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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na Jun 15. 2023

집 없는 자의 발걸음

슬픈 코스모폴리탄의 삶



이 공간을 처음 열었을 때 나를 소개하는 글에 뭐라고 적어야 할까 고민하다가 슬픈 코스모폴리탄이라고 적었다. 코스모폴리탄은 알겠는데 왜 슬픈 건지 의문을 갖을 수도 있다. 내게는 어디든지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 마치 그리스 신화의 떠돌이들의 수호신인 헤르메스처럼 가볍게 자기 몸을 옮겨다닐 수 있는 사람, 그러니까 정착하지 않는 삶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나는 여행자로서의 삶에 매력을 느꼈고 그런 삶의 방식은 나를 홀가분하게 만들어주었다. 파리로 오기로 결정했던 것도 파리가 뉴욕 같은 도시처럼 세계 곳곳에서 온갖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라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몇 년동안 프랑스에 머물면서 자기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애정을 갖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요즘 들어서 드는 질문은, 사실 이 질문은 아주 오래 전부터 내 안에 있었지만, 과연 내가 어느 한 곳에 정착할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말 정착하기를 원하는가?' 라는 질문이다.


지금 당장 누군가 내게 비행기 표를 준다면 나는 망설임없이 또 떠날 수 있을까? 서울은 내 집이었지만 강한 소속감이 없었고 쉽게 떠날 수 있을 거라고 느꼈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서울에서 사셨기에 향수가 느껴지는 시골도 없었었다. 어릴 때 살던 집도 재건축으로 사라지고, 동네 풍경도 완전히 달라져서 추억을 지배하는 곳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영어와 외국어를 배우고, 어렸을 때 잠시 외국에 머문 적도 있었고. 다른 나라로 간다는 것은 아마 내 세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듯 내게도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코스모폴리탄이 되기를 꿈꾸며 자란 것은 그런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나 갈 수 있는 사람이란 결국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 완전한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완전한 고독을 의미하는 거 아닐까. 코스모폴리탄의 삶이 슬픈 것은 결국 그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완전히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외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한번 의미를 부여한 장소를 쉽게 잊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장소는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이 점은 자주 간과되어 왔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 - 근대라고 불리는 시대, 또는 그 연장선에 있는 시대 -  는 코즈모폴리턴의 이상을 찬양하기 때문이다. 코즈모폴리턴의 사전적 의미는 '어느 나라에서나 다름없이 살아가는 Qui vit indifferemment dans tous les pays' '세계를 집으로 삼는' '세계의 모든 부분에 속하거나 모든 부분을 대표하는' 등등이다. 

하지만 세계를 집으로 삼는 사람 역시 어딘가에 집이 있지 않을까? 모든 장소에 속한다는 말은 어느 장소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말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올해는 이 나리에서 일하고 내년에는 저 나라에서 일하는 사람, 오늘은 이 도시에서 아침을 맞고 내일은 저 도시에서 밤을 맞는 사람은 아마 세계화 시대에 자본이 원하는 인간형이겠지만, 우리가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유형은 아니다. 현실의 인간은 그처럼 가볍게 삶의 근거지를 바꿀 수 없다. 그는 가는 곳마다 기억의 무거운 짐을 끌고 다녀야 하는데, 한 장소를 다른 장소로 옮겨갈 때마다 이 짐은 점점 불어나기 때문이다. 쉽게 떠나는 인간이 되기 위해, 우리는 쉽게 잊을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중에서



나는 오히려 쉽게 잊을 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쉽게 떠나온 게 아닐까. 요즘 들어서 느끼는 것은 방랑하는 자는 결국 집이 없는 자라는 것이다.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면서 내 방은 점점 더 작아지고 내 짐은 점점 더 줄어들어 왔다. 벌써 가정을 꾸리고 정착한 친구들도 꽤 있는데, 내겐 물리적인 의미로도 비유적인 의미로도 집이 없다. 물론 나의 선택이긴 하지만 정말 나는 혼자서, 내가 닿는 곳이 어디인가 보자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다. 누가 떠밀지도 않았는데 마치 어떤 의무처럼 떠나야 할 것만 같았다. 그게 그 전에 내가 살던 곳에 엄청난 애착이 없었고 깊게 뿌리 내리지 않았기에 가능했다는 걸 깨달았다.

언젠가 친구가 내 방에 와서는 그렇게 고양이를 좋아하는데 왜 키우지 않냐고 물었다. 나는 별다른 설명 없이 그냥 짧게 대답했다. '그럴 수가 없으니까.' 내 대답에 친구는 좀 슬프다고 했다. 고양이 한 마리 조차 내 방에 들일 엄두가 나질 않는다. 결국 내가 언젠가는 또 떠나게 될 것이라는 걸 아니까. 떠나기 위해선 가벼워져야 한다. 한 때 나는 내게 혹처럼 들러붙은 것들을 하나 둘씩 다 떼어내고 훌쩍 떠나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 차있었다. 가벼워지고 싶다는 생각, 바람 같은 것이 되어서 사라지고 싶다는 욕망. 집이 없는 자의 발걸음은 가벼울 수 밖에 없다. 돌아갈 곳이 없으니까. 내겐 더는 집이라고 생각하며 돌아갈 곳도 없다. 그렇다고 이제 프랑스가 내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이젠 점점 집 안을 하나씩 채우는 짐들이 늘어나는 게 느껴진다. 사랑하는 사람도 친구들도 모두 여기에 있다. 하지만 왜 나는 쉽게 여기를 집이라고 부를 수가 없는 걸까? 그 어디도 왜 내겐 집이 될 수가 없을까. 아마 세계를 집으로 삼아 떠나기로 한 후부터 느낀 홀가분함과 외로움에 익숙해져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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