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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톤 Jun 28. 2023

Angel's Share

기억은 계속해서 증발하겠지만

얼마 전 처음 향을 알게 된 향수의 이름은 ‘엔젤스 쉐어(Angel's Share)'이다. 양주 사업을 물려받는 대신 향수 브랜드를 창시한 킬리안 헤네시의 수많은 작품 중 하나. 영화 '위대한 개츠비'에서 술잔을 들어 올리며 웃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상되는 듯한 양주병 모양 보틀 속의 알코올. 술과 향수 모두 알코올에서 비롯되는데, 왜 하나는 알맹이를 드러내는 데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껍데기를 꾸며내는 데 사용할까. 내가 많이 싫어하는 것과 아주 좋아하는 것의 본질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점이 새삼스러웠다.


강한 계피향이 더운 여름을 더 습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 그다지 마음이 가는 향은 아니었다. 다만 향수 이름에 담긴 뜻이 흥미로웠다. 브랜디의 일종인 코냑을 보관하고 숙성하는 과정에서 2% 정도가 자연 증발하는데, 그 양을 천사들의 몫이라고 지칭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까치밥 같은 개념인가. 생각보다 다정한 유래에 향을 다시 맡아보았다. 술을 조금도 즐기지 않는 나에게는 여전히 버거운 향이 났지만 이름만큼은 오래도록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향수는 끝이 정해져 있는 행복이라는 점에서 부담스럽지 않고 단정하게 빛난다. 잠시간 내 곁을 빙글빙글 돌며 머물다가 어느새 형체 없이 날아가버리는 잠시의 기쁨. 이전에 한 소비 에세이를 읽으며 물질 말고 경험에 더 많은 돈을 투자해야겠다는 다짐을 한 적이 있다. 그 다짐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지켜졌고, 물질과 경험 사이에 애매하게 놓였다는 이유로 향수만큼은 예외였다.


그간 나에게 남은 발자국들은 물질이기도 했고 경험이기도 했다. 친구들과 수도 없이 많이 찍은 사진들과, 여전히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복합적인 감정들. 높이 쌓인 너덜너덜한 교재들과 잠깐이나마 내 것이 된 지식들. 유난히 피곤한 날에 건네받은 쪽지와 이미 입 속으로 녹아 사라져 버린 초콜릿. 경험과 물질이 뒤섞여 남아있는 자국들을 소화해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지난 3개월의 겨울 동안 끊임없이 물질을 지워내고 나의 언어로 엮은 글자를 내보내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이 한창이던 중 중학교 때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 이쯤 되니 내가 내 기록을 기억하는 건지, 그 시간을 기억하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라고 말하자 친구는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되냐고 물었다. 그냥 흘려보내. 너라는 버스가 달리고 있으면 사람들이 어느 순간 탔다가 어느 순간 내리는 거야. 친구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렇게까지 했던 이유는 준비를 조금이라도 하고 싶었다. 누군가를 응원하고 싶을 때, 위로하고 싶을 때, 사랑하고 싶을 때 내 마음을 내어줄 준비가 나에게는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었다. 늘 서툴다는 말 뒤에 숨어 왔기에 한가하고 느린 시간 속에서 우선 내가 그동안 받은 것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한 달쯤 뒤에 다시 만난 우리는 상반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전만큼 사람이 그립지 않다고 했고 친구는 떠나가는 관계들이 아쉽다고 했다. 나는 나의 최선이 언제였는지를 알았고 친구는 최선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했다. 친구는 나에게 정리 과정이 잘 끝났냐고 물었고, 씹어 삼키고 싶은 좋은 기억들이 많은 게 부럽다고 말했다. 너야말로 아쉬움이 든다는 건 좋은 추억이 많이 있다는 거 아니야? 나의 물음에 친구는 글쎄, 그냥 앞으로 행복할 자신이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해, 라고 대답했다.


헤어지기 전에 친구는 나를 안아주며 좋은 향이 난다는 말을 했다. 이 향수 발향력 진짜 약한데, 신기한 게 꼭 나 안아주는 사람들만 눈치채더라. 친구는 그거 좋은데, 라고 답하며 나를 언제 만나든 내가 뿌리던 향수가 기억날 것 같다고 말했다. 너 내 향수 어떤 향인지도 정확히 모르잖아. 가볍게 타박하자 친구는 실실 웃으며 향조 같은 건 잘 모르겠고 그냥 좋아, 라고 대답했다. 나쁘지 않은 기억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구체적으로 기억해 주는 것도 고맙지만 그저 약간의 좋은 감각으로만 남아있는 것도.


여전히 나는 오크통 밖으로 나오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완전히 숙성되지 않았고 여전히 서툴지만 조금쯤 달라진 건 나를 증발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점이다. 2%쯤 날아가버리는 것이 그다지 아깝지 않다고 느껴져 뚜껑을 조금 열어 두었다. 천사의 날개와 함께 훨훨 날아가기를.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서도 매일의 공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최소한의 흔적이 남았으면 한다. 이왕이면 나를 만나면 인사 대신 안아주는 이들의 몫으로 돌아가기를. 너무 강하지 않은 잠깐의 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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