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급한 선수 Sep 10. 2023

어떤 점에서는 인간이 벌보다 낫다

플라톤의 낙원은 누구네 집일까?

<가타카> (1997)


  빈센트와 안톤 형제는 치킨 게임을 즐긴다. 증명이 필요한 순간에는 항상 먼저 돌아오는 사람이 지는 수영 대결을 찾는다. 안톤은 적절한 형태로 디자인된 사람이다. 디자인이 탁월한 점은 안톤이 빈센트의 도전을 매번 상대해준다는 것이다. 답이 정해진 싸움처럼 시시한 게 또 어디에 있겠는가? 지루함을 감내하는 이유는 디자인의 목적이 빈센트와 놀아줄 수 있는 남자 형제이기 때문일까?


  빈센트는 무엇을 증명해야 했을까? 그는 부모의 사랑을, 자신들마저 더이상 믿지 않는, 짊어져야 할 운명을 지고 태어난 존재일까? 아니면 우생학 앞에서 떨고 있는 가녀린 인간성을 막아서고 있는 것일까? 증명의 대상이 고작 유전자의 발현이라는 게 웃기기도 하지만, 그게 아니면 인간은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가?


  플라톤은 벌집을 상상했다. 공동체의 생존과 성장을 위해서 헌신하는 벌의 집단. 인간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눈에는 그가 살던 시기가 큰 위기에 봉착해있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개체가 오로지 집단을 위해서 행동해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벌은 생존을 위해 잘 디자인된 집단이다. 우리가 왕이라고 지칭하는 존재는 사실 번식을 위한 기계에 불과하다는 점이 탁월한 디자인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걸 알고 그랬는지는 몰라도, 플라톤도 통치자를 국가를 위한 기계로 만들기 위한 장치를 여럿 마련했다. 통치자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요소를 제거하는데, 거기에는 재산 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포함된다. 플라톤은 국가의 아이들을 집단으로 양육하는 체계를 통해 누구의 후손인지 알 수 없도록 설계했다. 그 아이들을 향해 꿀벌은 아무런 구분 없이 꿀을 전달해줄 것이다. 통치자가 필요해지면 로열젤리를 만들긴 하겠지만, 그건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사실이 그렇잖아"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게 진짜로 뛰어나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강한 추진력을 가진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디자인된 세상이 사실은 전혀 행복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디자인된 세상에서도 폭력은 여전하다. 유전공학이 원인은 아닐 것이다. 과학은 단지 가능성이라는 수치만 전달하고, 가능성에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할 뿐이다. 과학은 그 자체로 스카이넷을 만들 수 없다. 한 가지 흥미로운 장면은 원장과 빈센트의 부모가 실랑이를 벌이는 순간이다. 학원장은 어쩔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빈센트의 입학을 거절한다. 분명 유전공학은 어쩔 수 없는 것을 극복하고자 인간이 개발한 것인데, 그것에 따라 디자인된 세상에서도 여전히 어쩔 수 없는 것이 존재하나 보다.


  개에게 초코가 독인 것처럼 각자의 몫이 있는 법이고, 벌의 둥지가 인간에게 감옥인 것처럼 각자의 집이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집은 어디에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그림 속의 남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