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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톤 Sep 10. 2023

Love at first sight

당신의 직관을 믿나요

나에게 향수의 첫인상은 어쩔 수 없이 이름으로 결정된다. 숨을 들이쉬기 전에 이름을 먼저 물어보는 습관 때문일까. 한 줄의 시 구절 같은 단어들을 노래하듯이 불러보면 어떤 향이 날지에 대한 짧은 기대와 상상이 스쳐 지나간다.


Love at first sight. 이 향수도 사실 이름 때문에 궁금증이 생겼다. 나는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한 적이 있던가. 당장 생각나는 사람으로는 이제껏 한 명뿐. 그래서인지 나에게는 없는 낭만을 이 향수에서 한 조각쯤 만나보고 싶기는 했다. 국내에서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제품이라 우선 샘플을 신청하고 사용된 원료들을 살펴보았다.


탑 노트를 보는 순간 벌써부터 강한 직감이 왔다. 패션 프루트에 베르가못. 아마도 내 취향이 아닐 것이다. 운명적으로 첫눈에 반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열대과일 향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는 내 코이지만, 또 어떤 변덕을 부릴지 모르니 우선은 기다려보기로 했다.


며칠 뒤 내 손으로 들어온 향수는 마음에 안 드는 정도가 아니었다. 매캐했다.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어둡고 칙칙하고 꼬릿한 향. 베르가못이나 아카시아 향을 좋아하지는 않아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는데 싶어서 생전 처음으로 판매처에 변향이 온 건 아닌지 문의까지 남겼다. 결국에는 그저 내 코에 맞지 않을 뿐이라는 싱거운 결론이 났다.


일주일쯤 뒤에 외출할 때 두 번째로 그 향을 뿌렸다. 여전히 향긋하지는 않았지만 그 텁텁함에 조금 익숙해진 것도 같았다. 마음속으로 고개를 젓는 내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향수 어떤 거 쓰세요? 아까부터 향이 너무 좋아서..


당황스러우면서도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내가 싫어하는 향이 누군가에게는 이름을 물어볼 정도의 용기를 내게 하는 향이라니.


그분이 내민 휴대폰 메모장에 이름을 꾹꾹 눌러 담으며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원래 뿌리던 향수가 단종돼서 요즘 새로 알아보던 중이었는데, 흔한 건 쓰기 싫어서 고민하던 차에 나에게서 너무 예쁜 향이 났다는 그런 이야기. 마침 이 향수는 아무리 검색창을 두들겨도 시향기가 열 편도 채 나오지 않던, 아는 사람만 아는 향 아니었던가. 국내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 매캐함의 원인을 찾으려 했던 나에게는 고역이었지만, 그분께는 딱 어울릴 것 같았다.


휴대폰을 돌려받으며 그분은 제가 너무 큰 이익을 봤는데요, 라며 아이처럼 웃었다. 내 화장대에서 잠자고 있는 샘플을 나는 왜 가지고 나오지 않았던가. 동시에 그분의 코를 한 번만 빌려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좋아하고 싶어도 왜 도통 좋아지질 않는 건지.


그날 만난 친구에게 오면서 기분 좋은 일이 있었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는 내 목 주변을 킁킁거리며 물었다.


대박이다. 그래서 이 향수 이름이 뭔데?

러브 앳 퍼스트 사이트. 첫눈에 반했다는 거.


친구가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


딱 향수 이름처럼 됐네. 그분은 첫눈에 반한 거잖아.


그렇네. 진짜 그렇네. 나 뜻밖의 소개팅 주선자가 된 건가?

그분께 쥐여드린 짧은 이름이 작은 선물이 되었기를 바라며 레몬차를 한 모금 마셨다. 선물을 주는 것은 세상의 많은 물건들에게 제자리를 찾아주는 과정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첫눈에 반한다는 표현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너무 가벼운 찰나의 감정일 것만 같아서. 그 깃털 같은 감정을 주는 쪽도 받는 쪽도 바보가 될 것만 같아서.


그렇지만 오늘 그 반짝이던 표정을 본 이상 운명은 믿지 않아도 직관은 조금쯤 믿게 된 것 같다. 부분만을 보고 전체를 좋아한다고 믿는 순간적인 충동은, 내가 함부로 말할 수 없을 만큼의 수많은 경험이 누적된 선택일지도 모르니까.


미안, 사실 나는 너에게 첫눈에 반하지는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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