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이 깨지지 않고 녹을 때까지
실없는 말과 행동은 줄이 끊긴 연처럼 금세 날아가버리지만, 간간이 공중에서 추락해 남아있는 기억이 있다. 텀블러에 냉모밀을 담아 학교에 오더니 나에게 "먹을래?"라고 태연히 묻던 사람은 여름마다 종종 떠오른다. 그 뚜껑 열린 텀블러를 나는 기가 찬다는 듯이 내려다볼 뿐 입에 대지는 않았고, 그는 내 옆에 앉아 쉬는 시간 동안 음료 마시듯 메밀 면을 들이켰다.
그런 장난 같은 행동들에 나는 완전히 발을 담가본 적이 없었다. 너는 비정상이고 나는 정상이라는 듯이 가볍게 타박할 뿐. 그렇게 고고한 척 살면서 지키려고 한 게 과연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다 보니 그건 내 선택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럴 때 국물이라도 같이 마시는 사람이 진심으로 부러웠으니까. 나는 늘 너무 얼어붙은 채로 살아서 그런 순간에도 녹는 법을 몰랐다.
나한테는 내가 너무 재미가 없어서 그가 고른 자리가 왜 내 옆일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람들이 어느 날 날아가버릴까 봐 두려웠다. 이상형을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답하던 시절은, 결핍된 부분을 타인에게서 찾으려 한다는 본능을 알기 이전임에도 찾아왔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처음 했던 다짐은 성격을 좀 바꿔보자는 것이었다.
나와 같이 입시를 준비했던 사람의 수는 한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정도였다. 같은 학교에 두 명, 같은 학원에 두 명, 기존에 알던 친구 한 명 정도. 그중 합격자는 나뿐이었고, 나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채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변화를 시도하기에 적합한 환경이었다.
나의 성격은 어느 시기를 되짚어봐도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 다만 분명한 건 중학생 때 유난히 말과 행동에서 모범 답안을 찾으려 했던 점이다. 좋은 성적을 받는 것보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훨씬 어려웠다. 가장 쉬운 길은 말을 아끼는 것이었다. 물처럼 투명해지는 게 두려워서 꽝꽝 얼어붙는 거. 얼음은 속이 잘 들여다보이지 않으니까.
좋은 사람은 재미있고 편한 사람과는 또 달랐다. 가장 친한 친구조차 나를 파악하기 어렵다고 말할 때 종종 그 차이를 느꼈다. 언젠가 고민 상담을 요청했을 때 친구는 꽤나 기뻐했는데, 그건 우리가 친해진 후로 2년 만에 처음으로 나의 녹아내린 부분을 조금이나마 내보여준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고 살수록 하고 싶은 말조차 사라져 가는 것 같아서,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눈을 딱 감고 이곳저곳 먼저 말을 붙이고 다녔다. 기숙사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만난 친구에게 말을 붙인 적도 있었고, 친구의 친구를 소개받는 상황에도 자주 함께했다. 휴대폰 주소록에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이름들이 쌓여갔다. 우리 고등학교는 학급의 개념이 미약하고 각자 다른 시간표로 생활하는 이동 수업 체제였기에, 그 얼굴들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또 다른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언제 붙잡고 놓아야 할지 모를 그 넓고 얕은 관계들이.
우리 학교의 대표적인 행사 중 하나는 국제 학술 심포지엄이었다. 해외 학교의 학생들이 직접 우리 학교를 방문해서 연구 발표와 질의응답을 진행하는데, 우리 학년은 코로나로 인해 화상 통화로 심포지엄을 진행했다.
온라인이다 보니 심포지엄의 분위기는 꽤나 어색했다. 이를 예상한 듯이 아이스 브레이킹 시간이 계획되어 있었지만, 스몰토크와 게임을 진행해도 놀라울 정도의 침묵이 돌았다. 사회자는 진땀을 빼며 개인별로 말을 걸며 분위기를 띄우려고 노력했지만, 익숙지 않은 외국어로 누구 하나 말을 길게 이어가지 않았다. 나는 애초에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먼저 하는 경우가 별로 없어서, 그게 꾸며내지 않은 어쩔 수 없는 원래 성격이어서, 그저 그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그 침묵이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이스 브레이킹이라며 한껏 끌어올려둔 분위기가 더 불편했다. 나는 얼음이 있다면 깨기보다는 녹을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이니까. 내 체온으로 녹일 수 없는 얼음은 굳이 물로 돌려보낼 의지가 없는 사람이니까.
물론 그 침묵이 사회자에게는 엄청난 부담감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그날 사회를 맡은 친구와는 가벼운 친분이 있는 사이였는데, 심포지엄이 끝난 후 조금 지친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왜 그렇게 조용히 있었어. 너답지 않게.
살다 살다 이런 말을 듣는 날도 오는구나 싶었다. 나는 너무 나답게 있었는데. 네가 내 안과 밖을 구분하지 못한 건 나의 매일이 연기였으니까. 차가운 손을 들키지 않으려고 너랑 악수하기 전에는 입김을 불어넣었으니까.
외향적인 성격은 나에게 절대로 연기의 영역을 넘어설 수 없었다.
나는 결국 금세 피곤해져서 그저 나답게 살았다. 그렇게 살아도 친해질 사람과는 어떻게든 친해졌다. 그렇게 가까워진 친구들은 대부분 녹아내리는데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리는 사람들이었다. 올해로 5년째 꾸준히 만나는 친구는, 서로 얼굴만 알던 사이일 때 나를 갑작스레 빈 교실로 데리고 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내가 그녀의 현재만으로는 절대 읽어내지 못했을 과거에 대해.
얼음이 얼음을 만나면 부딪혀서 깨지는 게 아니라 같이 녹으면서 섞인다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나도 그날 저녁시간이 끝날 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알게 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사람에게. 그런 신기한 시작을 마주할 때에는, 사람 사이에 굳이 손을 잡아보지 않아도 체온을 가늠할 수 있는 공기가 오고 갈까 싶다.
여전히 말이 많고 편하게 장난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많다. 그 따뜻함은 상대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고, 나도 그런 사람들의 옆자리를 언제나 좋아하니까.
그럼에도 나는 계속 얼어 있어야겠다. 그 낮은 온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는 한. 그건 내가 일 년 동안 얼었다 녹았다 증발했다를 반복하며 내린 나름의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