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기에 아름다운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의 생각이나 관점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무릇 타당한 일처럼 보인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어른의 입장이 되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어른들이 어린아이들의 심정이나 기분을 쉬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언뜻 부조리한 현상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그들 모두가 한때는 어린아이였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꽤 오랜 시간 동안.
그럼에도 어른이 된 우리들은 우리 모두가 한때는 당연한 듯 지니고 있었던 어린아이의 시선을 의식의 한 구석에 깊숙이 방치해 둔 채, 마치 태어날 때부터 어른이라는 존재로 태어나기라도 한 것마냥 괜스레 모든 일에 삭막하고 냉담하게 굴곤 한다. 이는 혹자에게 현명한 삶의 자세처럼 여겨질 수는 있을지언정 행복한 삶의 자세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이따금 고이 간직하고 있던 어린아이의 시선을 밖으로 꺼내 세상을 보다 순수하게, 어쩌면 조금 더 유치하게 바라보아야만 할 필요가 있다. 삶의 행복이란 때때로 빼곡한 글씨의 뉴스 기사나 업무 보고서 따위가 아닌 알록달록하고 아기자기한 그림책 속에서 보다 쉽게 발견되기 마련이니까.
영국의 그림책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로렌 차일드의 작품 세계를 다루는 전시 '로렌 차일드: 요정처럼 생각하기'는 우리가 한동안 잊고 지냈던 어린아이의 시선을 조심스레 밖으로 꺼내 놓기에 안성맞춤인 무대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 개의 섹션으로 구성된 해당 전시 속에 따스이 구현된 로렌 차일드의 동화 속 세계는 방문자들로 하여금 자연스레 어른으로서의 모든 허울을 잠시 내려놓도록 만듦으로써 무구했던 '그 시절'을 회고하게끔 유도한다.
소위 이야기하는 '순수했던 그 시절'이라는 개념이 수많은 미디어 속에서 단순히 막연한 아름다움 혹은 무조건적인 그리움의 대상으로 그려지곤 한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로렌 차일드: 요정처럼 생각하기'가 여타 미디어와 달리 어린아이의 시선을 꽤나 적나라한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은 제법 흥미롭게 다가온다. 해당 전시는 오로지 순수하고 무구한 어린아이의 시선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한시적 아름다움에 주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 특유의 얄궂은 반항 심리나 과장된 두려움까지 3차원 공간 내에 적절히 구현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어린 시절의 감정과 경험을 포착하고 묘사함으로써 보편적 서정성에 대한 관람객들의 정서적 이입을 이끌어내고자 하고 있는 '로렌 차일드: 요정처럼 생각하기'의 테마는, '전시'라는 플랫폼이 지니고 있는 특유의 한시적 성질과 어우러져 더욱 애틋한 감정을 자아낸다. 어린아이의 시선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순수함과 얄궂음, 그리고 특정 공간과 시간 내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전시'라는 이벤트의 특수성을 동시에 관통하고 있는 미적 가치는 결국 모두 그 일시성에 의해 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즉 어린아이의 순수함과 얄궂음으로부터 너무나도 멀어져버린 우리에게, '로렌 차일드: 요정처럼 생각하기'는 우리가 이전에 느낄 수 있었던 한시적 아름다움의 시효를 잠시나마 연장시켜주는 고마운 행사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이따금 내가 '지나치게' 어른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면, 망설일 것 없이 지금 당장 해당 전시를 향해 발걸음 옮겨 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