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새는 방으로 돌아올 거지만 밸런스 게임이 하고 싶어
<토니 타키타니> (2004)
집의 본질적 기능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울타리라고 누가 그랬다. 어릴 때는 의자 사이에 이불을 걸쳐놓고 그 안에 숨어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만들었다. 모험을 떠나기 위한 베이스캠프였기도, 짐을 덜어내기 위한 대나무 숲이었기도, 사랑을 눌러 담는 절구통이었기도. ‘나’를 꺼내기 위해서 어린 나는 집 안에서도 울타리가 필요했다.
지금은 어떠한가? 울타리 없이도 능수능란하게 꺼낼 수 있는가? 여전히 주머니 입구를 찾지 못해 쩔쩔매고 있는가?
가끔 눈을 믿을 수 없을 때가 있다. 그 순간에 누군가 나에게 밸런스 게임을 던져줬으면 좋겠다. 눈에 보이는 게 현실이기 vs 눈을 감았다 뜨면 이불속으로 돌아가기. <토니 타키타니>를 보고 나니 찬란한 모험 끝에 결국 이불속에서 눈을 뜰 거 같아서 바람이 부는 것처럼 시리다. 두꺼운 벽에 한기가 점차 스며들어서 결국 외풍에게서 도망칠 수 없을 것 같다.
에이코가 쇼핑을 마치고 들어온 어두운 방에서 그녀는 침대에 드러눕고, 나머지 공간에 공기가 한가득 이리 들었다가 저리 빠져나간다. 휑하다. 옷을 아무리 껴입어도 추운 바람이 있다. 분명 어딘가 바람이 통하는 구석이 있어서 이리도 쉽게 속으로 들어오는 것 일터이다. 깨진 독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물이 새어나갈 수 있을까?
토니에게는 단지 거슬리는 정도였다. 에이코는 원래 옷을 마구 사는 사람이었고,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눈에 걸려서. "옷이 저렇게 많이 필요한가?" 하는 궁금증이었을 뿐이다. 사소한 마음이라서 더 뾰족했나 보다. 망치로 때렸으면 풍선이 두둥실 떠올랐을 텐데, 압정 같이 자그마해서 바람이 빠져나갈 구멍이 생겨났다.
토니는 에이코를 상실하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정작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었던 건 에이코였다. 바람이 빠진 풍선 조각을 보면서 울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은 토니가 아니라 히사코였다. 토니에게 사랑은 어떤 모습으로 보였을까? 에이코를 아버지에게 소개하는 순간 아버지의 연주가 이전과 다르게 들린 것은 그림의 색이 바랜 탓일까, 아니면 색안경을 끼게 된 탓일까? 아버지도 에이코도 변하지 않았다면 변할 수 있는 건 토니 밖에 없나? 토니가 맛본 것은 사랑의 맛일까, 외로움의 맛일까.
나는 더 이상 비밀스러운 공간을 만들지 않는다. 그 안에 있던 것들을 한 입 크기로 뭉쳐서 차 우린 물 한 움큼에 한 문장씩 꿀떡 삼켜버렸다. 이제는 삼킨 것들을 잘 소화해서 마음껏 싸지를 수 있다. 단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