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마을 다이어리>, 사치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자매는 오래된 집에 살고 있다. 가마쿠라 바닷가가 가까이 있는 조용하고 작은 동네. 나무가 우거진 산과 바닷바람, 마당에 있는 커다란 매실나무. 원작 만화도 그랬지만 영화에서는 공간을 더 중요하게 다루는 듯한 느낌이었다. 가족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나는 집에 대해서 더 오래 생각했다. 영화를 보고 돌아와 몇 평 남짓한 방에 앉아 있는데, 옆집에서 흘러나오는 잡다한 소음을 듣고 있으니까 새삼 이렇게 비슷하게 생긴 방이 이 건물에만 몇 개가 더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됐다. 여기가 내 집인가? 쉽게 대답할 수가 없다. 봄이 되면 이 집에서도 곧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처음 이사를 하던 날은 어리둥절했다. 뭣도 모르고 아빠의 차에 실려 넓은 고급 아파트에 도착했다. 새집에서 처음 보내는 밤에는 설레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해서 잠을 설쳤다. 그 아파트엔 원래 살던 낡은 연립에 있던 할머니와 함께 가꾸던 상추 텃밭과 이름 모를 식물들 대신 키가 크고 잘 손질된 대형 화분이 있었다. 집 뒤의 흙밖에 없던 공터 대신 건물 안에 헬스클럽이 있었다. 다리를 절던 옆집 할아버지도 그 아파트엔 없었다. 10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겨울이면 너무 추워서 마음먹고 가야 했던 화장실 대신 커다란 욕조가 있는 넓고 따뜻한 화장실이 있었고, 허름한 슈퍼와 닭집 대신에 아파트 상가에는 편의점과 프랜차이즈 치킨집이 있었다. 초등학생 때 그렇게 이사해 고등학생 때까지 살았으니 그 풍경은 곧 나의 생활이 되었다. 사는 곳은 곧 내 삶과 연결됐다. 모든 것이 아파트 광고에 나오는 풍경처럼 평온하고 쾌적했다. 그러나 그곳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 애정을 갖고 돌보지도 않았다. 왜인지 한 번도 그곳이 우리 가족을 감싸주는 보금자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 아파트에서는 쫓기듯 나왔고, 몇 번이나 이사를 한 끝에 나는 아무 미련도 없다는 듯이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나라로 훌쩍 떠나왔다. 서울에서도 내 집은 없던 거나 마찬가지니까 여기서 집을 만들어나가면 되지 않을까 라고 막연히 생각했지만, 사실 별로 집을 찾고 싶다는 마음도 없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는 그냥 따라나섰기에 몰랐지만 집을 보러 다니고 이사를 가다 보니 점점 짐을 줄여야 했다. 언젠가는 내가 정착해서 죽을 때까지 살 아름다운 집을 꿈꾸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게 내 삶이 아니면 뭔가 싶다. 여긴 내 집이 아니니까 하면서 벽에 못질을 못 할 때, 벽지에 자국이 남지 않게 사진을 조심히 떼어 낼 때, 어차피 이사할 거니까 라고 중얼거리며 고장 난 전등을 그냥 둘 때, 내 집을 가꾸며 영원히 사는 것을 꿈꾸면서도 한편으로는 꿈꾸지 못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큰 언니인 사치는 집에 대한 애정이 다른 자매들보다 크다. 그녀는 늘 집을 쓸고 닦고 아끼고 돌본다. 사치는 막내인 스즈를 받아들이면서 다른 표현이 아닌 '여기가 네 집이야, 언제까지나'라고 말한다. 그녀의 애인이 미국에 함께 가자는 제안을 했을 때도 끝내 거절한 것은 두 사람 사이의 여러 이유도 있겠지만 가마쿠라가 그녀의 집이기 때문에, 그 집을 지키고 싶기 때문 아니었을까. 그건 무거운 책임감이라기보다는 애정에 가깝다고 느꼈다. 만약 사치가 아니라 요시노에게 같은 제안이 왔더라면 요시노는 떠나버렸을 것 같기도 하다. 자매의 어머니가 오래된 집을 파는게 어떠냐고 이야기했을 때 사치가 화를 내는 장면만 봐도 집에 대한 둘의 태도와 애정의 크기가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사실 한 때는 평생 시골이나 작은 도시에 살면서 태어난 곳을 떠나지 않는 것이 바보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예전에 나라면 사치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 굳이 저런 작은 마을에서 부대끼고 살아야하나 하면서. 나는 타의든 자의든 이주하는 게 익숙했으니까. 하지만 남프랑스에 내려와서 산 후로 자기 지역을 집처럼 여기고 아끼고 애정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보면서 한 곳에서 삶을 만들어가는 일이 단단한 집을 지어올리는 것과 같다고 느꼈다. 사치에게 가마쿠라에서 동생들과 함께 사는 집은 오랜 시간을 품고 있는 공간일 것이다. 그게 혼자 견뎌야 했던 쓰린 기억이든, 행복하게 빛나는 기억이든 그것들을 품고 시간을 함께 보내왔을테니까. 그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집을 사치는 잃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자주 떠나고 싶다고 느껴왔던 건 결국 애정이 없어서였을까. 내겐 물리적인 의미로도 비유적인 의미로도 집이 없다. 물론 나의 선택이긴 하지만 정말 나는 혼자서, 내가 닿는 곳이 어디인가 보자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다. 누가 떠밀지도 않았는데 마치 어떤 의무처럼 떠나야 할 것만 같았다. 그게 그 전에 내가 살던 곳에 엄청난 애착이 없었고 깊게 뿌리 내리지 않았기에 가능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랑해서 차마 떠나기 힘든 집이 없다. 그런데, 여기가 내 집이다. 마치 10년 가까이의 세월동안 그 아파트라는 공간이 내 생활에 강력하게 침투해온것 처럼, 지금 이 곳이 내 생활을, 나를 만들고 있다. 가끔은 진절머리 나는 거리의 자동차 소음과 빛이 잘 들지 않아서 거의 자라지 않는 화분이 지금의 나일 수도 있다. 마당의 매실나무와 낡은 계단과 욕조, 나무 기둥에 키를 표시해 놓은 눈금이 사치를 만들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