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교살자>,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
언젠가 몇 번 만난 남자가 있었다. 밥을 같이 먹고 대화를 한 게 전부였지만 그 후에도 그에게 이성적으로 매력을 느끼진 못했고 그냥 아는 사람 중 한 명 정도로 생각했다. 연락이 오면 예의상 답을 하긴 했지만 솔직히 대화가 잘 통한다는 생각도 안 들어서 점점 연락을 줄이게 됐는데 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난 명확하게 대답했다. 발전할 수 있는 관계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그럴 마음도 없다고. 그럼 친구로라도 지내자길래 그러려니 했다. 솔직히 대화를 나눌 때마다 왠지 모르게 이기적인 면모가 느껴졌고 가끔씩 나를 칭찬하는 척 다른 여성들을 헐뜯을 때도 있어서 친구로 지내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했고, 그 후로는 연락이 오면 답을 안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를 향한 공격이 가득한 메일이 하나 왔는데 그가 보낸 것이었다. (내가 문자에 답을 안 하니까 메일로 보낸 거 같다) '네가 뭔데 사람을 무시해...'부터 시작해서 욕설은 기본이고 부모님을 모욕하는 말도 있었다. 그냥 무시했으면 좋았겠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 화가 나서 답을 보냈다. 답을 받아서 더 신이 났는지 그 후로도 나를 욕하는 글을 지속적으로 보냈고, 나는 가족과 친한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 메일을 읽는 순간 그가 내가 사는 곳을 모른다는 게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동생과 둘이 사는데 이런 인간이라면 집에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몇 번 만났을 때도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걸 싫다고 하고 그냥 혼자 왔던 게 정말 잘했던 거였다.
연인도 아니었고 그냥 아무 사이도 아니었지만 거절당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를 증오하는 남자를 만나는 경험은 매우 불쾌했다. 그래 난 그냥 운이 좀 좋아서 욕만 좀 먹고 끝난 거겠지. 지금도 매일매일 수많은 여성들이 사귀던 남자에게 폭행, 살해당하고, 한국에서도 이런 끔찍한 사건들이 연일 보도되지만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여성들은 높은 비율로 친밀한 관계에 있는 남성에게 살해당한다. 그런 남자라면 진작에 조심했으면 됐을텐데? 하지만 나에게 욕설을 퍼붓던 그 남자는 세상 폭력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친절한 인상이었다. 그는 아주 평범해서 몇 번을 봐도 잊어버릴 만큼 특징 없는 남자였다.
나는 여성이 강력 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영화를 볼 때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라는 문구를 또 보게 될까 봐 초조했다. 공교롭게도 최근에 보았던 여성들이 겪었던 폭력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두 편의 영화 <보스턴 교살자>와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는 6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두 영화가 2020년대에 나왔다는 건 이 이야기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도 필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는 이탈리아에서 작년에 연간 흥행 1위를 한 작은 규모의 흑백 영화다. 2차 대전 직후에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던 여성이 어떤 결심을 하게 되는 이야기다. 이 영화가 현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왜 필요했는 지를 증명이라도 하듯, 개봉 당시 이탈리아에서 한 대학생이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영화의 흥행과 맞물려 전국적인 시위와 정치적인 대응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피해자는 고작 22살이었고 남자친구보다 대학을 먼저 졸업한다는 이유로 살해 당했다. 대학 졸업복을 사러갔다가 살해 당해 세상을 떠나야 했고 내가 살고 있는 프랑스에서도 이 일이 연일 보도되었다. 나는 이 모르는 여자의 죽음에 통탄했다. 더는 여성들이 피해자가 되는 영화를 스릴을 느끼는 장르나 엔터테인먼트로 볼 수가 없었다. 여전히 죽는 여자들이 있다는 현실이 내 눈앞에 있는 이상 그건 엔터테인먼트가 될 수가 없다. 영화에서 아직도 맞고, 죽는 여자들이 있다면 그 여자들은 현실에도 있다는 말이다. 여자들이 죽는다. 그건 눈 돌릴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고 스릴러 영화 속에나 등장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어떤 관계에서나 살해당할 가능성
피해자의 몸에 불을 붙이거나, 갖은 둔기로 내리치고, 셀 수 없이 찌른 남성 가해자들. 제주도에서 전 남편을 살해하고 주검을 훼손해 온 국민의 지탄을 받은 고유정 씨의 경우와 유사한 잔혹 범죄가 ‘페미사이드의 세계’에선 적어도 스무날에 한 번은 일어났다. ‘일탈’이 아니라 ‘구조’라는 뜻이다. “강간과 마찬가지로 남편, 연인, 아버지, 지인, 낯선 타인에 의한 대부분의 여성 살해는 설명할 수 없는 일탈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페미사이드, 곧 가장 극단적 형태의 성차별적 테러리즘이며, 그 동기는 여성에 대한 혐오, 경멸, 쾌락 또는 소유 의식이다.”(각주 4) 이런 성차별적 테러 피해는 특정 나이 구간의 여성에게만 쏠린 문제가 아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탄생에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생애 주기 전체에 걸쳐서 나타난다.”(유엔 여성기구)
페미사이드 범죄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남성들의 ‘기분’이다. 판결문 427건 중 300건(70%)에서 피고인의 감정적 동기가 드러나는데 ‘앙심’ ‘무시당했다는 기분’ ‘질투’ 같은 감정들이다. 가해 남성들은 ‘놀면서 돈도 안 벌어온다고 무시해서’(광주지법 2016 고합○○○), ‘술 취해 귀가한 피해자에게 반말을 듣자 화가 나서’(대구지법 김천지원 2018고합○○), ‘성관계 시도 중 성기능을 비하하는 말을 듣고 화가 나서’(대구지법 2017고합○○○) 피해자를 살해했다.
