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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슬픈 기억을 지우지 말아요

[연극] 어쩌면 해피엔딩 (2025. 11. 6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by 날개

(글에는 연극의 내용과 결말이 모두 언급됩니다~ 스포일러 주의!!)




우리는 모든 순간, 어떠한 엔딩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지금 내가 맡고 있는 일의 엔딩,

고단했던 오늘 하루의 엔딩,

즐거운 여행의 엔딩,

내 삶의 엔딩.


엔딩은 찜찜할 수도, 깔끔할 수도, 가뿐할 수도, 무거울 수도 있다.

그리고 모든 여정에는 끝이 있지만, 그 끝이 어떻게 맺어질지는 알기 어렵다.

그것은 심지어 인공지능 로봇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프로세스가 프로그래밍된 입력과 출력이 뚜렷한 로봇들도,

망가진 본체가 끝을 향해 소모되고 있지만 어떤 식의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가 없다.





매일 같은 시각 일어나, 날씨를 살피고, 음악을 듣고, 매월 배달되는 잡지를 받아 읽으면서 집 안에서 반복되는 일상을 살며, 모든 생활이 예측 가능할 줄만 알았던 헬퍼봇 올리버의 삶에 클레어가 들어온다.


충전기가 고장 나 도움이 필요했던 헬퍼봇 클레어.

과거 주인인 제임스와 재회할 날만 기다리며 살아가던 올리버의 삶에 클레어가 들어서며 그의 생활은 조금 달라진다.

처음에는 마주 보고 이야기하기도 부담스러워서 종이컵 전화기를 사용하던 올리버는 점차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이 편해지고, 내심 기다리기까지 한다.


종이컵 통화중인 곰돌이들


점점 가까워지던 둘은, 급기야 각자의 목적을 위해, 같이 제주도 여행을 떠나게 된다.

올리버는 전 주인 제임스를 만나기 위해. 클레어는 반딧불이를 만나기 위해.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도착한 제임스의 집. 제임스는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지만, 언젠가 찾아올지 모를 올리버를 위해 둘의 추억이 담긴 레코드판을 선물로 남겨두었다.

제임스가 올리버를 버린 것이라 생각하고 상처받을 올리버가 걱정되었던 클레어는 올리버와 제임스의 엔딩을 지켜보며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며 올리버를 위로한다. 제임스는 정말 올리버를 사랑했던 거였어!

올리버의 삶의 가장 큰 이유였던 제임스를 되찾는 여정은 이렇게 엔딩을 맞는다.

몸은 사라져 이 세상에 없지만 마음만은 따스히 남아 올리버에게 스민다.




그 둘의 제주 여행은 슬프지만 따스한 엔딩과 즐거운 추억을 머금은 채 끝이 났고, 그 둘은 결국 (예상대로) 사랑에 빠진다. 이런 행복한 순간이 우리의 삶에도 찾아오는구나!

버려진 헬퍼봇에 지나지 않았던 둘은, 서로에게 없어선 안될 존재가 된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클레어의 몸은 빠르게 수명이 다해가고, 다가올 것이 분명한 이별을 준비하기 위해,

둘은 서로가 만났던 그 순간부터의 모든 기억을 삭제하기로 한다.

너무 슬픈 이별을 하지 않기 위한 준비.


모든 기억을 삭제하더라도 꼭 기억하고 싶은 사소한 이벤트들...

서로가 서로를 위해 나누었던 시시콜콜한 사건들에 대한 기억들...

결국 모든 관계는 작은 기억들과 그 기억들을 얽는 서로의 마음이 전부인 것은 아닐까.




서로를 지우기로 약속한 밤이 지나고...

다음날 클레어는 고장 난 충전기 때문에 여지없이 다시 처음으로 올리버의 집 문을 두드리게 된다.

올리버는... 클레어를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놀라며 펄쩍 뛰거나 안절부절못하지 않고,

자연스레 문을 열어주고, 클레어에게 충전기를 연결해 준다.

올리버는 스스로 아주 슬픈 것이 분명한 이별을 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기억을 지우지 않고 클레어를 뒤에서 보살피기로 한다.


기억을 딱 잘라 삭제하며 슬픔과 아픔을 모두 지우며 살아가면 행복할까?

아니, 아니다.

슬픔과 아픔도 사랑과 행복에 스며있기에, 그 모든 작은 기억과 사소한 이벤트들을 둘러싼 장난과 웃음도, 눈물과 걱정과 뒤섞여 있기에, 딱 잘라 삭제할 수 없다.

그것은 진정한 해피엔딩이 아니다.


차라리 올리버가 결정한 아주 슬픈 이별이 진정한 해피엔딩일지 모른다.

어쩌면... 해피엔딩.




버려진 로봇들의 사랑 이야기가 이다지도 먹먹할 수 있을까?

따분하지만 안정되어 있는 하루하루 반복되는 나의 삶에도 언젠가 고장 난 헬퍼봇 하나쯤 불쑥 나타나줄지 모를 일은 아닐까?

나는 어떤 엔딩을 향해 오늘의 작은 기억들을 쌓아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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