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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은 May 12. 2024

나는 나한테 충실한 사람이고 싶다.

나이 든 여자의 알바 이야기 / 보람일자리

내가 일하는 보람일자리는 '우리 동네 키움센터'라는 곳이다. 방과 후에 초등학교 아이들을 돌봐 주는 곳인데, 각종 프로그램도 매일 운영하고 간식도 준다. 서울시에서 만든 공공기관으로, 각 구마다 10곳 안팎이 있다. 학부모가 내는 돈은 학생 1인당 월 5만 원이면 된다니 맞벌이 엄마들에게는 정말 고마운 곳이다.


내가 배정된 곳은 돌봄 선생님들도 많고 분위기가 항상 활기차 있어서 특히 좋아 보였다. 센터를 이용하는 아이들은 30명 정도인데 선생님들은 하루 최하 다섯 분이 아이들을 돌보기 때문에 아주 여유로운 환경이었다. 선생님들 나이는 내가 제일 많았다. 반 이상이 이십 대였고 사오십 대가 세 명이었다.


보람일자리 선생님들이 할 일은 아이들과 놀아주기, 아이들 안전관리, 프로그램 진행 보조, 아이들 간식 만들어주는 일 등이었다. 나는 다른 일들은 괜찮겠는데 아이들과 잘 놀아줄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처음 센터장에게 인사를 하며 내 걱정을 말했다.

"제가 나이가 많아서 아이들한테 미안해요."

센터장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선생님은 나이 들어 보이지 않으세요. 그리고, 한쪽에 그냥 서 계시기만 해도 저희한테는 도움이 되니까요, 너무 걱정 마세요."

나는 그때 생각했었다.

'맞아. 나는 나이보다 젊어 보이고 등하원도우미도 해 봤으니 잘할 거야.'


그래서 씩씩하게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지지는 않았다. 다른 선생님들은 마치 아이들 부모라도 되는 것처럼 사소한 것에도 요란하게 칭찬하고 과장되게 아이들에게 반응하면서 아이들과 친하게 어울렸다. 아이들도 그런 선생님들에게 가서 안기고 매달리고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그런 선생님들을 신기하게 쳐다보며 한쪽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아이들 중에 혼자서 센터 공간을 이리저리 돌고 있는 아이가 있으면 슬쩍 다가가 말을 붙여 보았다. 아이들은 마음 맞는 친구들과 끼리끼리 노는 경향이 있어서 혼자 따로 놀게 되는 아이들이 있었다.


1학년 남자아이가 혼자 레고를 만지고 있기에 아이 앞에 앉았다. 아이는 레고로 전차를 만들어 전쟁놀이 하는 걸 좋아했다. 나도 미사일을 만들어 함께 놀아주면서 계속 져 주었다. 그 아이는 지는 걸 너무 싫어해서 자기가 질 것 같으면 나의 미사일을 손으로 부수면서 떼를 쓰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른 남자아이들이 레고를 갖고 놀기 위해 옆에 왔길래 얼른 일어나 주방으로 왔다.


또 한 명은 5학년으로 덩치도 큰 아이인데 발달이 좀 늦은 편이었다. 마블 카드 게임을 하고 싶은데 룰을 잘 모르고 판단이 느려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놀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같이 카드 게임을 해 주었다. 나도 잘하는 편이 아니니 그 아이에게 잘 가르쳐 줄 수는 없었다. 둘이 버벅거리는 걸 본 다른 4학년 아이들이 다가와 참견을 하기 시작했다. 한 명은 우리에게 룰을 설명해 주다가 5학년 형이 못 알아들으니까 '에이 안 해.' 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또 다른 아이는 인내심을 갖고 몇 번이고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그래도 5학년 형이 게임을 제대로 못하니까 나중에는 자기가 막 빠르게 게임을 진행시켜서 나에게 돈과 자산을 몰아주고는 게임을 끝내버렸다.


