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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급한 선수 Sep 13. 2023

그 사랑을 기다려줄 그런 사람을 찾는 거야

긴 세월을 변하지 않을 그런 사랑은 없겠지만

<잠> (2023)


  현판만 보면 화가 나는 편이다. 현판이 분노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다. 단지 내가 있는 공간이 전반적으로 기만적이었을 뿐이고, 나와 달리 현판은 그 공간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걸 다 알면서도 현판에 적혀있는 터무니없는 말을 볼 때마다 고개가 삐뚤어지는 것은 참기 어렵다. 동시에 물어보고 싶은 것이 치밀어 오른다. “신뢰받는... 존중받는...” 당신은 이렇게 생각하세요? 이걸 믿는다구요?


  “둘이 함께라면 해결 못 할 일은 없다”라고 적힌 현판을 누가 집에 들였는지는 몰라도(둘이 함께 들였을 수도 있겠다) 그 현판을 어루만지는 것은 주로 수진(정유미)이다. 수진은 부모가 이른 시기에 결별해 어머니의 품에서 자란 듯하다. 어머니의 집으로 보이는 장소를 고려했을 때 경제적 결핍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진에게 아버지의 빈자리는 일종의 허기로, 해소되어야 할 갈증으로 남아있는 듯하다. 그 배고픔 덕분에 수진은 나름 행복해 보이는 가정을 꾸리는 데 성공했다.


  현수(이선균)는 수진의 짝꿍이다. 현수는 과거의 각광받는 연극배우였다. 지금은 연속극에서 2마디 정도의 대사를 하는 비서 역으로 출현하고 있다. 수진은 현수가 나오는 장면을 보면서 유난을 떨고, 부정을 용납하지 않는 태도로 현수의 연기력을 칭찬한다. 현수의 역할은 언제나 대체가 가능한 것이라서 일련의 사건 덕분에 실제로 대체된다. 더 이상 모멸감에 시달리기 싫었던 현수는 연기를 그만두려 한다.


  수진이 느끼는 갈증의 원인은 도망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부모처럼 도망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한다. 그리고 짝꿍에게도 자신과 동일한 수준의 노력을 요구한다. 마이클 조던 같다. 마이클 조던은 불스의 왕조 시절에도 팀원에게 인기가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 나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왜 최선을 다하지 않냐고 추궁받는 건 불쾌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게다가 더 좌절스러운 것은 그 사람이 저 위치에 도달하기 위해서 투자한 노력을 옆에서 지켜봤다는 사실이다. 내 최선을 초라하게 만들어버리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나도 나름 연기로 상도 받은 사람인데!


  현수의 실직과 함께 그의 연기가 시작된다. 현수는 자괴감을 감추기 위해 연기한다. 포면화되지 않은 스트레스는 의식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순간 떠오른다. 그렇게 의도치 않은 죄를 짊어지고, 죄를 견디기 위해 다시 연기하고, 또 스트레스가 깊어지고, 더 지독한 죄를 저지르고... 가 반복된다. 졸지에 죄에 휘말려버린 수진은 점점 미쳐간다. 현수는 악순환에서 도망치려고 하지만 수진은 용납하지 않는다. 현판과 마이클 조던의 환상적인 콜라보 덕분에 현수는 깊은 수렁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수진은 진짜 미쳐버린다. 쉽게 포기해 버린 부모와 다르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 했지만, 그래서 그토록 싫어했던 무속 신앙이었지만, 결국 수용해 버린다. 하지만 그 작용은 부모와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서 수진은 마이클 조던에 완전히 빙의되고 만다. 이제 수진에게 보이는 것은 오직 집에 걸려 있는 현판의 문구뿐이다. 질려버린 현수는 결별을 선언하고, 수진이 던진 현판이 스치듯 지나간다. (사실 이미 현수는 수진 때문에 직접적인 상해를 입은 전력이 있다) 그제야 현수는 현판은 만져본다. 잠시 현판을 바라보던 현수는 수진과 함께 미쳐보기로 한다.


  결심도 잠시, 수진이 제공하는 시련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단순히 미쳐보기로 한 사람이 빙의된 사람과 발맞추는 것이 쉬울 리 없다. 그리고 수진은 돌아온 현수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밀어붙인다. 이 순간 수진에게서 앤드류를 대하는 플레쳐 교수의 모습이 보인다. 플레쳐 교수가 조성해 놓은 극한의 상황 속에서, 현수(앤드류)는 한계를 초월하고 그야말로 혼신의 연기를 펼친다.


  그리고 수진과 현수는 해결하지 못할 일을 만나서 둘이 함께 하나가 된다. 는 행복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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