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나 Oct 09. 2023

죽거나 미치거나

<조커>를 본 지 오래되었고 그렇게 좋게 본 것도 아니지만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 있다. 영화에 대한 긴 평을 쓰기엔 기억이 희미하고, 이 글은 그냥 그 장면에 대한 단상이다. 내가 혼자라는 사실이 몸을 파고들어 오는 것 같을 때면 이 장면이 떠오른다. 아서의 무료 상담을 담당하던 심리상담사가 시에서 복지 예산을 줄여서 오늘로 상담이 마지막이라고 통보하는 장면이다. 상담사는 권태로운 얼굴로 말한다. ‘아서, 그들은 당신 같은 사람은 좆도 신경 안 써요. 그리고.. 저 같은 사람도요.’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영화에서 아서를 자신과 묶어서 칭한 사람은 유일하게 이 상담사뿐이다. 나는 그 상담사가 조금만 더 아서를 도우려고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하다 못해 아서에게 가짜 웃음이라도 지어줄 힘이 남아있었다면?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범위는 결국 딱 거기까지 아닐까. 이 영화는 나를 쉽게 비관하게 만든다. 그게 이 영화의 좋은 점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조커> 속의 세상은 언제나 나쁘고 괴롭고, 아서를 울게 만든다. 게다가 아서는 과도할 정도로 누구도 가까이하고 싶지 않을 만한 인물로 그려져 있고, 객석에 앉아있는 나도 결국 아서를 곁눈질하고 무시하는 길거리의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걸 상기시킨다. 그러나 무심한 얼굴을 한 상담사는 나쁜 사람인 게 아니라 그냥 지쳤을 뿐이다. 단순히 좋은 마음으로 남을 돕기엔 세상의 무능함이 실망스럽다. 조금 단순한 구도로 이루어진 듯한 이 영화에서 이 장면이 슬프면서도 좋았던 것은 세상은 단순하게 나쁜 게 아니라 복잡하게 나쁘고, 남을 도우려는 사람도 항상 미소 지을 수는 없으며 눅진하게 달라붙는 삶의 피로가 그 선의를 가린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결국 아픈 사람을 돕는 이도 그보다는 조금 덜 아픈 사람일 뿐이다. 나의 상냥함이나 친절함이 바닥났을 때,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와 같은 그늘을 볼 때 생각한다. 우린 그냥 지쳐버린 것뿐이라고.


아서는 삶을 포기하는 대신 세상에 대응하기를 선택했다. 삶에 온통 눈물 흘릴 일 밖에 없는 그가 택한 방식이 코미디라는 건 매우 중요하다. 코미디는 기본적으로 본인이 웃기 위한 게 아니라 남을 웃게 해 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어둡고 무거운 톤 때문도 있겠지만 그의 얼굴에 억지로 그려 넣은 빨간색 미소와 발작과 같은 그의 질병을 제외하면 이 영화엔 웃음이 거의 없다. 웃을 일 없는 세상이라면 웃음을 만들면 된다는 그의 목표는 슬픈 복수이자 자아도취적인 객기다. 나는 아서가 추는 춤이 단 한 번이라도 자기 생을 완벽하게 자기 뜻대로 살기 위한 몸부림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게 자멸의 길이라는 걸 알아서 슬펐던 거다. 삶은 내가 칠한 대로 살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서를 연기한 호아킨 피닉스의 얼굴이 섬뜩했던 건 조커로 변신한 게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의 눈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아프고 외롭고 혼자인 사람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라고. 죽거나 미치거나. 아서에게 다른 선택지도 있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조커의 탄생보다 더 비극적인 건 누구도 그에게 그 말을 자신 있게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작가의 이전글 친환경적이라는 모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