하고 싶었다.


그가 떠나도 삶은 흘러가고, 그런대로 또 괜찮고, 언젠가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될 거고, 앞으로도 넌 잘 견뎌낼 거라고. 그런 말을 해주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가 마침내 돌아와야만 완성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그래서 언제나 소설 속의, 영화 속의, 지나치게 무모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규칙을 어기고, 사랑에 실패하고, 함부로 훌쩍 떠나버리는, 그런 나와는 정 반대인 여자들이 좋았다. 좀 과장하자면 그 여자들이 나를 움직여놓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렇게까지 용기 있진 못하지만, 적어도 돌이 되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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