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9cm 일기장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톤 Oct 27. 2024

여우볕

24년 10월 26일

웃는 시간을 다 합치면 얼마나 될 거 같아요. 생각보다 얼마 안 돼요. 행복했던 시간을 다 모으고 모아도 하루 중에 한 시간도 안 된다는 말이에요. 열일곱 살에 그 말을 처음 듣던 순간에는 조금도 와닿지 않았다. 나의 매일은 행복이 기본값이고, 아픔과 불안은 그저 맑은 날에 지나가는 여우비처럼 잠시 찾아올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배운 게 있다면 그런 생각들을 고쳐 나가는 법이었다. 무지개를 기다리던 아이는 이제 옛날 얘기가 되었고 먹구름은 나의 그림자가 되었으며 비는 영원히 그치지 않을 거라는 것. 비가 쏟아지던 중 잠시 햇볕이 났다가 숨어버리는 여우볕이라는 단어를 알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햇빛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그저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상태가 나는 늘 간절했다. 나의 세상은 사랑과 미움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공허의 이분법이었다. 좋아해서 슬프거나 좋아하지 않아서 공허하거나.


나는 적당히 좋아하는 법을 몰라서 그만큼 자주 슬펐다. 그런 내 불안정을 감수하겠다는 말을 들으면 아직도 이따금씩 신기하다. 너는 가라앉을 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 같다고, 그게 제일 두렵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차라리 다행이지. 나는 마지막 공포를 느꼈을 때 누군가의 발목을 붙잡을까 두려운데. 서로의 걱정을 먹고사는 것이 이 삶을 살아가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마음을 더 예민하고, 더 감사하고, 더 행복하게 받아들이려면 결국에는 여우볕 같은 삶이라도 감수하게 된다. 잠시 비가 그치는 순간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도록. 그래서인지 나는 이따금씩 내가 제일 아팠던 시절을 미치도록 동경한다.


사람은 조금쯤 배고프던 시절에 더 행복한 거 같아,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으로 배부르지 않던 그 시절에.

매거진의 이전글 네버엔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