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C. S. 루이스의 만남이라는 흥미로운 상상에서부터 출발한다. 극중에서 다양한 주제를 두고 논쟁을 벌이는 두 사람의 대화는 일견 현실 속 무신론자와 유신론자 간의 치열한 대립을 투영하는 듯 보인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와 저명한 기독교 문학가 루이스가 신의 존재 유무를 두고 뜨겁게 토론을 나누는 작품이라니, 이보다 흥미진진한 플롯이 또 어디에 있을까.
그러나 심도 있는 수준의 지적 성찰이나 거대한 규모의 담론 등을 기대한다면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은 다소 싱거운 작품처럼 다가올 수 있다. 극중 드러나는 프로이트와 루이스 간의 대화는 깊은 수준의 담론까지 도달하기는커녕 매번 아주 얕은 수준의 언쟁에 그치는 등 관객들에게 두 사람이 지닌 가치관을 설명하는 정도의 역할만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시종일관 길게 이어지지 못한다.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악화된 듯 묘사되는 프로이트의 건강 상태, 두 사람이 어째서 지금과 같은 가치관을 정립하게 되었는지 알게 해주는 일련의 과거 회상 등 극 진행을 위한 여러 서사적 장치들이 두 사람 사이의 대화에 끊임없이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을 프로이트와 루이스 사이의 우정 내지는 휴머니즘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 중심의 영화라고 생각해 본다면 작품에 대한 평가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상이한 종교적 가치관과는 별개로 보편적 인류애라는 서로의 공통분모에 도달하는 데 성공한 듯 보여지는 두 사람이 자아내는 우정은 휴머니즘의 위대함을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역설하는 등 분명 나름대로 적지 않은 감동을 선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극적인 가족사와 전쟁이 남긴 트라우마. 프로이트와 루이스의 과거는 두 사람의 종교적 가치관이 어떻게든 지금과 같은 형태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는 서사적 당위성을 부여한다. 프로이트와 루이스는 비록 상대가 자신과는 다른 형태의 믿음을 지니고 있을지언정 그 믿음이 형성되기까지 그들이 겪었던 보편적 아픔과 상처에 충분히 공감할 수밖에 없기에 결국 갈등을 초월한 우정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결과적으로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은 그 어떤 종교적 믿음이나 가치관도 결국 우리 삶의 아픔이나 상처를 보듬기 위해 존재할 뿐이라는 근원적 진리를 설파하는 작품에 해당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의 믿음과는 다소 상반된 형태의 믿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과 마주했을 때, 우리가 취해야 하는 태도는 독선과 배척이 아니라, 이해와 포용이어야만 할 것이다. 인류사에 길이남을 족적을 남긴 두 지성인 프로이트와 루이스조차도 이와 같은 겸손의 미덕을 갖추고 있는데, 우리가 대체 무어라고 갈등의 칼날 위에서 춤을 춘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