말하자면 나는 아이들과 잘 놀아주지 못하는 선생님이었다. 그나마 여자 아이들의 경우는 함께 그림을 그리거나 종이접기를 하거나 스티커 북을 만드는 정도여서 무난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내가 함께 놀아준 아이들은 1, 2학년들로 다섯 명 정도였다. 그 아이들도 대개는 대학생 선생님들이 함께 놀아주었고 내가 아이들과 논 것은 두 달이 다 가도록 채 열 번을 넘지 않을 정도였다. 놀아주기 싫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아이들과의 소통에 좀 소극적이었던 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아이들은 방과 후에 학년마다 순차적으로 센터로 몰려오는데,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문으로 들어올 때마다 문 앞에 서서 '어서 와.~' '어서 오세요.~' 하고 합창을 한다. 한 명의 아이가 와도 모두들 큰 소리로 어서 오라며 반긴다. 나는 그동안 이런 외침에 동참하지 못했었다. 속으로 '무슨 백화점 고객도 아니고.' 하면서 머뭇거렸다.


몇 가지 실수로 센터장의 지적을 받아서 그런지 매사 조심하게 된 탓도 있다. 한 번은 1학년 아이가 울길래 얼른 달려가서 아이를 안아 올렸다. 등하원도우미를 할 때의 생각으로 아이를 진정시키려 했는데 센터장이 바로 달려와서는 아이를 내려놓으라고 했다.


"여기서는 아이들을 안아주지 않아요."


나는 얼른 아이를 내려놓았고 센터장이 아이 옆에 앉아 아이를 다독이는 걸 지켜봤다. 이후로도 나는 센터의 교육 룰에 어긋나는 실수를 몇 번이나 했다.


간식을 더 달라는 아이에게 무심코 퍼주다가 지적을 받고 다시 물리기도 했다. 아이가 장난감들을 정리하길래 옆에 있던 내가 도와주었는데 그걸 본 다른 선생님이 다가와 아이에게 '자기 일은 자기가 하라.'라고 훈계를 했다. 나는 아이에게 미안해서 그 선생님에게 '내가 해 준다고 했다.'라고 변명을 했지만 아이는 이미 풀이 죽은 후였다. 센터의 교육 원칙은 '아이들 스스로 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인데 나는 집안의 외할머니 수준이었던 셈이다. 덕분에 한 명의 아이에게서 착한 선생님이라는 소리는 들었다.


몇 번 지적을 받고 난 다음부터는 아이들에게 문제가 생겨도 일단 센터장 이하 고정직 선생님들에게 알려만 주고 내가 관여하진 않았다.


사실 대개의 아이들은 선생님들이 참견할 필요가 없었다. 3학년 이상만 돼도 자기들끼리 활기차게 떠들고 게임도 하고 춤도 추며 놀기 때문에 선생님들의 도움이 필요 없다. 그들에게는 너무 시끄러워서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관리하는 정도만 선생의 손길이 필요하다.


선생님들은 보통 저학년들을 대상으로 놀이를 함께 해주었는데, 당연한 거지만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선생님의 순서는 나이가 젊은 순서였기 때문에 내가 끼어들 틈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에게는 좋은 일일 수 있었다. 그만큼 일을 쉬염쉬염 하면 되는 거니까.


나는 간식을 만들어 주는 할머니 선생님 정도로 인식되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나머지 시간에는 대개 한쪽에 서서 50평 정도 되는 놀이공간을 둘러보며 혹시 아이들에게 안전상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지 살펴보곤 했다.


그렇게 2개월 동안 나는 나에게 별 문제가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며칠 전, 오후 1시에 출근하여 센터 문 앞에서 센터 내로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는 세 분의 선생님이 있었다. 그리고 센터의 고정직 선생님이 학교 앞에서 픽업해 온 초등 1, 2학년 아이들 세 명이 재잘재잘 떠들고 있었다. 아이들과 선생들이 서로 활짝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아이들 중에는 나와 레고를 조립하며 전쟁놀이를 했던 남자아이도 있었다. 내가 그 아이에게 인사를 했다. 아이는 대답을 않고 다른 선생님들을 둘러보더니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할머니는 쫌 시시해 보여."

순간, 시간이 정지한 듯 고요해졌다. 재잘거리던 아이들이 입을 다물었고 선생님들은 경직된 표정으로 침묵했다. 내가 급히 농담처럼 말했다.

"맞아. 나 원래 시시해."

