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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 Jan 26. 2024

수다의 차원

길이나 넓이 말고, 부피.

나: 수다에 대한 고민을 할 때마다 '무슨 얘기를 하면 좋을까'를 생각하게 된단 말이지?


너: 그렇지.


나: 다른 사람들이 재미있다는 주제로 대화를 나눠봐도 잘 안되던데, 나만 그래?


너: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봐 봐.


나: 예를 들어서 네가 '재미'에 대한 고민을 한다는 걸 알고, '요즘 가장 재미있는 건 뭐냐'라고 물었어. 그랬더니 네가 '시를 써보니 다른 감성을 건드리게 되고, 맞는 표현을 생각하다 보면 시간이 후딱 가더라. 적당한 표현을 찾았을 때 희열도 느껴.'라고 했다고 치자.


너: 네 머릿속에 사는 나란 녀석 멋지네? 실생활에서는 시를 써도 시를 쓴다고 말 안 할 것 같은데 말이지.


나: ㅎㅎㅎ 아무튼 너의 대답을 듣고 나서 '오 저런, 네 시를 들려줘'라고 반응해서 너의 이야기를 더 끌어내거나, 왠지 너무 묻기 겸연쩍어 '오, 담에 기회 되면 나도 들려줘'라고 마무리를 하겠지.


너: 너라면 들려달라고 할 걸~


나: 너라면 내가 졸라서라도 들려달라고 할 거야, 네 시를 직접 들려주면 너무 즐거울 거 같아. 근데 모두에게 그러진 못할 거라 아마도 어떻게 더 대화를 이어나갈지 몰라서 마무리를 하고 다음 주제를 찾을 거야. 저렇게 멋지게 이야기를 꺼냈는데도 말이야! 네가 재미있는 걸 얘기했으니 이제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걸 공유하겠지. '요즘 요리에 빠졌어'.. 그러면서 사진을 보여줄 수도 있고.


너: 그 정도면 잘 흘러가는 거 아냐?


나: 그 사진을 본 다음에는 또 새로운 대화 주제로 가야 하잖아. 무슨 대화를 해야 하나, 그렇게. 그러니까 서로 얘기를 안 하는 건 아닌데 뭔가 단답형 시험을 보는 것 같달까. 조금 더 이야기가 오갈 때는.. 관련 정보를 나눌 때?


너: 아, 서로에게 답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네. 그러면, 말로 에세이라도 써?


나: 오, 괜찮은데? 대화를 주고받는 것에 있어서 문답형 말고 다른 방법을 도무지 잘 모르겠어. 너와 대화할 때 초반에는 답답하다가 끝나갈 때는 조금 더 명확해지는 느낌을 자주 받는데, 그 패턴을 생각해 보니 내가 모호하게 모양이 형성되지 않은 고민을 자주 너에게 던지고, 너는 내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더라고.


너: 그렇지. 나도 이해하고 싶으니까. 그러다가 아주 짧은 순간에 알아내지, '얘.. 자기도 잘 모르는구나!'


나: 헐, 맞아. 내가 할 줄 아는 방법이 말이나 글이다 보니 언어로 표현이 안될 때 생각이 멈춰. 근데 나는 그걸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단어에 얹어서 그 상태로 굳이 너에게 던지고야 말지.


너: 야 너, 나 힘들다 진짜.


나: 아마 내가, 너에게는 잘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던져도 된다고 생각하나 봐, 받아주는 경험을 했으니까. 혼자서 정리는 어차피 못하겠고!


너: 살아가면서 문제를 내기보다 풀어서 답을 찾는 역할을 더 많이 하니까 문제를 정의하는 게 어려운 걸까. 아무튼 다시 돌아가서.. 오늘 너의 고민은 '에세이 대화를 하고 싶다'야?


나: 응 맞아. 즉흥적인 대화다 보니, 구조를 촘촘히 짜고, 여러 번 수정을 거친 '너무 말이 되는' 에세이 대화는 어차피 할 수 없겠지만, 자기 생각과 감정을 흐르는 대로 내보내는, 말이 잘 되지 않더라도 이해해 보려고 서로 티키타카 하는 그런 대화였으면 좋겠다? 물론 맥락에 맞지 않게 아무 말이나 던지는 걸 얘기하는 건 아니야.


너: 그게 지금 너의 표현으로는 '에세이'구나. 딱 들어맞진 않다만.


나: 응. 이야기의 주제는 핑계고, 깊이 있고 심각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이 얘기 저 얘기가 응집되지 않은 상태로 풍성하게 오갔으면 좋겠어. 나중에 이야기의 점들을 연결할 수도 있겠지. 그건 온전히 나중 문제고 이야기를 하는 시점에는 그런 거 없이 '쟤는 왜 저 얘기를 하지? 이 얘기를 해도 되나?' 그런 벽 없이 흐를 수 있길.


너: 전에 네가 차원 얘기를 했었잖아. 점을 연결해서 선과 면이 되고 공간이 되고 그런. 지금 너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부피 있는 대화를 바란다, 고 말하면 좀 어울리려나 싶어.


나: 오, 그 표현 좋다. 맞아. 지금은, 끊김 없이 이 주제 저 주제로 넘어가고 중간중간 농담을 섞어가면서 대화하는 건 잘하거든. 근데 분명, 그런 시간을 보냈는데.. 어쩌면 이다지도 관계에 변화가 생기지 않느냔 말이야. 그리고 나는 그 대화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점 혹은 선형이었던 거 같아.


너: 네가 잘한다는 대화는 '시작, 첫 번째 관문, 두 번째 관문, 이제 곧 마지막 관문 통과하고, 오늘도 다들 수고했고 즐거웠고 다음에 또 만나자, 짝짝짝.' 이런 느낌이고, 네가 생각하는 '다른 대화'란 모임의 시작과 끝은 있겠지만 대화 자체에는 별로 시작과 끝이 있다는 생각이 안 들어.


나: 다음에 만나서 또 이어나갈 수도 있고, '네가 그때 말한 그거'를 내가 몇 년 동안 곱씹어 고민해 볼 수도 있고..


너: 삐진 거 아니고?


나: 삐진 거 몇 년을 말할 수 없는 관계라면 좀 고민해봐야 하는 거 아니냐.


너: 그러네. 전에 말했던 씨 뿌리기가 생각나. 우리는 진짜 자주 '네가 저번에 말한 거'에 대해 얘기하잖아, 나는 까먹었는데 너는 기억하고 있는 것들도 많지. 내가 무게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지만 그게 너에게 씨가 되어서 뿌리를 내리는 거 같아, 그 누구의 의도도 아니지만.


나: 응 바로 그런 거. 그래서 이 친구들이랑은 구 모양의 부피를 가진 대화를 하고, 저 친구들이랑은 도넛 모양의 부피를 가진 대화를 하고, 다른 사람들이랑은 피라미드 모양이 될 수도 있고.. 색이 입혀질 수도 있겠지.


너: 여전히 어려워. '그래서 어떻게?'라는 것에 조금도 답할 수 없어!


나: 내 말 들어줘서 너어무 고맙다 야. 일단 나는 말을 꺼냈고 너의 이런저런 질문을 통해서 오늘 싹이 조금은 자란 거 같아.


너: 어렵다고 말했는데 고맙다고 답하는 건 뭐냐.


나: 지금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 나도 안타까워ㅎㅎㅎ. 나중에 '저번에 하던 얘기'로 이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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