친밀한 관계가 아닌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여성은 단지 남성의 ‘기분’을 건드려서 살해당했다. 직장 선배의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고 비꼬듯 대꾸했다가 피살(서울서부지법 2016고합○○○)되고, 세입자 남성에게 채무 문제로 잔소리했다가 살해(대구지법 2021고합○○)된다. 자신(피고인)보다 젊은 여성이 상급자의 지시를 받아 지시를 내리고 말을 함부로 한다며 여성의 몸에 시너를 뿌려 불을 지른 경우(수원지법 2015고합○○○)도 있었다.
출처 :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357.html
보스턴에서 일어났던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 영화 <보스턴 교살자> 속의 과묵한 두 여성을 보는 게 반갑다가도 이내 낯설게 느껴졌다. 사건 해결을 위해 나란히 앉아 술잔을 나누는 로레타와 진의 묵묵한 얼굴을 보다가 몇 개의 물음표가 떠올랐다. 이게 그렇게까지 반가울 일인가? 또 이렇게까지 낯설 일인가? 그냥 살인 사건 정도로 치부하고 사건을 축소시키려고 할 때 로레타와 진은 죽어나간 여성들의 고통을 느끼고 두려워하고 자기가 먼저 나서서 범인을 잡겠다고 한다.
영화 역사상 담배 연기 자욱한 신문사에서 취재하는, 일하느라 바빠서 집에 못 들어가는, 가정엔 소홀하지만 그것보단 훨씬 중요한 일을 하고, 사건 해결을 위해 골똘하게 생각에 잠기는 그런 인물들은 대부분 남성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내게도 그런 건 남성의 세계로 각인되었다. 여자를 죽이는 건 남자인데 그걸 조사하고 마무리 짓는 것도, 그 얘기를 영화로 만들어온 것도 남자였다.
여자를 죽이는 건 남자인데 그걸 조사하고 마무리 짓는 것도, 그 얘기를 영화로 만들어온 것도 남자였다. 영화 역사는 100년이 넘었고, 멸시받고 차별받으면서도 끈질기게 이 사건을 취재했던 두 여성의 얼굴을 스크린에서 제대로 보기까지는 60년이 걸렸다. 스크린에서 고통받고 살해당하는 여성들을 볼 때 우리는 대체 뭘 보고 있는 걸까. 더 이상 이런 영화를 만들 필요가 없을 때까지는 얼마나 더 걸릴까? 난 정말이지 죽은 여성들의 숫자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문구를 이젠 그만 보고 싶다.
이 영화가 스릴 없고 긴장감 없다는 평이 꽤 있는데 그럴 수밖에 없다. 여성의 사회 활동에 많은 제약이 있었던 60년대에 이 사건을 답답한 마음으로 조사하던 여성 저널리스트의 시점을 따라가게 돼있으니 답답할 수밖에. 이 영화는 여성들이 당한 피해를 ‘스릴’으로, 장르의 도구로 삼지 않았고, 범죄 현장의 잔혹함을 강조하며 폭력을 전시하지도 않았다. 그 수많은 범죄 영화처럼 가해자의 심리를 다루는 게 영화의 핵심도 아니고, 그들의 존재를 괴물처럼 극적으로 과장해서 보여주지도 않았다. 결국 범인은 그토록 평범한 남자일 뿐이니까. 너무 평범해서 금방 잊어버릴 만한 그런 남자 말이다. 그게 재미가 없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뭘 재미로 삼아서 봤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