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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na Feb 08. 2024

아버지의 법칙

<가여운 것들>과 <디 아이언 클로>를 보고



    <가여운 것들>은 해부학 교수인 고드윅이 성인 여성의 몸에 갓난아기의 뇌를 이식해 다시 태어난다는 다소 기괴한 설정을 가진 이야기다. 엠마 스톤이 연기한 벨라는 여성판 프랑켄슈타인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벨라는 벨라일 뿐 그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리길 거부할 것 같다. 고드윅은 자신의 위험하고도 이상한 실험체인 벨라를 자식처럼 매우 아끼고,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집 안에만 놔두고 싶어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벨라의 지능이 발달할수록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커지고, 성적인 호기심도 새로 깨어난다. 성적인 쾌감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는지 처음으로 알게 된 벨라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 데에 있어서 전혀 주저함이 없다. 더는 집에만 갇혀 있지 않기로 결심한 그녀는 모험을 떠나고, 마치 초원 위에 막 던져진 새 생명처럼 세상과 자기 몸을 탐구하고, 언어를 익히고, 집에만 갇혀 있을 때는 몰랐던 세상의 아름다움, 인간들의 비정함과 역겨움까지도 배우게 된다. 고드윅 박사, 그러니까 자기를 탄생시킨 아버지로부터 멀어질수록 벨라는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우고, 사람을 가여워할 줄도 알게 된다. 벨라는 아버지의 규칙을 깨는 여자, 더 나아가서는 남성들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여자다. 영화에서 비중이 큰 섹스에 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녀가 고드윅의 집을 나와 다시 돌아갈 때까지 그 모든 여정이 그녀가 자기 인생을 그 누구의 손에도 맡기지 않고 자기 손으로 직접 쓰는 과정이다. 그녀에게 생명을 부여한 것은 아버지이지만 그녀의 삶을 만든 것은 그녀 자신이다. 삐걱거리는 인형의 몸이 아니라 진짜 다리를 원했던 바비처럼, 물거품이 될지언정 바깥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했던 인어공주처럼, 벨라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세상을 탐하고 성큼성큼 더 멀리 나아간다. 아버지의 법칙을 위반한 딸들이 더는 어린아이가 아닌 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을 때, 거기엔 나이 든 가여운 한 남자가 있을 뿐이다.


<디 아이언 클로>를 보고 형식적인 면에서나 주제 면에서나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가여운 것들>을 떠올린 이유는, 이 영화의 아들들은 벨라와는 반대로 아버지 때문에 멀리 갈 수도 없고, 아버지의 규칙을 깰 수도 없어서 고통받는 남자들이기 때문이다. 폰 에릭 형제의 꿈은 아버지의 꿈과 동일시되고, 인생의 목표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는 것으로 귀결된다. 최근에 아버지의 삶을 따르지 않으려다가 실패하는 남성들에 대한 서사를 본의 아니게? 자주 보게 됐는데, 이 영화에서도 아버지는 거대한 벽이자 넘을 수 없는 산 같은 존재이다. 네 명의 아들을 모두 프로레슬링 세계 챔피언으로 만들고 싶은 그는 아이들이 공을 가지고 놀 때 얼굴에 띈 미소를 바라보기보다는 얼마나 빠르고 날렵하게 움직이는지를 눈여겨보는 남자다. 더 강하고, 남들보다 센 남자가 되는 걸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삼는 아버지는 가족이라기 보단 코치에 가깝고, 그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식은 훈육 보단 트레이닝에 가까워 보인다. 더 비극적인 것은 이 청년들은 아버지의 애정을 갈구한 나머지 자기 몸이 상하고 부서질 때까지 혹사시키고, 그럼에도 그 대가로 인정을 돌려받지 못할까 봐 불안에 떤다는 것이다. 벨라와는 다르게 그들에겐 자신이 뭘 좋아하고 어떤 걸 원하는 사람인지 탐구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안타까운 청년들은 아버지라는 차가운 철조망 안에 갇혀 서서히 죽어간다. 벨라가 자기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해 준 아버지를 떠나서 새로운 몸까지 얻게 됐다면, 폰 에릭 형제들은 아버지를 떠나지 못해서 자기 몸을 잃게 된다. 때로는 가엽고, 때로는 비정한, 우리가 쉽게 떠나지 못하는 그 아버지란 세계를, 딸들은 결국 떠나고, 아들들은 그 안에서 머무려고 한다. 그에 대한 결과는 벨라의 마지막 얼굴, 세상을 알고 자신을 알았으니 더는 무서울 게 없다는 그 표정, 그리고 평생을 아버지의 그늘 안에서 살아왔던 형제의 맏형인 케빈이 흘리는 눈물이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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