아이들이 말을 잘못한 경우 센터 선생님들은 바로바로 아이들에게 잘못을 지적하고 고쳐주곤 했었는데 이 순간에는 아무도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당황한 듯했다. 센터로 들어갈 때까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날 하루종일 내 머리에선 '시시한 할머니'라는 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그 아이를 붙들고 왜 내가 그렇게 보이는지 묻고 싶은 걸 꾹 참고 있었다. 선생님이라 칭하지 않고 할머니라고 말한 건 그렇다 치고 왜 시시해 보이는지 정말 궁금했고 마음은 위축됐다.


속으로는 온갖 이유가 떠올랐다.

'마스크를 써서 나를 못 알아봤나? 아이들이 젊은 선생과 늙은 선생을 차별하는 걸까? 사람들이 나에게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 건 경로사상인 거고, 아이 눈이 정직한 거 아닌가. 혹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멍청해 보이는 유형인가? 아니, 어쩌면 내가 저랑 놀아줄 때 내가 전쟁에서 계속 졌기 때문에 시시하다고 한 건 아닐까?' 등등등.


알 수 없었다. 궁금했지만 아이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건 더 찌질해 보이니까. 마음이 너무 불편해졌다. 이건 좋지 않았다. 내 마음이 불편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다. 아이의 말 한마디 때문에 내 생각이 너무 멀리까지 가고 있구나 하는 자책이 일었다.


'나이가 들면 가만히 있어도 기력이 떨어지는데 쓸데없는 곳에까지 기력을 낭비하지는 말자. 나쁘게 생각하면 한이 없다. 아이를 버릇없다고 기피하고 나에 대한 자괴감까지 들고,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다. 그렇게 불편하게 살지 말자. 나는 나한테 충실한 사람이고 싶다. 나는 착한 사람이고 싶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착한 알고 있고, 그래서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다. 그렇게 살고 싶다. 그러니 아이를 나쁘게 보지 말자. 아이에게서 선의를 발굴해 내자.'


그래서 결론을 냈다.

'아이는 아이의 방식으로 나에게 친근함을 표현한 것이다. 아이가 나를 아는 것은 얼마 전에 자기와 놀던 때뿐이지 않나. 그 기억을 갖고 나에게 말을 건 것이다. 전쟁놀이에서 내가 계속 졌으니까 그걸 기억하고 있음을 표현한 걸 게다. 그게 맞다. 맞다고 생각하자.'


그렇게 마음먹고 났더니 시시한 할머니라는 속삭임이 떠나갔다. 하지만 다음날까지 침울한 기분이 완전히 해소되진 않았다. 침울해 있었다기보다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멍청한 할머니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경각심으로 조신하게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다음 날은 금요일이었다. 일을 끝내고 귀가하기 위해 센터 건물을 나섰다. 골목을 내려가는데 센터 건물 2층에서 아이들이 '선생니임~'하고 외치는 소리가 등 뒤로 들렸다. 뭐지? 하며 뒤돌아서서 건물을 올려다보니 3학년 남자아이 둘이 창문을 열고 나에게 손을 흔들며 소리치고 있었다.


"선생니임~ 안녕히 가세요.~"


나는 너무 뜻밖이어서 멈칫하다가 얼른 양손을 들어 올려 마주 흔들며 소리쳤다.


"그래.~ 주말 잘 보내.~"


아이들은 계속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두 손으로 입맞춤을 날리고 손을 흔들며 골목을 돌아 건물이 안 보일 때까지 뒷걸음으로 걸었다. 그와 동시에 내 마음은 급격히 의기양양해져 갔다. '그럼 그렇지.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일 리가 없잖아?'


물론 다음 순간엔 또 혼잣말을 하긴 했다.

'에효, 간사한 마음. 아직도 철이 안 들었어.'


하지만 한편, 타인의 호의가 사람을 얼마나 의욕적이게 하는지 실감했다. 다음 주 내가 일을 시작하는 수요일 오후, 센터에 출근했다. 아이들이 센터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문 앞에 몰려 있는 다른 선생님들 뒤에 서서 선생님들을 따라 나도 아이들에게 작게나마 외쳤다.


"어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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