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소 빵집>, 빵집의 소녀
파리에서 친구와 한 바에서 만나기로 한 날, 그가 매우 늦는 바람에 나는 어정쩡하게 혼자 앉아 있는 신세가 되었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도 않고, 파리의 시끌벅적한 바에서 혼자 술을 마실 만큼 뭔가 사연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약속을 취소하고 나갈까 했는데 잠시간 고독했던 내가 적적해 보이는 할아버지와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때는 프랑스에 도착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불어가 서툴 때였지만, 마침 할아버지도 젊은 시절 영화 현장에서 일해본 적이 있던 사람이라 영화를 주제로 한 대화가 나름대로 이어지게 되었다. 나는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고 간략한 소개를 했고, 할아버지는 내게 프랑스 영화 중엔 뭘 좋아하냐고 물었다. 나는 이런저런 영화 얘기를 하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도 좋다고 했다. 한국의 내 방 벽에는 <여름이야기>의 스틸 사진이 붙어있었다고.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몽소 빵집>이라는 에릭 로메르의 단편 영화를 추천했다. 파리에서 찍은 영화인데 마침 그 술집이 있었던 거리와 별로 멀지 않은 곳에서 찍어서 생각이 났다고 했다. 재밌는 영화라고 꼭 보라면서 내용을 열심히 설명해 주셨다. 자긴 에릭 로메르 영화에 나오는 파리 풍경이 참 좋다고. 아마 그 무렵에 젊은 파리지앵이었던 할아버지가 추억할만한 풍경이 담겨있는 영화가 아닐까 짐작했다.
내게 나중에 파리를 배경으로 영화를 찍는다면, 어떤 영화를 찍고 싶은지, 어디서 찍고 싶은지를 묻기도 했다. 예전 필름 시대 때 영상을 찍고 필름을 직접 잘라서 편집했던 얘기도 해주셨다. 나도 아시아 영화들을 추천했고, 점점 긴장이 풀려서인지 앞으로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도 막 떠들어댔다. 할아버지는 느리고 어설픈 내 프랑스어에도 답답한 기색 한 번 없이 귀 기울여 들어주었고, ‘너 말 참 잘하는구나.’ 하며 웃으셨다. 부족한 언어 실력에 자신감은 떨어지고, 조바심과 불안감의 연속인 유학 생활에 그 작은 말이 참 위로가 됐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던 길, 사람이 거의 없는 밤거리를 걸으면서 파리는 참 아름다운 도시라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그날 영화를 보았다면 좋았겠지만 이런저런 일들에 치여 이 영화를 잊고 살다가, 갑자기 에릭 로메르의 다른 영화들을 훑어보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이제야 그 영화를 보았다. <몽소 빵집>은 에릭 로메르의 도덕 이야기 연작 중 하나로 한 대학생이 우연히 길에서 한 여자를 보고 반해 그 여자가 일하는 갤러리 근처에 있는 빵집에 매일 가서 그녀와 마주치길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지 않고, 주인공은 마치 그녀에게 복수라도 하겠다는 듯 빵집 소녀에게 치근덕거리기 시작한다. 빵집 소녀는 언제나 그에게 미소 지어주는 사람이고, 그를 거절할 것 같은 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대신 만나는 여자, 주인공이 기다리는 시간을 채워주는 사람이다.
20분 남짓의 단편 영화는 대학생의 목소리로 진행되지만 내게는 이제 막 지방에서 파리로 올라와서 빵집에서 일하던 소녀의 얼굴이 계속 기억에 남았다. 대학생이 한눈에 반한 여자는 어찌 보면 파리에 막 도착했던 내가 꿈꿨던 여성이었던 것 같다. 우리가 파리에 가면 흔히 볼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하는, 미술 갤러리에서 일하고, 늘 멋진 코트를 입고 구두를 신는 그런 여자들 말이다. 영화 속 60년대 파리의 모습은 내가 걷던 거리와 겹쳐졌지만, 그때의 나는 정말 내가 파리와 어울리는 사람인지 혼란스러웠다. 빵집 소녀의 눈빛이나 미소가 낯설지 않았던 것은, 나도 외국 생활을 하며 당황스러워질 때마다 자주 웃었기 때문이다. 별다른 마음도 없이 그저 가벼운 관심으로 다가오는 사람들, 나를 좋아하기보다는 신기해하는 것에 가까운 남자들을 자주 마주쳐야 했고 그건 정말 피로한 일이었다. 나는 순진하지는 않았어도 많은 사람들의 호의를 진심으로 믿고 싶어 했었고, 그 덕에 이 영화를 추천해 준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겠지만 한편으론 매우 피곤한 일에 휘말리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왜 이 영화를 내게 추천했던 걸까? 지금에 와서 물어보고 싶지만 이젠 알 수가 없다. 이런 식으로 한 영화와 내 삶이 연결되는 지점이 생기면 그 영화는 잊을 수 없게 된다. 영화가 이렇게 내 삶에 파고들어 오는 순간이 하나씩 늘어갈수록 영화를 더 사랑하게 된다. 1963년작인 이 영화에 빵집 점원으로 출연했던 배우인 클로딘은 이 영화 이후로 출연작이 없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빵집에서의 짧은 만남, 짧은 대화가 영화에서 만날 수 있었던 그 얼굴의 전부다. 그 날 이후로는 볼 수 없던 할아버지도, 영화 속 파리에 상경한 빵집 소녀도, 60년대에 이 영화에 출연했던 젊은 배우도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기를 바라며. 몇 년 전 그때의 기억을 간직한 채로, 이 영화는 소녀의 미소와 내가 걸었던 파리의 거리와 함께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