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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나 Oct 26. 2024

서로를 지키는 관계

<비밀은 없다>, 연홍과 민진




아나운서 출신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한 '종찬'과 정치인의 아내로 내조를 충실하게 해나가는 연홍의 하나뿐인 중학생 딸 민진. 번듯한 집, 훤칠하고 잘 나가는 아빠와 그 옆의 예쁘고 가정적인 엄마.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은 다 갖춰져 있지만 민진의 실종으로 모든 것이 깨진다. 친구와 숙제하러 간다더니 홀연히 사라져 버린 딸을 연홍은 찾으려 애를 쓴다. 그 과정에서 민진이의 비밀이 한 꺼풀씩 드러난다. 일단 민진이가 적어놓고 간 친한 친구 자혜의 번호로 연홍이 전화하자 생판 모르는 사람이 받는다. 민진이가 늘 친한 친구라고 말하던 '자혜'는 사실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심지어 그 친구는 엄마의 옛날 사진을 보고 그 모습과 비슷하게 꾸며낸 가상의 존재다.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는 성실한 친구라고. 딱 엄마가 좋아할 만한 친구를 만들어서 대충 둘러댔던 것이다. 연홍에게 민진이는 그냥 착하고 공부도 곧 잘하는 딸이었지만, 딸의 실종 이후 그녀를 추적하며 알게 된 민진이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연홍은 몰랐다. 민진이 학교에서 유명한 왕따였다는 것도. 민진이의 유일한 친구는 자혜가 아니라 미옥이라는 것도. 그리고 둘은 동성애적인 면을 포함해 내밀한 부분을 공유하는 사이라는 것도. 갑자기 오른 성적은 시험지를 빼돌린 덕분이었다는 것도. 하지만 민진이는 이 모든 걸 숨긴 채 집에 오면 착한 딸 역할에 충실하다. 인생은 지루하고 어른들은 역겹다는 걸 이미 다 알아버렸는데,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태연하게 웃어 보인다. 나는 그 얼굴 뒤에 감춰진 옅은 기운이 외로움이라는 걸 알고 있다. 자기가 몰랐던 민진이를 하나씩 알게 되면서 연홍은 남편인 종찬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보, 우리 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착한 애가 아니었는지도 몰라...' 나는 그 대사를 듣고 담임선생님과 통화하던 엄마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우리 애가 정말 착하고 지금까지 항상 모범생이었거든요.' 그 말이 떠올라서 웃음이 나왔다. 그때 나는 속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 미안하지만 난 엄마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착한 애는 아니야. 


그렇지만 연홍이 딸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진이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연홍이 몰랐던 것은 사랑에도 적절한 방법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내 기억을 더듬어 봐도, 엄마는 모를 수 있다. 나 또한 엄마를 사랑했지만 한 번도 나를 보여준 적이 없었으니까. 민진이는 학교에서 소위 말해 '재수 없는 년'으로 찍혔다. 잘사는 집 애가 겸손하지도 않고, 미국 좀 갔다 왔다고 영어 쓰면서 으스대고, 유행하지도 않는 이상한 노래나 들으니까. 그래도 그 옆엔 민진이의 하나뿐인 친구 미옥이 있다. 둘은 그 이상한 노래를 같이 즐겨 듣고, 이상한 노래를 함께 만들어 공연도 하고, 둘만의 아지트를 지어 올린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중학생인 나 또한 내 주위로 성벽을 쌓아 올렸었다. 그 성의 대문에는 크게 쓰여 있었다. 수준 미달 출입 불가. 그 문을 열고 들어오려면 나와 많은 부분 통하는 게 있어야만 가능했다. 일단 남자들은 그 자격이 없었다. 우습지만 그때의 나는 남자애들의 수준을 속으로 비웃었다. 고작 내 몸에 대한 호기심일 뿐이면서 열심피 포장하는 게 같잖았다. 나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없으면서 자기가 만든 내 이미지를 열심히 사랑하고 있는 게 한심할 뿐이었다. 그리고 어린 나는 생각보다 오만했다.시시한 그들은 단 한 번도 내가 쌓아 올린 성벽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그 나이에는 이상하게 여자친구들만이 출입 가능한 곳이었다. 민진이와 미옥이처럼, 둘만의 요새를 쌓고 그곳을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로 채우고.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우리의 영역, 그것이 그토록 중요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하지만 그건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울타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엄마는 그곳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이상 엄마가 나를 너무 몰랐고 내게 무관심했었다고 원망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내가 백 점짜리 성적표만 있으면 완성되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아줬으면 했다. 그냥 엄마가 나의 외로움을 눈치채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된 것 하나는 엄마도 내가 엄마의 외로움을 눈치채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엄마가 내게 '착하고 얌전하고 공부도 잘 하는 예쁜 딸'의 이미지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것은 어쩌면 엄마가 엄마이기 이전에 딸로서 수행했던, 혹은 수행해야 한다고 여겼던 역할일지도 모르겠다. 딸의 교복을 떠올리면서 연홍은 '똥구멍이 다 보이는 치마'라고 공격적으로 말한다. 중학생 때는 그런 부류의 말이 듣기 싫었지만 지금은 그나마 그것이 엄마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 선택했던 방법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내가 그런 공격을 듣지 않으면서 짧은 치마를 자유롭게 입을 수 있는 조건은 두 가지다. 사회가 그런 말을 멈추거나, 내가 짧은 치마를 입지 말거나. 아마 엄마는 후자를 선택한 것 같다. 세상이 그런 말을 그만둘리가 없다고 체념했기 때문에 혹은 계속 그런 말을 듣다 보니 그게 왜 잘못된 건지도 잊어버렸기 때문에. 엄마 또한 사회로부터 '똥구멍이 다 보이는 치마'를 입었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을 테니까. 세상이 날 어떻게 대할지 일찌감치 알았기 때문에 곧 죽어도 세상에서 예쁨 받을 수 있는 여자애가 되길 바랐던 걸까. 


