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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나 Oct 26. 2024

지붕도 법도 없이

<방랑자>, 모나


    3월 즈음 아직 봄이 오지 않은 파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시차적응 때문인지 왠지 모르게 잠이 오지 않아서 티비를 켰더니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영화를 연이어서 틀어주고 있었다. 자막도 없어서 대사를 전부 이해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뜬눈으로 멀뚱히 그 화면만을 바라보았다. 감독의 여러 영화 중에서 그 밤에 <방랑자>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 후 며칠이 지나서 아녜스 바르다 감독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파리 14구에 있던 감독님의 집 앞에는 추모를 표하는 메시지와 꽃들이 넘쳐났다. 내가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감독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니 왠지 뒤숭숭한 기분이 들었다. <방랑자>를 파리에서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 있을 때도 한 번 본 적이 있는 영화였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젊은 여성 모나를 연기한 상드린 보네르의 얼굴이 머릿속에 강력하게 남아 있었다. 


내게는 어디든지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 마치 그리스 신화의 떠돌이들의 수호신인 헤르메스처럼 가볍게 자기 몸을 옮겨 다닐 수 있는 사람, 그러니까 정착하지 않는 삶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나는 여행자로서의 삶에 매력을 느꼈고 그런 삶의 방식은 나를 홀가분하게 만들어주었다. 파리로 오기로 결정했던 것도 파리가 뉴욕 같은 도시처럼 세계 곳곳에서 온갖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라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 잠시동안 외국 생활을 한 적도 있었고, 다른 나라로 간다는 것은 아마 내 세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듯 내게도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코즈모폴리턴이 되기를 꿈꾸며 자란 것은 그런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나 갈 수 있는 사람이란 결국 아무 곳에도 없는 사람이 아닐까. 영화에서 집 없이 돌아다니는 모나를 보고 한 남자가 했던 말처럼, 완전한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완전한 고독을 의미하는 거 아닐까. 영화는 다큐멘터리 같은 인터뷰 형식을 취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그런 모나를 냉정한 시선으로, 때로는 약간의 호기심으로, 애정으로 보기도 한다. 모나를 함부로 판단하거나 '자유를 찾아 떠난 여성'이라는 스테레오 타입에 가둬놓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주류의 선택을 거부한 모나를 용기 있고 대담하다고 볼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한심하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녜스 바르다가 그려낸 방랑하는 여자는 쉽게 불쌍해지지 않는다. 그건 모나를 연기한 상드린 보네르 배우의 힘과 감독이 세상을 보는 시선이 맞물린 결과라고 생각되었다. 


젊은 여성이 혼자 배낭을 하나만 매고 온갖 곳을 돌아다닌다는 것은 위험 부담이 큰 일이다. 나도 혼자 여행을 자주 다녔기 때문에 혼자 있는 여성이란 쉽게 불완전한 상태로 여겨진다는 것을 안다. 영화는 겨울철 농촌에서 얼어 죽은 여자의 모나의 모습으로 시작하는데, 모나 가 떠돌아다니다가 어떻게 해서 죽게 되었는지를 거꾸로 시간을 돌려 본다. 모나는 영화의 원제 '지붕도, 법도 없이(sans toit ni loi)'처럼 말 그대로 어떤 울타리도 보호막도 없는 사람이다.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노숙인이면서 법과 제도를 거부한고, 돈 없이 떠돌아다니는 만큼 그녀가 포기해야 하는 것들도 많다. 그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청결함과 안전이다. 오랫동안 감지 못한 머리와 누더기 같은 옷과 지독한 냄새는 그녀를 항상 따라다니고, 때로는 성적으로 위협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우리가 모나처럼 배낭 하나와 몸뚱이 하나만 끌고 아무것도 없이 다니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여행은 명백하게 돈이 많이 든다. 내가 지불하는 돈의 양과 청결함과 안전함의 정도가 비례한다. 내가 하는 여행에는 과연 얼마만큼의 자유가 주어져 있을까? 모나의 여정에는 안락한 침대도, 따뜻한 방도, 연인도 친구도 없다. 대신 그녀에겐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과, 바람과, 우리가 그토록 강렬하게 원하는 '자유'가 있다. 그런데 그 자유의 끝에는 차가운 길바닥에서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자유를 얻은 동시에 어쩌면 우리가 가장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더러움과 죽음을 얻었다. 우리가 여행하면서 원하는 건 정말 자유일까, 아니면 자유를 가장한 소비일까? 우린 돈을 쓰면서 쉽게 치유를 말하지만 그게 때로는 돈이 있어야만 치유가 가능하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모나 가 떠돌아다니는 과정은 결코 예쁘지 않다. 그의 손엔 떼가 묻어 있고, 완전히 자유로운 그 여행은 외롭다. 하지만 애써 의미 있어 보이는 말들로 포장하지 않아도, 나는 모나의 여정에서 삶을 온전히 자기만의 것으로 만드는 순간을 본다. 그 봄에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으로 훌쩍 다른 나라로 떠나온 내게도 그런 순간이 주어지기를, 이 영화를 보면서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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