영화에서 아버지인 종찬은 주로 무관심하고, 외도를 저지르고, 심지어 아내와 딸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었으며 사건의 원인 제공자이지만, 이 이야기는 그러한 남성에게 복수하는 것으로 완성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종찬은 딸과 엄마의 이야기에 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종된 민진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연홍이 폭주하고 가해자에게 복수를 결심하기는 하지만, 이때 연홍을 연기하는 손예진 배우의 모습은 자식 잃은 엄마의 광기라기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그녀를 죽인 그 남자에게 복수하는' 캐릭터처럼 보인다. 그래서 기존의 많은 영화에서 자신의 연약한 연인을 앗아간 악마에게 복수하는 남성의 역할을 뒤집으려는 의도가 커 보인다. 가해한 남성을 짓밟는 데에 집중하기 보다, 진짜 영화를 완성하는 것은 마지막 장면이다. 연홍은 민진을 죽게 만든 자에게 복수한 뒤에 민진이 죽은 산에 가본다. 그 자리에 가만히 누워있다가 민진의 단짝 친구인 미옥이가 오는 걸 본다. 연홍은 같은 학교 교복을 입고 머리 스타일이 비슷한 미옥을 보고 죽은 민진이로 착각하고 미옥을 끌어안으며 민진의 이름을 계속 부른다. 정신이 돌아온 연홍이 미옥인 걸 알아보고 미옥에게 묻는다. '민진이가... 지 엄마는 좋다고 하디?' 미옥은 대답한다. '멍청하다 그랬어요. 엄마는 멍청하다고... 그래서 자기가 지켜줘야 된다 그랬어요...' 


엄마는 어린 딸을 지키지만 딸들 또한 엄마를 지켜야 한다. 엄마와 딸은 서로를 보호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민진이가 일찌감치 알고 있던 아버지와 학교 선생님의 외도 사실은 엄마를 지켜주기 위해 남겨둔 큰 비밀이다. 연홍은 그 넓은 집에서 혼자였다. 주방에서 가족과 남편 동료들의 식사를 준비할 때도, 늦은 밤 침실에서 잠이 들 때도, 책상 앞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때도. 민진 또한 세상에서 그랬다. 연홍과 민진, 엄마와 딸의 사랑은 서로를 지키는 방식으로만 행해졌기 때문에 서로 제대로 보는 것이 어려웠다. 둘 다 외로운 걸 몰랐기 때문에 엄마와 딸의 사랑은 어긋난다. 엄마는 나를 몰랐지만, 나 또한 그랬다. 엄마도 단지 한 명의 불완전한 사람, 외로운 여자였다는 걸 오랜 시간에 지난 뒤에야 이해하게 되었다. 외로운 사람들끼리는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모른다. 그런데 난 그 방법을 아직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이 더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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